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로 쓰다가 글이 길어져서 별도로 포스팅합니다.


전반적으로는 님이 말씀하시는 취지에 동의합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는 하면서도 동의하지 않는 부분들이 있습니다만...

1.
"이곳 아크로에서도 동해보복의 황산보복판결에서 그것을 (심정적으로든 어쨋든) 옹호하고 보편적 진보나 인권문제에는 관심없고 오로지 영패척결만 부르짖는 아크로 논객들을 본 이후로 더욱 더 강조하고 있는 것이고요. "

"(심정적으로든 어쨌든}"이라는 표현을 쓰신 걸 보니 당연히 저도 여기에 해당되겠군요. 그때 저는 제가 만일 황산테러를 당한 여인의 오라비라면 심정적으로는 1/5, 1/10 정도의 황산보복 처벌에 동의할 수 있다고 했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그것이 이란의 환경에서는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고 죄를 뉘우치게 하는 하나의 방법일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심정적으로"라는 말까지 꺼내셨으니, 다음과 같은 가정을 해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님이 언급하신 모든 차별에 반대하고, 심지어 동물권까지 존중하는 비폭력주의자라서 육식도 하지 않는 어느 호남출신 아크로 논객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사람이 너무나 사랑하는 외동딸이 어떤 남자에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가혹한 폭력과 성폭행을 당하고 눈 뜨고는 차마 볼 수 없는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를 당했습니다. 덧붙여, 그는 이전에도 그와 같은 방법으로 50명의 여성을 성폭행하고 살해했습니다. 그 사람은 체포되었고 조금도 뉘우치지 않았으며 오히려 딸의 아비인 그 논객에게 능글능글한 비웃음을 보냈지만, 그는 법정 최고형인 10년을 언도받고 노르웨이처럼 근사한 시설에서 근사한 생활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지금 그 논객은 그 살인자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고 홧병에 죽을 것만 같은 상태이며, 그에게 가해진 법정 최고형과 감옥 생활이 너무 관대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살인자에게 최소한 사형이라도 언도되면 그나마 마음이 달래질 것 같다고 생각하여 사형을 주장했습니다. 

님의 진보정합성 기준에 따르면, 그는 "사이비 진보주의자"이며 "짝퉁 진보주의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물론 님은 그런 딸을 직접 키워보지 않으셨으니 충분히 공감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해보면 조금은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한번 자문해 보세요. 님은 그런 일을 당하고서도 "심정적으로까지" 법원의 판결에 완전히 승복할 자신이 있습니까? 심지어 가해자를 용서까지 하면서...?

황산테러 사건... 그때 제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피해자와 피해자의 가족에게 감정을 이입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약 그 사람의 입장이라면...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말로는 사형제 폐지를 왜 주장하지 못하겠습니까. 인권을 존중하는 사형제 폐지 주장.. 이거 얼마나 멋져 보입니까. 그런 거 말로는 백번, 천번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그럴 줄 몰라서 그런 게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님이 왜 피해자와 그 가족의 심정을 헤아려보려 하지 않는지 그게 의아했습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은 거고 하찮은 겁니까. 진보주의자들이 다들 판사처럼 사건을 대해야 하고 말해야 하는 겁니까. 그런 사건을 대하고 피해자의 고통에 감정을 이입하고 공감하여 분노한 상태에서도 판사 같은 말을 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 극도의 피해를 입은 사람의 심정조차 헤아리지 못하는 차가운 이성이 진보주의라면, 저는 그런 진보주의는 트럭으로 갖다줘도 안 합니다.


2.
"저는 만약 호남인들이 그렇게 고시 답안과 같은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차원에서의 진보를 나몰라라하면서 호남차별을 타파하고 영남패권을 척결하자고 하면 그런 호남인들을 절대, 조금도 지지할 생각이 없습니다."

또 예를 들어봅시다. 님이 언급하신, 영등포쪽방촌보다 더 좁은 방에서 여섯 식구가 함께 살아야 하는 가족의 가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고생하며 힘들게 산다는 점을 제외하면, 나머지 모든 면에서는 전혀 진보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가부장적인 사람이고 인권의식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그가 자신의 힘겨운 생활을 토로하며 차별을 호소할 때, 님은 그가 "고시 답안과 같은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차원에서의 진보를 나몰라라 하면서" 빈자에 대한 차별을 타파하자고 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을 "절대, 조금도 지지하지" 않으시렵니까? 그가 헌법도 모르고 무슨 인권교과서도 안 읽어보고 사형제 폐지도 반대하고, 여성차별에도 무관심하기 때문에 그를 절대, 조금도 지지하지 않으시렵니까? 

호남인들이 언제 진보주의자들로 대접해 달라고 했습니까? 그리고 님이 생각하는 기준의 진보주의자가 아니면, 자신이 속한 집단의 부당한 차별을 주장할 권리도 없고 정당성도 없는 것입니까? 호남인들은 님이 생각하는 '진보 정합성'에 들어맞을 때라야 비로소 호남 차별과 영패주의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기 전까지는 님은 그런 자들에게는 동정할 가치가 없다고 하면서 외면하실 겁니까?


3. 
"왜냐하면 그런 호남인들이 영패주의를 척결하고 나면 그 자신들이 패권주의자가 될 뿐이니까요." 

님, 이거 확실히 자신할 수 있습니까? 저도 때로는 꽤 근본적인 수준에서도 사고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알고 보면 사람은 다 비슷비슷하다고 보는 사람입니다만, 사회적인 수준에서 얘기할 수 있는 게 있고 개인의 도덕적/양심적인 수준에서 얘기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아마도 님이 바라는 것처럼 모두가 뼛속까지, "심정적으로"까지 인권을 존중하고, 아니 나아가 한마디로 인간을 정말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런 잣대로 사람을 판단하면 살아남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그만두고, 님은 살아남을 자신이 있습니까? 

영남이 패권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인구수가 많고, 권력과 부 등 사회 기득권을 소유하고 있고, 비영남출신 기득권층과도 결탁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호남이 인구가 많나요? 독자적인 패권을 잡을 수 있나요? 호남은 다른 지역이나 세력과 연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영남 일부와도 그러지 않으면 권력에 접근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호남이 패권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패권을 가질 수는 없지만 호남인들이 패권주의자들은 될 수 있다구요? 아무 힘도 없는 그런 패권주의자들이 사회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 무력한 패권주의자들의 마음까지 개조를 해야 할까요? 마음속까지, 혹은 도덕론을 언급하지는 맙시다. 그런 식으로 들어가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리고 해방 이후 호남이 누군가를 집단적으로 배척하거나 핍박하거나 차별한 적이 있습니까? 호남이 권력을 잡으려고 대구 사람들을 학살한 적이 있습니까? 호남사람들이 경제적인 부를 독과점하려 하고, 굉장한 욕심을 부리고, 오로지 호남 사람만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세세손손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까? 기껏해야 영남의 계속되는 패권을 저지하자는 정도의 주장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진성 진보주의자가 아니면 주장할 자격이 없겠군요.

아크로와 다른 사이트의 호남 논객들이 과격하다구요? 대개 피해자의 목소리는 과격하고 거칠고 감정적이며, 때로는 보복까지 얘기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가해자는 더 냉정하고 이성적일 수 있고 보복을 하지 않는 쪽을 선호하죠. 하지만 이런 호남인들과 호남 논객들은 극소수입니다. 최근의 여론조사를 보세요. 박근혜와 문재인의 일대일 가상대결시 광주에서 문재인 지지율이 80%였습니다. 김정길 지지자들도 아주 많습니다.


4. 
"오로지 호남차별해결이 최우선입니까?  모든 차별에 같이 대응하면 안됩니까?  호남이 차별 많이 받았습니까? 호남사람보다 더 차별 많이 받는 사람들 많습니다. 그래도 호남사람들을 밥은 굶지 않고 제때 먹잖습니까?  영등포쪽방촌보다 더 좁은 곳에서 여섯식구가 밥굶기를 밥먹듯이 하면서 집에 화장실도 없어서 신문종이에다 대변누고 종이에 싸서 휴지통에 버리는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참 이상하죠. 전에 이름없는 전사님이나 열불님이나 님과 거의 비슷한 말씀을 하셨던 걸로 기억되는데, 어떻게 그리도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호남만 차별받았나?"라는 말 말입니다. 좀더 확대해석하자면, 왜 너희들만 피해자인 것처럼 끊임없이 징징대냐는 말로 들리는 말 말입니다. 그렇게 많은 논쟁을 했는데도, 왜 영남분들은 (예외는 있지만) 하나같이 지금도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는지 참으로 이상할 따름입니다. 호남논객들이 호남사람들이 가장 많이 차별받고 있다고 말하던가요? 호남차별 해결이 최우선이라고 말하던가요?

전에 이런 문제로 토론할 때, 제가 영남분들이 호남인의 입장속으로 조금만 더 들어오면 이 끝없는 평행선 대신에 접점이 조금씩 찾아질 거라는 말을 했는데, 제가 느끼기로는 여전히 아웃사이더의 입장에서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 역시 호남논객들에게 느끼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님의 말 자체에는 공감하는 부분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5.
호남이 진보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추구하는 게 좋다는 말씀에는 이의가 없는데, 그게 백수광부님의 진보정합성이라는 기준과 결합되기 때문에 얘기합니다), 어느 분이 말씀하셨듯이 그건 또 하나의 짐일 뿐입니다. 지금까지 40년 동안 민주개혁 정당을 지지한 걸로 호남의 기여는 충분합니다. 더 이상 이래라 저래라 요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님 같은 말씀을 들으면 좀 감정적으로 대응하고 싶어집니다. 민주당이 집권 안해도 좋고, 영남이 세세손손 집권해도 좋으니 호남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요구일랑 그만 하시라고 말하고 싶다는 겁니다. 뭘 더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우리나라의 가장 큰 실제적인 진보는 (님이 중시하시는 인권신장, 여권신장 등을 포함해) 민주당의 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호남은 일관되게 민주당을 지지했습니다. 그 정도 했으면, 진보주의자라면 호남인들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고마워하는 대신에 님의 기준에 훨씬 못 미친다고 책망을 해요? 게다가 심지어 "사이비 진보" "짝퉁 진보"라서 "절대, 조금도" 지지할 생각이 없다고 하면서요? 

그런 식이라면 호남사람들이 님의 기준에 도달할 날은 언제가 될지 기약할 수가 없고, 아마도 불가능할 테고, 그때까지는 백프로 "사이비 진보, 짝퉁 진보"일 테니, 님이 지지하실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님이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줄 아십니까? 님은 지금.. 호남인들, 호남 논객들을 전부 "사이비 진보, 짝퉁 진보"로, 그래서 지지할 가치가 조금도 없는 인간들로 만들어버린 겁니다. 님은 대단하신 진보주의자가 되셨구요.

님이 오마담님 수준의 말씀을 하셨다면, 즉 호남논객들이 다른 차별에도 좀더 관심을 보여주면 좋겠다는 수준의 말씀을 하셨다면, 저는 님의 말에 백프로 공감하며 찬성했을 겁니다. 그런데 님은 한참 더 나아가셨습니다. 대단히 오만하고 독선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발언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보겠습니다. 진성 진보주의자이신 님은, 아마도 진보 정합성에 완벽히 들어맞으실 님은 영패주의와 호남차별 문제를 시정하기 위해 무슨 노력을 기울이셨습니까.


** 처음에는 짧게 쓸 생각이었는데, 쓰다 보니 길어지고 막판에는 점점 격앙이 되어서 꽤 거친 말들이 나왔군요. 평소 백수광부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진보에 대한 생각도 비슷했고, 이 글을 처음 보았을 때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하고 (일부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긴 했지만) 대체로 공감도 했는데, 쓰다 보니 점점 이런 글이 되어버렸군요. 제가 과도하게 반응했다는 생각입니다. 그래도 이왕 썼으니 몇 글자만 고치고 그냥 놓아두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