진화 심리학자들이 잘 알려진 현상에 끼워맞추기식으로 선택압(selection pressure)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뿐이며 신선한 예측 또는 가설을 제시하지는 못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학자가 이미 잘 알려진 현상을 설명했다고 부끄러워할 이유는 전혀 없다. 아무리 잘 알려진 현상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이론이 내적 일관성이 있고 현상에 잘 부합한다면 그 이론은 훌륭한 이론이다. 물론 이론에서 출발하여 지금까지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했던 현상을 발굴한다면 매우 인상적이다. 이럴 때에는 끼워맞추기식 설명일 뿐이라고 비아냥거리기 힘들다.

 

진화 심리학의 가설 중 상당 부분은 남자는 늑대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와 같은 잘 알려진 상식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어떤 진화 심리학 가설들은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했던 현상의 발굴로 이어지기도 했다. 즉 현상에서 출발하여 그것과 부합하는, 선택압에 대한 이야기를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택압에 대한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어떤 현상을 예측한 것이다.

 

 

 

, 사랑, 질투에 초점을 맞춘 욕망의 진화』에 나오는 사례들 중 일부를 인용해 보겠다.

 

욕망의 진화(The evolution of desire, 2, 2003), 데이비드 버스 지음, 중환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7

 

 

 

남성의 정자량은 부부가 오래 떨어져 있을수록 급격히 증가했다. 즉 격리 시간이 길수록 남편이 아내와 다시 만나 섹스를 했을 때 사정하는 정자량이 많았다. 부부가 함께 살며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고 100퍼센트 함께했을 때 남편은 한 번 사정 시 3 8900만 개의 정자를 배출했다. 그러나 부부가 함께 살더라도 실제로 같이 지낸 시간은 5퍼센트에 불과했을 때 남편은 한 번 사정 시 7 1200만 개, 즉 거의 2배나 되는 정자를 방출했다. 부부가 잠시 떨어져 있는 동안 아내가 혼외정사를 저질러서 다른 남성의 정자가 아내의 생식관 안에 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을 때 남편이 사정하는 정자량은 증가한다. 이 같은 현상은 인간이 진화 역사를 통해 찰나적인 성 관계와 혼외정사를 꾸준히 해 왔다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욕망의 진화, 157)

 

아내가 남편의 눈 앞에 보이지 않는다면 남편은 아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어쩌면 아내가 다른 남자와 성교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아내가 눈 앞에 보이지 않는 시간이 많을수록 남편의 입장에서는 아내와 성교를 할 때 더 많이 사정하는 것이 번식에 유리하다. 다른 남자와 성교를 할 가능성이 클 때에는 사정 시 정자량을 늘려서 자신의 정자로 임신시킬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아내의 자궁을 다른 남자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쓸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인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연구는 정자량을 그런 식으로 조절하는 심리적-생리적 기제를 남자가 진화시켰음을 상당히 그럴 듯하게 입증했다.

 

만약 진화론적 고려 또는 선택압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면 아내가 남편의 눈에 보이지 않았던 시간남편이 성교 시 사정하는 정자량 사이의 상관관계를 조사해 보겠다는 생각이 떠오르기 힘들다.

 

 

 

영국 전역에 걸쳐 3,679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실시된 한 연구에서는 기혼 여성들에게 월경 주기를 적게 하고 그 기간 동안 남편과 언제 성 관계를 맺었는지, 그리고 만약 혼외정사를 하고 있다면 내연의 남자와는 언제 성 관계를 맺었는지 기록하도록 요청했다. 그 결과, 여성들은 월경 주기 가운데 배란 가능성이 가장 높고 따라서 가장 임신하기 쉬운 시점에 혼외정사를 갖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사실은 남편들에게는 별로 유쾌한 소식이 아닐지 모르지만, 여성들이 혼외정사를 통해 자기 자신의 번식적 이득을 추구하게끔 진화된 전략을 구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구체적으로 이 전략은 지위가 높은 외간 남자로부터 우수한 유전자를 얻고 원래의 남편에게서는 물질적인 투자를 받아 내는 전략이다. (욕망의 진화, 159)

 

만약 여자가 바람을 피워서 좋은 유전자(good gene, 우수한 유전자)를 얻도록 진화했다면 여자는 되도록 배란기에 외간 남자와 성교를 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외간 남자와 시도 때도 없이 자주 성교를 하면 남편에게 들킬 가능성이 커진다. 따라서 되도록 임신 가능성이 높은 시기에만 외간 남자와 성교를 하는 것이 유리하다.

 

그리고 위에서 인용한 연구의 결과는 실제로 여자가 그런 식으로 진화했음을 암시한다.

 

 

 

스티브 갱지스태드와 랜디 손힐은 신체적 대칭성이 저마다 다른 남성들에게 동일한 티셔츠를 이틀 연속으로 입고 자되, 그 기간 동안 샤워를 하거나 방취제를 쓰지 말 것을 요청했다. 또한 그 기간 동안 고추, 양파, 마늘 등의 향신료를 넣은 음식을 절대 먹지 말라고 했다. 이틀 후, 그들은 티셔츠를 수거해서 일단의 여성들을 실험실로 불러들여 각각의 냄새를 맡게 했다. 그녀들은 각각의 티셔츠에서 나는 냄새가 좋은지 나쁜지를 평가했다. 연구 참여자들에게 실험의 목적은 알리지 않았으며, 그 어느 누구도 티셔츠를 입었던 남성들과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흥미롭게도 오직 월경 주기의 배란기에 있던 여성들만 대칭적인 남성이 입었던 티셔츠에서 상쾌한 남새가 (아마 어떤 여성들은 그나마 덜 지독한 냄새라 표현했겠지만) 난다고 대답했다. (욕망의 진화, 471)

 

대체로 좌우가 더 대칭적인 동물의 유전자가 더 좋은 유전자다. 여자가 좋은 유전자를 얻도록 진화했다면 배란기에 대칭성에 더 민감해질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그리고 위에서 인용한 연구 결과는 여자가 실제로 그런 식으로 진화했음을 암시한다. 진화론적 고려가 없었다면 대칭성과 배란기를 연결시키기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껏 행해진 연구 중 가장 통제가 잘된 실험으로, 진화심리학자 데벤드라 싱과 매트 브론스태드는 월경 주기가 각기 다른 17명의 여성에게 흰색 면 티셔츠를 입혀 체취를 얻었다. 여성들은 월경 주기에 코퓰린(copulin)이라는 질 내 지방산을 분비한다. 대부분의 코퓰린은 배란기에 만들어지며, 여성이 황체기에 접어들어 월경에 가까워질수록 분비량은 꾸준히 감소한다. 여성은 또한 가슴의 젖꽃판 같은 부위게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아포크린 땀샘에서도 체취를 분비한다. 연구의 목적이나 연구에 참여한 여성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남성 52명에게 각각의 티셔츠의 상쾌함섹시함을 평가해 달라고 부탁했다. 남성들은 가장 번식력이 높은 난포기 여성이 입은 티셔츠에서 나는 체취가 가장 섹시하고 상쾌하다고 답했으며, 평균 7.76점을 부여했다. 이 점수는 황체기 여성이 입은 티셔츠에서 나는 체취보다 거의 7점이나 더 높았다. (욕망의 진화, 475)

 

남자의 입장에서 볼 때 여자가 배란기일 때 성교를 해야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남자가 여자의 배란기를 알아내는 심리 기제를 진화시켰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위의 연구 결과는 실제로 남자에게 그런 능력이 있음을 암시한다.

 

 

 

경구 피임약을 복용하는 여성들의 경우에는 성적 주기와 위험 감수 사이에 어떤 연관성도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피임약을 복용하지 않는 여성들의 경우에는 배란 중인 여성은 위험을 감수하는 행동을 적게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자들은 위험 회피가 반강간 적응의 후보가 될 수 있으며 위험을 무릅쓰는 행동이 낮아지는 이유를 설명하는 다른 대안 가설들을 성공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위험을 무릅쓰는 행동이 감소하는 현상을 배란기에 성적 감수성이 낮아지기 때문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사실 여성들은 상호 합의된 성 관계에 대해서는 월경 주기 중기에 성적 감수성이 정점에 다다른다. 월경 주기 중기의 위험 회피는 또한 여성의 일반적인 활동 수준이 이 시기에 전반적으로 낮아지기 때문으로 돌릴 수도 없다. 만보계로 측정한 여성의 활동 수준은 배란 중에 오히려 증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욕망의 진화, 533~534)

 

만약 여자가 되도록 좋은 유전자를 가진 남자와 성교하도록 진화했다면 여자한테 퇴짜 맞은 남자는 좋지 않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남자에게 강간을 당한다면 여자는 좋지 않은 유전자로 임신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여자는 특히 배란기에 강간을 당하면 큰 피해를 본다. 그러므로 여자가 특히 배란기에 강간을 당하지 않게 조심하도록 진화했을 가능성이 있다. 위의 연구 결과는 실제로 여자가 그렇게 진화했음을 암시한다.

 

 

 

진화 심리학계에는 『욕망의 진화』라는 책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책에 인용된 논문들만 있는 것도 아니다. 욕망의 진화』에서는 주로 성, 사랑, 질투에 대해 다루었는데 진화 심리학자들이 성, 사랑, 질투에 대해서만 연구하지는 않는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수 많은 영역을 다루고 있다. 진화 심리학자들이 쓴 다른 문헌을 뒤져 보면 수 많은 신선한 가설들 또는 예측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선택압에 대한 이론들은 기존에 잘 알려진 현상들도 설명하지만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현상의 발굴에도 톡톡한 공헌을 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 행동, 사회, 문화, 역사를 연구할 때에는 진화론이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는 사람들의 생각이 틀렸음을 보여준다.

 

 

 

이덕하

2011-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