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가설들의 집합을 가설 공간(hypothesis space)이라고 한다. 인간의 마음에 대한 가설 공간은 무한하다. 상상력을 조금만 발휘하면 인간의 마음에 대한 가설을 끝없이 만들어낼 수 있다. 몇 가지 예를 제시해 보겠다.

 

첫째, 남자는 빨간색을 볼 때 질투를 더 많이 한다.

 

둘째, 남자는 파란색을 볼 때 질투를 더 많이 한다.

 

셋째, 남자는 녹색을 볼 때 질투를 더 많이 한다.

 

넷째, 남자는 빨간색을 본 후 파란색을 볼 때보다 파란색을 본 후 빨간색을 볼 때 질투를 더 많이 한다.

 

다섯째, 남자는 녹색을 보고 빨간색을 본 후 파란색을 볼 때보다 파란색을 보고 빨간색을 본 후 녹색을 볼 때 질투를 더 많이 한다.

 

여섯째, 남자는 (태어난 날에서 따지기 시작해서) 짝수 날에는 질투를 많이 하고, 홀수 날에는 질투를 적게 한다.

 

일곱째, 남자는 3의 배수인 날에는 질투를 많이 하고, 3의 배수가 아닌 날에는 질투를 적게 한다.

 

여덟째, 남자는 4의 배수인 날에는 질투를 많이 하고, 4의 배수가 아닌 날에는 질투를 적게 한다.

 

아홉째, 남자는 5의 배수인 날에는 질투를 많이 하고, 5의 배수가 아닌 날에는 질투를 적게 한다.

 

드넓은 가설의 바다에 있는 가설들 중 아무 것이나 선택해서 검증하겠다고 나서는 과학자는 성공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런 가설들 중 거의 모두가 쓸모 없는 가설이기 때문이다. 가망성 있는 가설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적절한 어림짐작법(heuristics, 발견법)을 써야 한다.

 

인간 행동을 관찰한 결과를 바탕으로 가설을 만드는 방법이 있다. 그러면 남자는 213의 배수인 날에는 질투를 많이 하고 213의 배수가 아닌 날에는 질투를 적게 한다와 같은 가설보다는 훨씬 더 가망성 있는 가설에 이를 수 있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선택압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가설을 만들면 가망성 있는 가설에 이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선택압이란 과거 환경의 온갖 측면들 중에서 어느 정도 안정된 측면을 말한다. 인간이 자연 선택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런 안정된 측면이 인간의 마음이 진화하는 데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른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선택압을 고려해서 가설을 정립한 다음에 그 가설을 검증하려고 한다. 선택압에서 출발하여 어떤 가설을 추론해냈다고 해서 그 가설이 옳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선택압에 대한 지식이 틀릴 수도 있다. 과거의 환경에 대해서 정확히 알기 어려울 때가 많기 때문에 그런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만약 선택압에 대한 잘못된 지식에서 출발하여 추론을 했다면 쓸모 없는 가설에 이를 것이 거의 뻔하다.

 

어떤 선택압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 선택압에 대응하는 심리 기제가 반드시 진화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가설을 만든 사람이 고려하지 못한 또 다른 선택압이 그 선택압을 압도했는지도 모른다. 선택압은 있었지만 그에 부응하는 심리 기제의 진화를 위한 돌연변이가 생기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맹점이 사라지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듯이 선택압에 부응하는 심리 기제가 진화하는 길이 막혔는지도 모른다.

 

선택압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가설을 만들 때 때로는 헛다리를 짚을 수 있다는 점을 진화 심리학자들도 잘 안다. 하지만 그래도 큰 지장은 없다. 어차피 그런 식으로 가설을 만들 때 100% 확실하다고 기대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선택압에 대한 지식을 전혀 활용하지 않을 때보다 가설 공간에서 덜 헤매기만 하면 그런 어림짐작법은 가치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어차피 과거 환경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그런 어림짐작법이 쓸모가 없다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과거 환경이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어림짐작법이 쓸모가 없다고 주장한다.

 

두 가지 반론 모두 틀렸다. 우리는 과거 환경의 어떤 측면에 대해서는 아주 정확히 알고 있으며, 어떤 측면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다. 과거 환경의 어떤 측면은 완벽하게 안정적이며, 어떤 측면은 상당히 안정적이며, 어떤 측면은 전혀 안정적이지 않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과거 환경의 수 많은 측면들 중에 아주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이나 상당히 그럴 듯하게 알 수 있는 것에서 출발하면 된다. 그리고 과거 환경의 수 많은 측면들 중에서 완벽하게 안정적이거나 상당히 안정적인 측면에서 출발하면 된다.

 

과거 환경에 대해 우리가 사실상 완벽하게 알고 있으며 사실상 완벽하게 안정적인 측면들이 아주 많다. 몇 가지만 나열해 보겠다.

 

첫째, 수학 정리(theorem)들은 과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예컨대 과거에도 3 빼기 2 1이었다. 따라서 동굴 속으로 곰이 세 마리 들어갔는데 몇 시간 후에 두 마리가 동굴 속에서 나왔다면 동굴 속에는 적어도 곰이 한 마리 있다는 점은 현재나 과거나 똑 같다.

 

둘째, 물리 법칙이나 화학 법칙 역시 과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대폭발(big bang) 직후에는 꼭 그런 것만도 아니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진화 심리학자들이 그렇게 오래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는다.

 

셋째, 천만 년 전에도 우리 직계 조상에게는 암컷과 수컷이 있었으며 암컷이 임신을 했고 암컷이 수유를 했다.

 

넷째, 5백만 년 전에도 세상에는 독사가 살고 있었다. 우리의 직계 조상이 살고 있던 지역에도 독사가 살고 있었다는 점이 고생물학적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다섯째, 수십 만 년 전에도 우리의 직계 조상은 무리 생활을 했다. 즉 오랑우탄이나 치타와 같은 단서성 동물이 아니었다.

 

여섯째, 적어도 지난 수백만 년 동안 우리의 직계 조상은 수컷이 암컷보다 덩치가 컸으며 힘도 셌다.

 

일곱째, 과거에도 바이러스와 세균이 있었으며 그 중 일부는 병을 일으켰다.

 

여덟째, 우리의 직계 조상은 장기간 물과 음식을 먹지 못하면 죽었다.

 

 

 

위에서 나열한 것보다 덜 확실하거나 덜 안정적인 측면에서 출발하여 가설을 만들면 아무래도 가망성이 덜한 가설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래도 선택압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고 가설 공간에서 헤매는 것보다는 낫다.

 

 

 

이덕하

2011-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