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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권(magisterium, 敎權) 개념에 대해서는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의 『Rocks of Ages: Science and Religion in the Fullness of Life』를 참조하라. 여기에서는 과학의 교권과 도덕 철학의 교권에 대해서만 이야기해 보겠다. 그리고 나는 굴드와는 교권 개념을 약간 다르게 사용한다. 굴드는 “종교의 교권”과 “도덕 철학의 교권”을 동일시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종교는 때로는 과학의 교권에도 참견하고 때로는 도덕 철학의 교권에도 참견한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한 때 과학의 교권에 속하는 지동설을 부정하기도 했으며, 구약 성서에는 이웃 나라에 쳐들어가서 남자들을 죽이고 여자들을 전리품으로 차지해도 된다는 도덕 철학 명제를 설파하기도 했다. 따라서 “종교의 교권”이라는 용어는 혼란만 불러일으킬 것 같다.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과학의 교권에서는 사실을 다루는 반면 도덕 철학의 교권에서는 당위를 다룬다. 과학의 교권에서는 현상을 설명하려고 하는 반면 도덕 철학의 교권에서는 규범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진화 윤리학은 당위를 다루기는 하지만 과학의 교권에 속한다. 왜냐하면 진화 윤리학에서는 규범, 양심, 죄책감 등의 진화를 해명하려고 하지 규범을 정당화하려고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온갖 경향의 도덕 심리학도 과학의 교권에 속한다. 도덕 심리학에서는 도덕성과 관련된 심리 현상을 과학적으로 해명하는 것이 목적이지 규범을 정당화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진화 윤리학을 도덕 심리학의 한 학파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과학자들의 동물 실험에 대한 규제는 도덕 철학의 교권에 속한다. 왜냐하면 동물과 관련된 현상의 해명이 아니라 동물의 권리에 대한 규범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굴드가 주장했듯이 교권의 경계를 존중해야 한다. 즉 함부로 하나의 교권에서 다른 교권으로 넘나들면 안 된다. 과학의 교권의 명제에서 시작하여 무턱대고 도덕 철학의 교권의 명제로 직행하는 것을 보통 자연주의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라고 부른다. 근본적인 수준에서는 사실 명제로부터 규범 명제를 이끌어낼 수 없다.
자연주의적 오류라는 용어를 만든 사람은 무어(George Edward Moore)이며 그는 나름대로 자연주의적 오류를 정의했다. 하지만 지금은 보통 그가 정의했던 것과는 다른 의미로 이 용어를 쓰고 있다. 보통 이 용어는 사실로부터 부당하게 당위를 이끌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흄(David Hume)이 그런 오류를 비판한 적이 있다. 흄에 따르면 ‘is(그렇다)’에서 ‘ought(그래야 한다)’를 이끌어내는 것은 오류다.
위에서 “무턱대고”, “근본적인 수준”, “부당하게” 등이 삽입되어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사실 명제에서 당위 명제를 이끌어내는 것이 항상 문제인 것은 아니다. “인간이 농약을 마시면 치명적인 해를 입는다”라는 사실 명제 즉 과학의 교권의 명제로부터 “농약은 어린이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보관해야 한다”는 당위 명제 즉 도덕 철학의 교권의 명제를 이끌어내는 것에는 별 문제가 없다. 즉 때로는 사실 명제에서 당위 명제를 정당하게 이끌어낼 수 있다.
근본적인 수준의 규범 또는 도덕적 가치를 사실 명제로부터 이끌어내려고 할 때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 나는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수학으로부터 공리(axiom)와 정리(theorem) 개념을 빌려서 도덕 공리와 도덕 정리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것이다. 헨리 시지윅(Henry Sidgwick, 1838-1900)이 이미 19세기에 도덕 공리라는 용어를 썼다. 나는 시지윅의 글을 읽어 보지 않았으며 그가 어떤 의미로 도덕 공리라는 용어를 썼는지도 잘 모른다. 도덕 철학에서는 “공리”와 “정리”가 수학에서만큼 깔끔한 개념이 되기는 힘들겠지만 나의 의도를 어느 정도는 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수학자들이 어떤 정리가 옳다는 것을 보여주는 과정을 증명이라고 한다. 하지만 모든 수학 명제가 증명될 수는 없다. 수학자들도 증명을 포기하고 “그냥 옳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수준에 부딪친다. 수학자들은 그런 명제를 공리라고 부른다.
도덕 공리 역시 “그냥 옳다”고 가정된다. 즉 정당화를 포기하는 것이다. 에우클레이데스(Εὐκλείδης, Eukleidēs, Euclid, 유클리드) 기하학과 공리 체계가 다른 비에우클레이데스(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있듯이 도덕 공리가 서로 다른 도덕 체계들이 존재할 수 있다. 도덕 정리는 도덕 공리들에서 유도된다. 물론 그 유도 과정이 수학의 증명처럼 엄밀하기는 힘들 것이다.
도덕 공리와 도덕 정리 개념을 사용하여 농약 보관에 대한 규범이 어떻게 유도되는지 살펴보자.
도덕 공리(전제 1): 인간의 목숨은 소중하다.
사실 명제(전제 2): 어린이는 지식과 판단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농약을 아무 곳에나 두면 어린이가 마실 가능성이 있다.
사실 명제(전제 3): 인간이 농약을 마시면 치명적인 해를 입는다.
도덕 정리(결론): 농약은 어린이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보관해야 한다.
도덕 공리를 바탕으로 사실 명제에서 출발하여 도덕 정리를 이끌어내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이런 것을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도덕 정리는 “근본적인 수준”의 규범 즉 도덕 공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위에서는 사실 명제에서 출발하여 “무턱대고” 또는 “부당하게” 규범을 이끌어 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명제에서 도덕 공리를 이끌어내려고 할 때 문제가 발생하며 그럴 때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부를 수 있다. 도덕 공리가 아니더라도 사실 명제에서 부당하게 규범을 이끌어내는 것은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일부 진화 심리학자들은 강간이 적응이라고 주장한다.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강간은 적응이다”라는 사실 명제가 “강간은 정당하다”는 당위 명제로 이어진다고 우려한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추론이 성립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 여성주의자들은 사실 명제에서 당위 명제를 무턱대고 이끌어내도 된다고 믿는 모양이다. 만약 사실 명제에서 당위 명제를 무턱대고 이끌어내는 것이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생각한다면 “강간은 적응이다”가 “강간은 정당하다”로 이어진다고 우려할 필요가 없다.
강간이 적응이라고 하더라도 강간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번식 경쟁에서의 승리를 도덕적 이상으로 삼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마귀 암컷이 교미를 할 때 수컷을 잡아 먹는다고 해서 살인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연을 모범으로 삼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지난 수백만 년 동안 점점 똑똑해지는 방향으로 진화했다고 해서 우리가 인간을 더 똑똑해지도록 만들겠다는 우생학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인간 진화의 방향을 우리의 도덕적 기준으로 삼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당위 명제에서 부당하게 사실 명제를 이끌어내는 것을 역자연주의적 오류(anti-naturalistic fallacy, 반자연주의적 오류) 또는 도덕주의적 오류(moralistic fallacy)라고 부른다. “강간은 부당하다”라는 규범 명제에서 “강간은 적응일 리가 없다”라는 사실 명제를 이끌어내는 경우가 그렇다. “백인과 흑인이 평등하게 사는 사회가 바람직하다”에서 “흑인이 선천적으로 IQ가 낮을 리 없다”를 이끌어내는 경우도 그런 오류에 해당한다. “강간은 적응이다”나 “흑인이 선천적으로 IQ가 낮다”와 같은 과학의 교권의 명제는 사람들의 도덕적 가치가 아니라 과학의 기준에 따라 가려야 한다. 현재의 자신의 도덕적 가치 또는 21세기의 선진 산업국의 지배적 도덕적 가치가 과거의 진화 역사를 결정한다고 믿는 것은 대단한 과대망상이다.
즉, 이덕하님이 말씀하신 '근본적'의 의미가 공리 수준이라면, 이덕하님께서는 도킨스가 tit for tat 도덕 원리를 비판하면서 '근본적'인 수준을 건드렸기에 문제될 것이란 의미겠지요. 왜냐하면, 단지 도덕 정리 수준이라면, 님께서도 사실이 가치에 주는 영향 혹은 사실로부터 가치(도덕 정리)가 도출가능함을 인정한다고 하셨으니까요. 그렇다면, tit for tat 도덕원리는 정리 수준이 아닌, 공리 나 공준 수준이였다는 말이 되는데, 과연 그런지 어떻게, 누가 보증하나요?
제가 봤을 때는, 이건 얼마든지 tit for tat 에 대한 비판은 정리 수준으로 격하시킬 수 있습니다. 님의 도식에 따르자면,
도덕 공리(전제 1): 인간의 생명과 권리는 소중하다. (도킨스의 숨은 대전제라고 가정)
사실 명제(전제 2): 중범죄자에게 받은 만큼 되돌려 주라는 tit for tat 도덕 감정과 원리에 따르는 제도와 사람들이 있다.
사실 명제(전제 3): 인간의 뇌는 컴퓨터와 유사한 물리적 구조이기 때문에, 인간 행동은 교정될 수 있다.
사실 명제(전제 4): tit for tat 은 보복행동을 함으로써,
인간의 생명(ex. 사형제)과 권리(ex. 인간 행동 교정이 가능하다면 누릴 수 있을 권리들)를 빼앗을 가능성이 있다.
도덕 정리(결론): 따라서 tit for tat 은 교정과 치료가 가능하다면 지양해야 한다.
이것과 도킨스의 글은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겠고, 다른 부분에서 비판도 가능하겠지만, 적어도 그것이 "공리" 수준, 즉 이덕하님의 표현대로라면, '근본적' 이라서 문제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근본적'이란 의미로서, 인간의 도덕 원리의 기원, 발생 등이 더 적절한 것 같긴 합니다만, 사실 '근본'이나 '본질' 이 무엇인지도 논란거리이고 이런 거 의미 따지는 것 자체가 너무 형이상학적인 것 같기도 하군요.
자연주의적 오류나 사실-당위 문제에 대해서 제가 깊은 내공이 없어서 자연주의적 오류자체를 반박할 엄두는 못 내겠지만, 전 사실 자연주의적 오류 자체 혹은 사실- 당위 문제 자체를 약간 문제있다고 생각하고 있긴 합니다. 즉, 형식 논리적인 의미에서는 그것이 맞지만, 과연 그것이 세계를 담아내는가 하는 것에는 의심스럽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즉, 인간의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의 경계구분이 과연 그렇게 명확한가 혹은 그것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가 있고, 이것은 언뜻 과학철학에서 말해지는 과학적 관찰의 이론의존성 문제와도 유사해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사실/가치 판단 경계에 대한 공격은 많은 시도가 있었을 것인데...그 중 중국어 방 논증으로 유명한 존 설에 관해서도 언급이 되는 스켑의 아래 글이 기억에 남고 유용했던 것 같아서 링크해보겠습니다.
http://www.skepticalleft.com/bbs/board.php?bo_table=01_main_square&wr_id=66497&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B%A1%9C%EB%A7%88&page=
거기 댓글 보시면, 이덕하님도 언급이 됩니다. 그리고 글쓴분은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하시지만, 댓글에서 반론도 펼쳐지므로 더욱 유익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나 저러나,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차원" 에서만큼은 자연주의적 오류는 약간 공허한 소리 같기도 합니다.
이덕하님께서는 도킨스는 '자연주의적 오류다.' 라고 하시면서 이때의 자연주의적 오류란, 공리 수준의 도덕 원리- 이것을 '근본적 수준의 도덕원리' 라고도 표현- 를 사실에서 도출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정리 수준의 도덕 원리는 사실에서 도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위에서 저는 tit for tat 도덕 원리에 반대하는 도킨스의 주장이 님이 말씀하시는 정리 수준에서 도출 가능함을 보였습니다. 따라서 님이 말씀하시는 '자연주의적 오류' 에 해당되지 않음(않을 수도 있음)을 보였습니다.
이런 경계문제는 흔히 있는 것 같습니다. 전 보통 그 경계 자체는 명확하게 칼로 썰어 낸 듯이 나뉘어 질 수 없다는 쪽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영역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링크된 스켑글의 alleviate 님이 말씀하시는 것도 그런 쪽일 겁니다.
일단, 그것이 도덕 공리 수준이라는 것을 입증할 책임은 님에게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인간의 생명과 권리가 소중하다보다는 하위일 것같은데, 과연 그것이 도덕 공리라거나, '근본적인 수준의 도덕원리' 라고 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 입증할 책임은 님에게 있습니다.
만약 단지 그런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면, 그것은 분명 실제로 그런 이들이 있겠지만, 단지 그런 이유라면, 식인종도 존재했을 것이므로, 식인종의 도덕 원리 또한 공리 수준의 도덕 원리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또, 단지 그런 이유- tit for tat 을 도덕 공리 수준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다.- 라면, 님께서 본문에서 '사실에서 도덕 정리 수준은 이끌어 낼 수 있다'고 한 부분 역시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볼 사람도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어떤 이 A가 도덕 공리 대전제에서 사실을 거쳐서 도출한 도덕 정리에 대해서, 또다른 어떤 이 B는 그 도덕 공리 대전제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도출된 그 도덕 정리 자체가 자신의 도덕 공리에 위배된다고 할 사람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님께서 공리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상대주의적 관점을 취함으로 인해, 무엇이 공리이고 정리인지 알 수 없게 됨에도 불구하고, 어떤 정리는 사실에서 도출가능하며, '자연주의적 오류'가 아니라고 하고, tit for tat 은 정리가 아닌, 공리라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도덕 공리 체계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며 실제로 다릅니다. 따라서 보복주의는 어떤 사람에게는 도덕 공리이며 어떤 사람에게는 아닙니다. 예컨대 보복주의는 공리주의자에게는 당연히 도덕 공리가 아닙니다. 보복주의가 도덕 공리가 아닌 사람에게는 보복주의가 “도덕 공리의 수준”의 문제도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와 관련하여 제가 입증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도덕 철학은 정당화 체계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보복주의를 주장하면서 “나는 보복주의를 정당화할 생각이 없다. 나에게 보복주의는 그냥 옳다.”라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보복주의를 도덕 공리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도덕적 상대주의자입니다. 제가 늘 이야기해왔듯이 도덕 규범은 근본적인 수준에서는 입장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도덕 철학의 교권이 과학의 교권과 다른 점입니다.
“식인종의 도덕 원리 또한 공리 수준의 도덕 원리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 그렇습니다. 만약 어떤 식인종이 “다른 부족 사람들은 잡아 먹어도 된다” 또는 “다른 부족 사람들의 인권은 무시해도 된다”를 자신의 도덕 공리라고 주장한다면 저는 그것이 틀렸다고 이야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와 도덕 공리가 다를 뿐이죠. 즉 저와 입장이 다를 뿐이죠.
실제로 저는 식인종 문제에 대한 글을 쓴 적도 있습니다.
<개고기 금지를 정당화할 수 없다면 식인 금지도 정당화할 수 없다>
http://theacro.com/zbxe/403761
저는 보복주의가 정리가 아닌 공리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도덕 공리일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에게는 도덕 정리일 수도 있으며, 어떤 사람에게는 도덕 정리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도덕 공리 체계를 받아들이느냐 여부는 자연주의적 오류를 논할 때 상관이 없습니다. 스스로 얼마나 일관된 도덕 철학 체계를 만드느냐가 중요하지 남들이 그 공리 체계를 받아들이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님의 말씀처럼 상대주의자가 되버린다면, 우리는 어떤 도덕 주장에 대해서도 비판하면 안됩니다. 모두 다 취향의 문제니까요.
X라는 도덕 원리는 A에게 도덕 공리이고, B에게는 도덕 정리입니다. 님의 말씀대로라면, 이건 취향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A가 B에게 '사실에서 도덕 공리를 도출한 자연주의적 오류이다.' 라고 비판해도, B는 A에게 '사실에서 도덕 정리를 도출했기 때문에 자연주의적 오류가 아니다.' 라고 하면 그 뿐입니다.
동의하십니까?
그럼 이제, A에 이덕하님을 넣어보시고, B에 도킨스를, X에 응보주의를 대입하면 됩니다. 따라서 도킨스는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되고, 자연주의적 오류도 아니게 됩니다.
결국은 이덕하님은 '근본적'으로는 상대주의라고 하시면서도,
왜 어떤 것은 이덕하님이 말씀하시는 '자연주의적 오류가 아닌 사실에서 도출한 도덕 정리' 이고,
왜 어떤 것은 이덕하님이 말씀하시는 '자연주의적 오류인 사실에서 도출한 도덕 공리' 인지,
본문에서 님께서는 이렇게 구분해서 주장을 하시고,
도킨스의 응보주의 비판을 '자연주의적 오류인 사실에서 도출한 도덕 공리' 라고 했기 때문에,
왜 그것은 본인은 상대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도킨스의 주장은 전자가 아닌 후자여야 하는지, 입증책임이 님에게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단지 나는 '근본적'으로는 도덕상대주의자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는 남의 도덕적 원리를 비판할 수 없다는 입장이라고 선언하는 것과 타인을 비판하는 것은 분명 다릅니다.
설령, 타인이 남의 도덕을 비판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해도, 도덕 상대주의자인 자신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므로, 타인의 그것을 비판한다면 자기모순적입니다.
결국, '근본적'으로는 상대주의자인 이덕하님의 전제 하에서는, 상대주의자가 구분한 '자연주의적 오류'라는 것은 무용지물이란 것이고, 그 전제하에서는, 누구든지 - 실제로 그가 상대주의자인지 여부와 무관하게 - 타인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롭게 '자연주의적 오류'가 아니라고 항변할 수 있게 되며, 상대주의자가 타인의 도덕관을 비판한다면 그것은 그것 자체로 자기모순적입니다.
정합성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건데요. 분명 도킨스의 글은 제시하신 사례처럼 내적 모순이 큰 글은 아닐 겁니다. 뭐 도킨스 나름의 대전제로서의 도덕 공리를 제시하지 않았기에 그것은 알 수 없다고 할 수도 있겠죠.
어쨌든, 제시된 그 글 자체만 놓고 형식 논리적으로 따졌을 때, 대전제를 명시적으로 제시하지 않았기에, 타당하지 못하다거나 님이 정의하시는 '자연주의적 오류' 라고 하시는 것은 저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형식적으로는 그렇지만, 제가 첫 댓글에서 보였듯이, 도킨스가 사실은 숨어있는 대전제가 있다고 하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도킨스 曰
" 이덕하님은 내가 단지 도덕 공리에 해당하는 대전제를 밝히지 않았기에, 사실에서 도덕 공리를 이끌어낸 '자연주의적 오류' 라는 겁니까? 사실 나는 우리 모두는 인간의 생명과 권리는 소중하다는 대전제를 암묵적 동의하에 가지고 있다고 믿기에 굳이 밝힐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라고 말하면 그뿐이라는 겁니다. 물론 이건 저의 추측입니다만, 현실적으로 이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덕하님이 지적하시는 정합성 문제는 해결되고,
도킨스 나름의 도덕 공리 대전제로부터 사실을 거쳐 도덕 정리를 이끌어 내게 됩니다.
이때 도킨스가 이덕하님처럼 도덕 상대주의자여야 한다고 그 누구도 강요할 권리는 없으므로,
비록 그가 tit for tat 형식의 도덕 원리(그것이 도덕 공리이든 도덕 정리이든 상대주의자인 이덕하님께서는 그것의 구분을 가지고 비판할 수는 없음)를 비판했다고 해서 부당한 논변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도덕 상대주의자인 이덕하님이, 도킨스에게 '자연주의적 오류' 라고 비판하거나 지적하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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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에 대한 믿음은 나 만이 아니라 너도 나처럼 이러저러하게 살아야 된다는 믿음의 한 종류입니다. 이 너는 아내. 동료, 이웃사람, 이웃 마을사람. 이웃 지역 사람, 이웃 나라 사람, 이웃 대륙 사람으로 확대됩니다. 니네는 니네의 도덕대로 살아. 니가 내가 나의 도덕적 믿음대로 살아갈 권리만 부정하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런 상관도 않할거야 - 이런 태도는 도덕적 믿음이라는 것이 인간 본성에 뿌리내린 일종의 보편화의 열정이라는 사실로 인해 실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물론 불가피하게 상관하지 못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내게 안전하게 거의 손해없이 상관할 충분한 물리적 힘만 있다면 상관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실제로도 상관해 왔습니다. 그 상관이 타자에 대한 억압이든 식민주의적 침탈이든 그 상관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도덕상대주의는 이런 인간의 본성을 무시하기도 하기에 글러먹은 생각입니다. 덕하님 자신도 대다수 사람들이 덕하님의 도덕적 믿음과 단순히 다를 뿐 아니라 전적으로 반대되는 도덕적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회에 내동댕이 쳐졌다면 하루하루가 힘들것이고 속이 부글부글 끓을 것이며 그 사회의 도덕적 믿음들이 하루빨리 바뀌기를 바랄 것입니다. 고립무원이라 힘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다면 말로라도 설득하려고 애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애씀을 그 낮선 문화에서의 덕하님의 삶이 의미를 갖게 되는 유일한 길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도덕은 내가 어떻게 살아야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불가분한 우리가 어떤 공통의 삶을 살아야 되느냐의 문제이고 지금과 같이 글로벌화된 세계에서 그 우리는 인류 전체입니다. 나 혼자서만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 도덕적 삶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저는 누군가 제 가까운 옆에서 저의 도덕적 믿음과 배치되는 종류의 믿음을 가지고 그 믿음대로 살아가는 인간들이 있고, 그 인간들이 말로는 설득이 안된다면, 그러나 다행히도 제게 그들을 물리적으로 설득할 방도를 가지고 있다면 그 물리력을 행사할 것이고 그 행사에서 생의 기쁨을 느낄 것입니다(예를 들어 제 옆집 남자가 사람을 무는 개는 그 자리에서 밟아 죽여도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 믿음을 실천하는 꼬라지를 보인다면 저는 우선 그 남자를 발로 몇번 걷어차 그 짓을 멈추게 할 것입니다. 그 순간에는 말로 설득하는 것이 의미가 없으니까, 즉 그 짓을 당장 멈추게 하는 것이 우선이니까요) 그 행사가 큰 탈 없이 몇 세대 동안 유지된다면 그 인간들의 도덕적 믿음은 더이상 강제된 것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식으로 힘쎈 이들의 도덕적 믿음이 힘 약한 이들의 도덕적 믿음을 억압하고 수정시켜 온 것이 세계사입니다. 이런 류의 세계사는 조금 더 계몽주의적인 방식으로, 조금 더 말을 통한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바뀔 수 있을 지는 모르나 (예를 들어 저는 개를 밟아댄 남자에게 사람을 문 개는 그 자리에서 밟아 죽여도 된다는 믿음이 어째서 도덕적 믿음이 아닌지를 조리있게 얘기해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도덕상대주의의 힘에 의해 그 전진 자체가 멈출 수는 없습니다. 덕하님은 머리로는 도덕상대주의자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현실적으로는 단 1년도 도덕상대주의자로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도덕 공리 체계를 받아들이느냐 여부는 자연주의적 오류를 논할 때 상관이 없습니다. 스스로 얼마나 일관된 도덕 철학 체계를 만드느냐가 중요하지 남들이 그 공리 체계를 받아들이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살인, 강간도 인간 진화의 어쩔 수 없는 결과물이라는 사실 명제는 살인, 강간은 올바르다는 명제로 이어지진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논리를 냉정하게 점검해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진화심리학이 힘을 얻으면 얻을 수록 어떤한 행위나 감정, 특히 그게 약자에게 불리한 것일수록
그 행위, 감정에 관대해지는 사회 분위기가 나올 것이라는 건 부인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이게 어떤 사람들이 진화심리학적 설명을 거북스럽게 여기는 가장 큰 이유일 겁니다.
이를 논리적인 설명으로 극복 가능하다고 보시는 분들이 계시겠으나 인간은 그렇게 합리적인 동물이 아닙니다.
아니 애매모호한 합리성 말고 그냥 지능으로 놓고 보면 그렇지요.
이 곳에서 계신 분들은 가끔 좀 지나치게 몰입하시던데
당장 길거리에 나가 진화심리학, 자연주의적 오류, 도덕주의적 오류를 아냐고 물어보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겁니다.
단순이 개념을 애매하게 나마 아는 사람도 찾기 어렵겠으니 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지 의문입니다.
인문학 잉여 블로거들이 전국민이 라깡, 들뢰즈를 아는 줄 아는 것과 비슷하군요.
아마 진화심리학은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미움을 받을 것이고 개인적으론 그게 꼭 나쁘다고도 보지 않습니다.
저처럼 인간의 합리적인 사고력 같은 것을 애초부터 안 믿는 사람으로선 더더욱 그리 보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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