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년 제1회 광주 비엔날레 도록에 들어갔던 번역문입니다. 원문 화일은 구하지 못했고 대신


New Left Review I/225, September-October 1997


에 실렸던 개정판 화일을 첨부했습니다. 대학 전산망 외부에서도 액세스 되는 지는 모르겠는데, html 문서 링크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www.newleftreview.org/?view=1919


* 지젝 외에 다문화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유명한 좌파 식자로는 Wendy Brown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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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주의, 혹은, 다국적 자본주의의 문화논리 MULTICULTURALISM, OR, THE CULTURAL LOGIC OF MULTINATIONAL CAPITALISM

슬라보예 지젝 Slavoj Žižek


그의 <법철학 Philosophy of Right>에서, 헤겔 Hegel은 이차 동일시를 통한 개별화라는 특유한 근대적 역설을 상론한 바 있다. 처음에, 주체는 그가 태어난 곳의 특수한 생활-형식에 함몰되어 있다. 그가 원초적인 “유기적” 공동체로부터 벗어나는, 그것과의 유대를 끊고 자신을 “자율적인 개인”으로 평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의 근본적인 신의를 전환시키는 것, 별도의, 이차 공동체 속에서 그의 존재의 실체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 이차 공동체는 보편적이며 또한 동시에 “인위적”이다. 즉, 그것은 더 이상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매개된” 것, 독립적인 자유로운 주체들의 활동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다(국민 대 지역 공동체, 근대적 의미에서의 직업 대 도제와 장인 간의 “인신적” 관계, 아카데미 지식 공동체 대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오는전통적인 지혜, 부모의 조언보다는 양육 지침서에 더 의존하는 어머니에 이르기까지, 기타등등.).

헤겔의 논지는 일차 동일시에서 이차 동일시로의 이 전환이 필연적으로 일차 동일시의 상실을 수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일차 동일시는 일종의 성변화 聖變化를 겪어 보편적인 이차 동일시의 현상형태 구실을 하기 시작한다(말하자면 훌륭한 가족 성원이 됨으로써 나는 나의 국민국가가 적절하게 기능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 헤겔이 말하는 “추상적” 보편성과 “구체적” 보편성 간의 차이가 놓여 있다. 보편적 이차 동일시는 일차 동일시의 특수한 형식들과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한, 즉 그것이주체로 하여금 일차 동일시를 방기하도록 강제하는 한, “추상적”인 것에 머물게 된다. 그것은 일차 동일시를 통합하여 이차 동일시의 현상양식으로 변형시킬 때 “구체적”인 것이 된다. 추상적 보편성과 구체적 보편성 간의 이러한 긴장은 초기 교회의 위태스러운 지위에서 분명히 확인된다. 한편에는 진정한 기독교인적 태도를 기존의 지배적인 사회적 관계들의 공간과 결합시킬 방도를 찿지못한, 따라서 사회질서에 심각한 위협을 제기한 급진적인 광신 집단들이 있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사회생활에 참여하여 그 안에서 (종복으로서, 농부로서, 도제로서, 봉건영주로서...) 하나의 규정된장소를 점유하면서도 훌륭한 기독교인으로 남을 수 있도록 기독교를 기존의 지배구조와 화해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후자에서 규정된 사회적 역할을 완수하는 것은 기독교인이라는 것과 양립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기독교인이라는 것의 보편적 의무를 성취하기 위한 특정한 방도로 이해되기까지 했다.

근대에는 “구체적 보편성”의 지배적인 사회형태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 사람들의 개별적 정체성들의 매체로서의 국민국가이다. 나의 사회생활의 규정된 형식 (노동자, 교수, 정치가, 농민, 변호사 ... ) 은 나의 국민국가의 보편적 생활에 내가 참여하는 특정한 방식이다. 국민국가의 이데올로기적 통일성을 보증하는 성변화의 논리에 관한 한, 미합중국은 독특한 예외적 역할을 수행한다. 표준적인 “미국 이데올로기”의 핵심적 요소는 특정한 종족적 뿌리에 대한 충실을 “미국인이라는 것”의 표현으로 성변화시키려는 노력에 있다. 훌륭한 미국인이 되기 위해서 자신의 종족적 뿌리를 방기할 필요는 없다. 이탈리아인들, 독일인들, 흑인들, 유태인들, 그리스인들, 한국인들 그들"모두가 미국인”이다. 즉, 그들의 종족적 정체성의 바로 그 특수성, 그들이 “그것에고착되어” 있는 방식이 그들을 미국인으로 만든다...  나의 특수한 종족적 정체성과 한 국민국가의 성원으로서의 나의 보편적 정체성 간의 긴장을 초월하는 이러한 성변화는 오늘날 위협받고 있다. 미국 국민국가의 보편적 틀과의 열정적인 애국적 동일시가 지니는 긍정적 함의는 심각하게 잠식된 것 같다. “미국성”, “미국인이라는” 사실은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기획(“미국의 꿈”)의 일부라는 숭고한 효과를 점점 덜 산출하며, 따라서 미국은 점점 더 다수의 종족적, 종교적 내지는 생활 스타일적 공동체들의 공존을 위한 단순한 형식적 틀로서 경험된다.

"미국의 꿈”의 이 점진적 붕괴 (또는, 오히려, 실체성 상실)는(은) 헤겔이 기술한 일차 동일시에서 이차 동일시로의 이행의 뜻하지 않은 반전의 증거가 된다. 우리의 “포스트모던한” 사회들에서 이차 동일시라는 “추상적” 제도는 점점 더 실질적인 구속력을 갖고 있지 못한, 하나의 외적이며 순전히 형식적인 틀로서 경험되며, 그리하여 사람들은 점점 더 “원초적인”, 대개 보다 소규모의 (종족적, 종교적) 동일시 형식들의 지지를 추구하고 있다. (게이 공동체의 경우처럼) 이들 동일시 형식들이 국민적 정체성보다 더 “인위적” 일 때 조차도, 그것들은, 해당 개인을 그의 고유한 “생활방식”면에서 더 직접적이고 압도적으로 장악한다는 의미에서, 더 “무매개적”이며, 따라서 국민국가의 시민이라는 자격으로 그가 지니는 추상적 자유를 억제한다. 그렇게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것은 근대 초기의 국민국가의 구성과 정반대되는 과정이다. “종족적인 것의 국민화”, 종족적인 것의 국민적인 것으로의 “지양sublation (Aufhebung)”, 탈종족화 대신, 이제 우리는 “국민적인 것의 종족화”, "종족적 뿌리"의 갱신된 탐색 (혹은 재구성)을 다루고 있다.



이 과정의 추동력은, 물론,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출현이다. 우리 전지구적 자본주의의시대에 자본의 세계는 국민국가의 형태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아마도, 이 관계는 “자동[기] 식민화 auto-colonization로 가장 잘 지칭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의 직접적인 다국적 기능과 함께, 우리는 더 이상 거대도시와 식민화된 농촌 간의 표준적인 대립을 의제로 삼고 있지 않다. 말하자면, 전지구적 기업은 모국과의 태생적 연결을 끊고 자신의 출신지를 단순히 식민화되어야 할 또 하나의 영토로 취급한다. 프랑스의 르 팽 le Pen에서 미국의 부캐넌 Buchanan에 이르기까지 애국 지향적인 우익 민중주의자들을 그토록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새로운 다국적인들이 프랑스나 미국의 고향사람들에게 대하는 태도가 멕시코, 브라질, 혹은 타이완인들을 대하는 태도와 정확히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이 자기 지시적인 전향에 어떤 시 詩적인 정의 正義가 숨어있는것은 아닐까? 오늘날의 전지구적 자본주의는, 따라서 일종의 헤겔식의 "부정의 부정”,일국 자본주의와 그 국제주의적/식민주의적 단계가 지난 후의 발전의 세 번째 단계이다. 처음에 (물론, 이상적으로) 자본주의는 국제무역 (주권적 국민국가들간의 무역) 을 수행하며 국민국가의 경계 내에 존재했다. 이어 식민화한 나라가 식민화된 나라를 복속시키고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착취하는 식민주의가 출현했다. 이과정의 최종 계기는 식민화하는 나라들은 없고 식민화된 나라들만이 있다는 식민화의 역설이다. 식민 권력은 더 이상 국민국가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전지구적 기업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우리 모두는 바나나 공화국 셔츠를 입게 될 뿐만 아니라, 또한 바나나 공화국들에서 살게 될 것이다.



이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의 이상적 형태는 다문화주의이다. 이 태도는 일종의 비어있는 전지구적 입장에서 각각의 국지 문화를 식민인들이 식민화된 이들을 그 풍습이 조심스럽게 연구되고 존중되어야 할 “원주민들”로서 취급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취급한다. 즉, 전통적인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와 전지구적 자본주의적 자기-식민화 간의 관계는 서구의 문화 제국주의와 다문화주의 간의 관계와 정확히 동일하다.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식민화하는 국민국가라는 거대 중심 없는 식민화라는 역설을 수반한다면, 다문화주의는 자신의 특수한 문화에 뿌리를 두지 않은 채 국지 문화를 존중하고/또는 유럽 중심주의적 거리두기를 장려하는 것을 수반한다. 달리 말하면, 다문화주의는 인종주의의 부인된, 전도된, 자기-지시적 형태, “거리를 둔 인종주의”이다. 그것은 타자를 자기 완결적인 “진정한” 공동체로 이해하면서 타자의 정체성을 “존중”한다. 그 공동체에 대해 다문화주의자는 그의 특권적인 보편적 입장에 의해 가능해 진 거리를 유지한다. 다문화주의는 자신의 입장에서 모든 실질적 내용을 비워둔 인종주의이다(다문화주의자는 직설적인 인종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그 자신의 문화의 특수한 가치를 타자와 대립시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입장을 보편성의 특권적인 공백 지점으로 유지한다. 이 지점에서 그는 다른 특수한 문화들을 평가(하고평가절하) 할 수 있다. 타자의 고유성에 대한 다문화주의자의 존중은 바로 그 자신의 우월성을 역설하는 형식이다.



다문화주의자의 중립성은 그의 입장이 암묵적으로 유럽중심주의적 내용을 특권화하기 때문에 허위적인 것이라는 오히려 명백한 논박은 어떤가? 주장 자체는 옳지만 이유는 틀렸다. 항상 보편주의적인 다문화주의적 입장을 지지하는 특수한 문화적 배경 내지는뿌리는 그것의 “진실”, 보편성이라는 가면 속의 숨겨진 이면 (“다문화주의적 보편주의는 사실 유럽 중심주의적이다 ...) 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것이다. 즉, 특수한 뿌리들이라는 오점은 주체가 이미 철저하게 “뿌리뽑혀져” 있다는, 그의 진정한 입장은 보편성의 텅 빔이라는 사실을 은폐하는 환영적 스크린이다. 여기서 단순한 살인 기술에 관한 드 퀸시 de Quincey의 위트에 대한 내 자신의 바꿔 말하기를 떠올려 보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순진무구한 집단 난교에서 시작해서 중국 식당에서 식사를 같이 하는 것으로 끝맺음 했던가!1) 이 바꿔 말하기의 요점은 표면적인 구실과 이면의 소망 간의 표준적 관계를 전도시키는 것이다. 때때로 가장 어려운 것은 외양을 표면상의 가치 그대로 승인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수의 환영적인 시나리오들을 상상해내며 그것을 “심층적인 의미들”로 덮쒸우곤 한다. 중국 식사를 같이 하는 것을 거절하는 배후에서 식별될 수 있는 나의 “진정한 욕망”은 집단 난교의 환상에 대한 나의 매혹이라는 것은 그럴법 하지만, 요점은 나의 욕망을 구조화하는 이 환상은 그 자체로 이미 어찌할 도리 없이 솟구치는 나의 “오럴” 충동에 대한 일종의 방어기제라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발견하는 것은 연인과 레스토랑에 있는 한 남자에 대한 다리안 리더 Darian Leader의 절묘한 예와 정확히 동일하다. 그 남자는 웨이터에게 테이블을 요구할 때, “이인용 테이블을 주시요”대신 “이인용 침실을 주시요”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쉽게 표준적인 프로이드적 설명에 의탁하게 된다(“물론 그의 마음은 이미식사 후로 계획해 두었던 섹스의 밤에 가 있었다!”). 잠재의식상의 성적 환상은 오히려 그에게 섹스보다도 더 절실한 “오럴” 충동에 대한 방어기제 구실을 하는 스크린이다.2) 1948년의 프랑스 혁명에 대한 분석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The Class-Struggle in France>)에서, 마르크스 Marx는 그러한 이중적 기만의 유사한 예를 제공한다. 혁명 후 권력을 장악한 질서당은 공식적으로 공화국을 지지했지만 은밀히는왕정복고를 지향했다. 그들은 공화주의적 의례들을 조롱하고 “자신들의 심정이 어느 편에 가있는 지”를 어떤 방식으로든 알리기 위해 모든 기회를 이용했다. 그러나 역설은 그들의 활동의 진실은 그들이 사적으로 조롱하고 가장한 외적 형식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 공화국적인 형식은 그 이면에 왕당파적인 욕망이 웅크리고 있는 한갓된 흉내가 아니었다. 그들이 부르주아적 법과 질서의 실현이라는 실제의 역사적 소명을 완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오히려 왕당파에 대한 은밀한 충성이었다. 마르크스 자신은 질서당의 구성원들이 얼마나 자신들이 종종 행한 (의회에서의 논쟁에서 프랑스를 왕국이라고 부른다든가 하는 등등의) 반공화파적인 왕당파적 “말실수”에서 즐거움을느꼈는 지를 언급한다. 이 말실수는 그들의 환영적인 망상들을 드러내 주었던 바, 그 망상들은 그들로 하여금 표면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배후의 사회적 현실에 맹목이 되도록 했다.              



필요한 변경을 가하면, 이는 그것을 그의 성공의 비밀스러운 원천으로 간주하면서 아직 어떤 문화 전통을 고수하는 오늘날의 자본가 (다도를 준수하는 일본의 경영진, 기타등등.), 혹은 그 역의 경우로 일본의 성공의 특수한 비밀을 탐구하는 서구의 저널리스트에게도 해당된다. 특수한 문화적 정식에 대한 바로 이 참조는 자본의 보편적 익명성에 대한 스크린이다. 진실로 무서운 것은 전지구적 자본의 보편성 배후에 숨겨져 있는 저 특수한 내용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이 실상 맹목적으로 그 코스를 질주하는 익명의 전지구적 기계라는, 그것을 활성화시키는 어떤 특수한 비밀 요원도 없다는 사실에 있다. 무서운 것은 (죽은 보편적) 기계 속의 (특수한 살아있는) 유령이 아니라 개개의 (특수한 살아있는) 유령의 바로 그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죽은 보편적) 기계이다.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다문화주의”의 문제틀 (다양한 문화적 생활세계들의 혼성적 공존)은 따라서 그 대립물, 즉 보편적 세계체제로서의 자본주의의 거대한 현존의 현상형태이다. 그것은 오늘날의 세계가 전례없이 동질화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사회적 상상력의 지평이 더 이상 자본주의의 결정적 몰락이라는 관념을 품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 말하자면, 모든이가 자본주의가 계속 유지되리라고 믿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 비판을 위한 에너지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기본적 등질성은 건드리지 않은채 두고는 문화적 차이를 위한 투쟁에서 대안적인 배출구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우리가 소수 종족들, 게이들과 레즈비언들, 다양한 생활 스타일들 등등의 권리를 위해 “정치적으로 올바른” 전투를 수행하는 동안 자본주의는 승리의 행진을 계속한다.



엘리트주의적인 다문화주의적 자유주의의 허위성은 이미 관용적 보편주의의 첫 번째 거대 이데올로기적 기획, 즉 프리메이슨 운동을 특징지웠던 내용과 형식 간의 긴장에서 드러난다. 프리메이슨 독트린 (이성의 빛에 기초한 모든 자유인들의 보편적 형제애)은 명백히 그 표현 및 조직 형식 (입회식이 있는 비밀결사) 과 충돌한다. 즉, 그것의 긍정적 독트린의 허위성을 드러내 주는 것은 바로 프리메이슨 운동의 표현 및 분절 형식이다.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그 종족적 정체성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오늘날의 “정치적으로 올바른” 자유주의적 태도 (어떤 특수한 종족 공동체에도 닺내리고 있지 않은 “세계시민”)는, 그 자신의 사회 내에서, 협소한 종족적 한정 내에 머물러 있다고 다문화주의자에 의해 경멸당하는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과 대립하는 협소한 엘리트주의적 상층 중산계급 서클로 기능한다.               



그렇다면 다문화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러한 허위성을 자각한 좌익 진영은 그것에어떻게 반응할까? 그들의 반응은 헤겔이 무한 판단이라고 부른 것, 즉 두 개의 절대로양립할 수 없는 항목들의 사변적 동일성을 정립하는 판단의 형태를 띤다(헤겔의 잘 알려진 예는 그의 <정신 현상학 Phenomenology of Spirit>의 골상학에 관한 절에 있다: "정신은 뼈다”). 이 반응을 요약하는 무한 판단은 다음과 같다: “아도르노 Adorno (가장 정치한 ‘엘리트주의적’ 비판 이론가) 는 부캐넌 (미국의 최하급 우익 민중주의자)이다.” 즉, 포스트모던 다문화주의적 엘리트주의에 대한 이들 비판자들은 공동체, 지역 민주주의 그리고 적극적 시민정신의 재천명에 대한 그것의 관념들과 함께 신보수주의적 민중주의를 “도구적 이성”과 관료화와 우리의 생활세계의 도구화의 전 포괄적 지배에 대한 유일하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대응으로 용인하는 위험을 무릅쓴다.4) 물론 오늘날의 민중주의를 근대화 과정에 대한 복고 지향의 반동적 구성체로, 그리고 위험한 상황의 외적 원인, 즉 줄을 당겼으며 따라서 근대화의 재앙에 책임있는 배후 (유태인, 국제 자본, 비-애국적인 다문화주의적 경영자들, 국가 관료 ... )를 찿아헤매는 본래적으로 편집증적인 것으로 기각하는 것은 손쉽다. 중요한 것은 오히려 이 새로운 민중주의를 자본주의적 근대화에 심각한 장애가 되기는커녕 그것을 용이하게 하는 새로운 형태의 “허위적 투명성”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진정한 문제는 (가상 공동체들같은) 신기술에 기반한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이다. 새로운 기술들의 충격을 통한 공동체적 삶의 해체를 한탄하는 것보다 훨씬 흥미로운 것은 어떻게 기술 진보 자체가 점진적으로 자신을 “자연화”하는 새로운 공동체들을 산출하는 지를 분석하는 것이다.



따라서 좌익의 민중주의 옹호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의 민중주의가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위협이 되기는커녕 그것의 고유한 산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역설적으로, 오늘날의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은 오히려 근본주의적 민중주의와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를 다같이 거부하는 “좌익 비판 이론가들”이다. 그들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종족적 근본주의 간의 공모관계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들은 전지구적 시장 사회에도 속하지 않고 새로운 형태들의 종족적 근본주의에도 속하지 않는 제 삼의 영역, 즉 정치적인 것의 영역, 시민사회의, 책임 능력이 있는 적극적인 시민정신의 공적 공간 (인권을 위한 투쟁, 생태학, 기타등등.)을 추구한다. 그러나 문제는 정치적 공간의 바로 이 형식이 전지구화의 공격에 의해 점점 더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단순히 그것에 머물러 있거나 그것으로 돌아갈 수 없다. 



좌익은 전지구화의 과정에 대하여 세 가지 주요 대응책을 갖고 있지만, 그것들 모두 부적합해 보인다. 그것은 각각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 근본주의적 외양 근저에서 “도구적 이성”에 대한 저항을 식별해 냄으로써 민중주의를 포괄하려는 시도, 정치적인것의 공간을 열어 두려는 시도이다. 비록 마지막 접근법은 다문화주의와 근본주의 간의 공모관계에 대한 정확한 통찰에 근거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다음의 핵심적 의문을 회피한다: 다국적적 전지구화라는 오늘날의 조건에서 우리는 어떻게 정치적인 것의 공간을 재창출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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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lavoj Žižek, Enjoy Your Symptom ! (New York: Routledge, 1993), p.1을 보라.


2. Darian Leader, Why Women Write More Letters Than They Post? (London: Faber and Faber, 1996).


3. 우리의 새로운 기술 시대에서 무한 판단의 또하나의 예는 다음과 같다: “정신 (초월적 조명 transcendental illumination, 자각)은 캡슐 (소위 ‘각성’제)이다.”


4. Paul Piccone, "Postmodern Populism", in Telos 103 (Spring 1995)를 보라. 여기서 전형적인 것은 또한 공식적인 엘리트주의적 페미니즘에 가족 페미니즘을 대립시키는 엘리자베스 폭스-제노베스 Elizabeth Fox-Genovese의 시도이다. 가족 페미니즘은 평균적인 노동 여성들의 실제적 관심사에 초점을 맞추며 가족 내에서 아이들 및 일거리들과 함께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구체적 문제들을 취급한다. Elizabeth Fox-Genovese, Feminism Is Not the Story of My Life (New York: Doubleday,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