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 심리학이 유전자 결정론(genetic determinism)이라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여기서 유전자 결정론은 무엇을 뜻하는가? 세 가지 정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순수한 유전자 결정론 또는 극단적 유전자 결정론에 따르면 유전자가 인간의 심리, 행동, 문화, 사회, 역사와 관련된 모든 것을 결정한다. 따라서 유전자만 연구하면 인간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

 

둘째, 과장된 유전자 결정론 또는 유전자 결정론적 편향이라는 의미로 쓸 수 있다. 이런 의미에 따르면 유전자 결정론자는 유전자의 역할을 과장한다.

 

셋째, 온건한 유전자 결정론에 따르면 유전자가 인간의 심리, 행동, 문화, 사회, 역사에 원인으로서 어떤 작용을 한다.

 

 

 

진화 심리학 비판자들이 세 번째 의미로 쓰지는 않는다. 이제는 유전자가 인간 발생(development, 발달)에서 어떤 역할을 한다는 점을 부정하는 과학자가 사실상 없다.

 

 

 

진화 심리학 비판자들이 첫 번째 의미로 쓰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꽤 있다. 그들에 따르면 진화 심리학자들은 경험, 사회, 환경, 문화, 역사의 영향을 완전히 무시하고 오직 유전자의 영향만 따진다. 모든 것을 유전자가 결정한다고 본다는 것이다. 만약 정말로 진화 심리학이 이런 의미의 유전자 결정론이라면 진화 심리학 공동체는 바보들의 집합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의미의 순수한 유전자 결정론이 말도 안 된다는 점은 명백하다. 한국인이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을 미국 사람은 human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한국인의 유전자에는 인간이 들어 있고, 미국 사람의 유전자에는 human이 들어 있단 말인가? 그래서 한국에서 태어난 갓난아기가 미국에서 영어를 쓰는 가정에서 자라도 human이라고 하지 않고 인간이라고 한단 말인가? 피아노 연주 능력도 유전자 속에 들어 있어서 피아노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원시 부족 사람들도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단 말인가? 양자 역학에 대한 지식도 유전자 속에 들어 있어서 20세기 사람들과 유전적으로 거의 다를 바 없는 19세기 사람들도 양자 역학에 대해 알고 있었단 말인가? 명예 살인(바람을 피웠다는 혐의가 있는 여자를 가문의 명예를 위해 죽이는 것)이나 여성 할례(성교를 하지 못하도록 하거나 성적 쾌감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여자의 생식기를 손상하는 것)가 정당하다는 믿음도 유전자 속에 들어 있어서 21세기 한국 사람들도 그것이 정당하다고 믿는단 말인가?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슬람교 유전자가 있고, 기독교를 믿는 사람에게는 기독교 유전자가 있단 말인가? 옛날에는 왕정이 옳다고 믿었다가 현대에는 민주정이 옳다고 믿는 이유는 왕정 유전자가 민주정 유전자로 교체되었기 때문인가?

 

진화 심리학자들 중에 이런 바보 같은 것을 믿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화 심리학자들이 순수한 유전자 결정론이라는 오류를 범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상대를 희화화해서 공격하는 허수아비 논법(straw man argument)의 전형이다. 정말로 진화 심리학자가 순수한 유전자 결정론을 믿을 만큼 바보라고 생각할 만큼 그들이 바보 같은 것일까? 아니면 대중을 속이기 위해 진화 심리학에 대해 뻔뻔스러운 거짓말을 퍼뜨리는 것일까?

 

일부 진화 심리학 비판자들이 바보도 아니고 사기꾼도 아니라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아마 그들은 유전자 결정론적 편향이라는 의미로 유전자 결정론이라는 용어를 썼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진화 심리학자들은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환경의 영향을 완전히 무시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일까? 이것이 과장된 표현 또는 수사적 표현에 불과하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학술 논쟁을 하다가 갑자기 시를 쓰고 싶어졌나?

 

진화 심리학 비판자들이여 제발 헷갈리게 하지 말라. 정말로 진화 심리학이 순수한 유전자 결정론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주 분명하게 그렇게 이야기하고, 진화 심리학이 유전자 결정론적 편향에 빠졌다고 생각한다면 아주 분명하게 그렇게 이야기하면 된다.

 

 

 

첫 번째 의미라면 진화 심리학 비판자들의 머리 속에 있는 상상의 세계가 아닌 진짜 세상에는 유전자 결정론자가 없다. 세 번째 의미라면 사실상 모든 사람들이 유전자 결정론자다. 진짜 의미 있는 논쟁이 되기 위해서는 두 번째 의미를 고려해야 한다. 즉 진화 심리학자들이 유전자의 역할을 과장하는 것인지 여부를 따져야 한다.

 

 

 

진화 심리학 비판자들이 진화 심리학자들에게 유전자 결정론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을 좋아한다면 진화 심리학자들은 진화 심리학 비판자들에게 백지론(tabula rasa, blank slate)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을 좋아한다.

 

이번에는 진화 심리학자의 표적이 되는 마르크스주의자, 여성주의자(feminist), 문화 인류학자, 기성 사회학자, 기성 역사학자 등이 허수아비 논법을 쓰지 말라고 응수할 만하다. 모든 것을 환경이 결정한다고 보는 순수한 백지론 또는 극단적 백지론을 옹호하는 사람은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환경의 영향을 과장하는 과장된 백지론 또는 백지론적 편향이라는 뜻으로 백지론이라는 용어를 써야 뭔가 의미 있는 논쟁으로 이어진다.

 

 

 

정리해 보자. 세상에는 모든 것이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바보도 없으며, 모든 것이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바보도 없다. 유전자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환경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은 모두가 인정한다.

 

또한 환경이 더 큰 영향을 끼치는지 아니면 유전자가 더 큰 영향을 끼치는지 비교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이것은 길이와 온도를 비교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하다. 30cm가 더 큰 값인가, 아니면 섭씨 40도가 더 큰 값인가? 척도가 다르기 때문에 이런 질문은 의미가 없다. 마찬가지로 유전자의 영향과 환경의 영향을 동시에 잴 수 있는 하나의 척도가 없기 때문에 둘 중 어느 쪽이 더 큰 영향을 발휘하는지 질문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한 쪽이 유전자 결정론적 편향을 범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쪽이 백지론적 편향을 범하는 것인지 여부를 따지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따져야 한다.

 

 

 

이덕하

2011-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