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테러사건때문에 우리사회에서도 다문화주의 논쟁이 한창입니다. 당장은 서구 극우주의자의 광신적 테러행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테러범의 정치적 목표가 '유럽과 노르웨이의 순수성을 오염시키는 다문화주의를 조장하는 노동당 타격'이므로 다문화주의에 대한 논의가 앞으로 더 많아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우리는 흔히 다문화주의를 "동남아 이주노동자와 함께 어울려 살자는 운동", "동남아 이주노동자의 삶의 방식, 문화를 존중하자는 운동"으로 이해합니다. 우리사회의 문화의 용광로 속에 타 문화를 녹여내는 것이 아니라, 각 문화의 차이를 인정하고 각자 서로 존중하자는 것이죠. 서구, 특히 유럽도 비슷합니다. 동남아 이주노동자가 이슬람 등 비기독교적 전통문화로 대체되겠지만요.

역사에 어떤 발전경로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보다 먼저 근대화됐다는 서구의 과거, 현재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현재, 미래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래서 "다문화주의 정책은 실패했다"라는 선언이 나온 현재의 서유럽을 보면, 이제 막 다문화주의를 선전하고 있는 우리의 앞으로의 모습이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기독교적 전통에 기반한 종교 근본주의적인 반다문화주의의 모습은 아니겠지만, 서구와 마찬가지로 인종주의에 기반해서 "우리 공동체를 훼손한다", "우리 일자리를 빼앗아간다", "사회를 불안하게 만든다" 등의 주장이, 점점 늘어나는 이주 노동자를 비롯한 한국국적 외국인 혹은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증가에 비례해서 증가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려고 하는 얘기는 현재 우리나라의 다문화주의 정책이나 그에 반대하는 극우주의자들에 대한 문제제기나 현재 유럽에서 논란이 되는 부분이 아니라 그냥 '다문화주의' 자체입니다. 이미 우리보다 10~20년 앞서서 다문화주의를 놓고 뜨거운 논쟁을 서구가 하기도 했고, 인종적 측면, 민족적 측면, 종교적 측면에 치우친 다문화주의에 대한 파편적 이해는 문제를 보는 시각을 좁힐 것 같기도 해서 그렇습니다. 별로 영양가 있는 얘기는 아닐 것 같네요.


다문화주의는 '정체성의 정치'와 관계가 깊습니다. 그리고 90년대 초반 미국에서 있었던 PC운동(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공정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 세가지는 사실상 하나의 운동이죠.

이것들은, 우리 사회는 단일한 성격을 띤 하나의 공동체가 아니라 각각의 특수한 구별되는 정체성을 가진 집단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전제합니다. 정치적 공정성 운동은 이런 관점에서 다문화주의를 주장하며 성, 인종에 대한 편견과 차별적 의미를 띠는 언어생활을 교정하는데에 신경을 썼죠. fireman를 firefighter로 쓰자는 식으로요. 그리고 정체성의 정치는 추상적 평균인을 설정한 근대 대의제 민주주의는 기득권을 지키는 수단에 불과한 허상이라고 공격하며, 추상적 평균인같은 것은 없고 특수한 정체성을 가진 정체성 집단의 투쟁과 권리획득에 주안점을 두었죠. 여성,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 이슬람, 동성애자, 장애인 등 기존 서구의 주류사회에서 소수자의 위치를 점하는, 그리고 앞으로 상당기간 주류가 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소수자들을 정체성 집단으로 보고 그들이 정치집단으로서 자신들의 특수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인정하고 또 그것이 더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사회제도, 정치제도, 민주주의 작동방식(대의제) 등 모든 측면에서 전면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정체성의 정치는, 구체적으로 일단 정체성 집단을 배제, 차별하는 현실적 언어사용을 개선하는 정치적 공정성 운동으로, 언어사용의 공정성 운동은 나이, 성적취향, 외모, 인종 등을 기준으로 한 모든 차별을 반대하는 사회운동으로 돌고 돌았습니다.

이러한 정체성 정치, 정치적 공정성 운동, 다문화주의에 대한 비판도 물론 있었습니다. 우파와 좌파 모두에게서 비판을 받았죠.

우파는 일단 저런 운동들이 너무 과격하다고 비판했죠. 조금만 저런 운동에 문제제기하면 바로 '인종차별주의자', '히틀러', '극우파', '성차별주의자'로 딱지를 붙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죠. 그리고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고 용해시켜서 미국 특유의 문화를 창조하는 용광로 미국을 거부하고 '용해'되지 않고 고유의 정체성을 지키겠다는 정체성 정치에 대해 거부감을 표했죠. 한마디로 "너가 왜 미국인이냐" 뭐 이런 식의. 좌파는 계급, 경제적 문제와 직접적 관계가 없는 정체성을 중시하는 정체성 정치가 좌파운동에 해가 되고, 체제 변화보다는 그 체제 속에서 정체성 집단의 특수이익의 추구는 자본주의체제의 혁파, 변화에 전혀 도움이 안된다고 비판했죠. 그리고 좌우파와 무관하게, 현재 '강남좌파' 논쟁과도 비슷하게, 사회문화적 문제에서만 진보성을 보이고 그럼으로서 진보가 가지는 상징자본을 취해간다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다문화주의, 정치적 공정성 운동의 대상인 정체성 집단을 가르는 기준으로는 인종, 성, 종교, 성적취향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역적 정체성도 아주 중요한 정체성 집단을 가르는 기준이 됩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명백하게 선거결과로 확인할 수 있는 지역적 투표성향을 보면 알 수 있죠.


이제 우리나라 이야기를 해보자면, 서구의 다문화주의, 정체성 정치논쟁을 이미 바라본 우리사회, 특히 진보좌파 지식인들은 다문화주의, 정체성 정치, 정치적 공정성 운동을 적극 수용했습니다. 하지만 서구의 이러한 운동들이 하나의 운동으로서 진행됐다면, 우리의 경우에는 파편적으로 수용되어서 각각 상황에 따라 맥락과 체계성을 결여한 채 유행했죠. 일단 계급에 기초한 전통적 좌파이념은 이미 낡은 생각이 되었기 때문에 전통좌파적인 관점에서 정체성 정치를 공격하는 경우도 서구의 사례보다 적었고, 정치적 공정성 운동의 경우에는 장애인, 여성에 대한 차별에 대한 '언어적' 시정을 딱히 거부할 명분이 없었기 때문에 장애인을 장애우로 부르는 것, 주민번호 첫째자리를 성별로 구분하는 것에 반대하는 운동 등이 별다른 반대도 없고 딱히 호응도 없는 상태에서 벌어졌습니다. 정체성 정치논쟁은 거대 보수양당의 독점적 정치체제에 대한 공격수단으로서 이념정당, 소수정당의 원내진입과 성장을 위해서 소선거구 다수대표제를 없애고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자는 식으로 벌어졌습니다. 장애인, 여성 등의 정체성 집단이 이념정당, 한국의 진보정당에서도 대변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도 있었고, 따라서 다수결에 의한 민주주의와 대의제를 넘어서 '항상' 소수일 수밖에 없는 정체성 집단의 특수 이익을 보장해줄 정치적 제도를 탐구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딱히 어떤 대안을 마련할 수 없었기에 그냥 탐구로 그치는 정도였죠.

다문화주의는 진보좌파는 물론 보수우파에서도 적극 수용했습니다. 다문화주의를 '이주 노동자 문제'로 좁게 이해한 탓에, 진보좌파는 이주 노동자의 인권, 시민권적 기본권의 문제에, 보수우파는 3D업종에 값싼 노동력을 제공해주는 산업도우미들에게 우리가 잘해줘야 한다는 식으로 접근했죠. 특히 보수우파의 경우, 우리 사회에 유입되는 이주 노동자가 당장 자신들의 이익을 해할 우려가 없고 오히려 돈버는데 도움이 되고, 살면서 서로 엮일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에 서구와 다르게 적극적이었죠.


이처럼 우리사회는 하나의 맥락에서 하나의 운동으로 이루어진 다문화주의, 정체성 정치, 정치적 공정성 운동을 그 체계를 결여한 채 시류에 따라 서구의 그것을 맥락없이 수용했고, 그 과정에서 그 운동의 한국적 변형도 일어나는 일도 많았죠. 다문화주의, 정치적 공정성 운동, 정체성 정치는 각각 별개의 것으로 취급되는 바람에 우리사회에서는 이것을 함께 놓고 논의하는 것이 어색하기도 합니다. 거기다가 정체성 정치의 경우는 다문화주의가 '이주 노동자'문제만 다루면서 한국적 변형을 충실하게 달성한 것과 달리, 철저하게 서구의 그것을 그대로 수입했죠. 그로 인해서 우리 사회에서 눈으로 검증가능한 명백한 수치까지 마련되어 있는 '지역적 정체성'은 철저하게 논의하지 않고, 여성과 장애인만 두고 논의하거나, 이념정당, 진보정당의 성장과 거대 보수야당의 독과점을 공격하며 계급, 노동자로 모든 정체성을 환원시켜서 오히려 지역적 정체성은 무시하고 그러한 정체성 집단의 존재도 허구, 혁파대상, 사회문제로 간주하는 주장을 하면서 동시에,  이주 노동자의 인권을 존중하자, 외국인의 문화와 그들의 공동체와 우리 공동체는 평등하다, 다른 문화끼리 서로 존중하자, 언어생활에서 편견이 담긴 표현을 바꾸자는 주장도 하는, 체계와 맥락을 완전히 결여된 생각을 펴는 진보좌파들이 득세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정체성 정치에 있어서 어떤 정체성 집단은 긍정하고 어떤 집단은 부정하면서, 정체성 정치에 맞지 않는 계급, 이념정당의 성장을 말하면서 정체성 정치와 상충되는 주장을 하고, 근현대 민주주의와 대의제를 고민하는 정체성 정치에 대한 고민 따위는 잊고 비례대표제를 통한 계급,이념정당의 성장을 외치며 거의 영원히 소수에 머물 수밖에 없는 정체성 집단(긍정하던 정체성 집단, 예를들어 여성, 장애인, 이들은 이념,계급정당에서도 소수일수밖에 없는데)에 대한 고민도 일단 접고, 그러면서 외국인 노동자라는 정체성 집단의 문제에는 한없이 긍정하는 뒤죽박죽의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진보적'으로 보이고 '리버럴'해 보이는 주장을 하며 서구의 그것을 가져다 맞추는 식의 주장과 논의가 주로 이루어지는 상황입니다.


서구의 이론, 서구에서 있었던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이 그대로 우리나라에 이식되지는 않기 때문에, 우리 나름대로 변형해서 다문화주의 등의 운동을 펼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정체성 정치와 무관하게, 인간 대 인간의 문제로, 이주 노동자의 기본적 인권을 지켜주자는 주장은 당연한 주장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이주 노동자를 정체성 집단으로 전제하고 그들 고유의 정체성, 문화를 존중하자, 즉 '한국사회 공동체'라는 용광로에 그들의 문화를 넣고 섞어서 우리 공동체가 수용하자는 주장과 배치되는 주장을 펼치겠다면, 적어도 그러한 주장을 체계적이고 맥락있게 해야하지 않을까, 그리고 미디어에서 쏟아져 나오는 다문화주의에 대한 기사를 읽을 때 적어도 어떤 체계와 맥락에서 다문화주의가 논의되는지는 이해하고 있어야 정말 제대로 된, 우리 사회에 도움되는 다문화주의 논쟁이 펼쳐질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