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진적 여성주의(radical feminism)의 강간 이론에 따르면 강간은 남자들로 이루어진 집단 또는 동맹이 여자들의 집단을 통제하기 위해 쓰는 무기다. 그리고 강간의 핵심 목적은 성교가 아니라 여자를 모욕하고 굴종시키는 것이다. 사람들이 때로는 동맹을 맺는다는 사실, 여자가 차별과 억압을 당한다는 사실 때문에 이 이론이 그럴 듯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꽤 있는 듯하다.

 

이런 한심한 이론을 굳이 시간을 내서 비판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 같다. 나 역시 어떤 면에서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 이론은 비판씩이나 하기에는 너무나 한심하다. 하지만 나는 지독한 계몽주의자이기 때문에 지독하게 한심한 것들도 비판한다. 만약 어떤 생각이 지극히 한심하더라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면 비판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내가 창조론이나 한의학까지 비판하는 이유다. 내가 보기에는 급진 여성주의의 강간 이론은 적어도 여성주의 진영 내에서는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를 강간하면 강간범인 남자는 이득을 얻고 강간 피해자인 여자를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급진적 여성주의와 진화 심리학은 어느 정도 일치한다. 양쪽 학파 모두 강간이 일종의 영합(zero sum) 게임이라서 누군가 손해를 보는 대가로 누군가 이득을 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득의 성격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급진적 여성주의에서는 강간을 통해 남자가 주로 여자를 예속화하는 이득을 본다고 생각한다. 반면 진화 심리학에서는 강간으로 남자가 주로 얻는 이득은 근접 기제(proximate mechanism)의 측면에서 보면 성욕과 관련된 만족이고 궁극 원인(ultimate cause)의 측면에서 보면 여자를 임신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강간으로 피해자인 여자가 손해를 보고 가해자인 남자가 이득을 본다는 점만 생각하면 남자들이 뜻을 모아 강간 체제를 만들었다는 가설이 그럴 듯해 보인다. 강간으로 가해자인 남자가 이득을 보니까 강간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모든 남자들에게 이득이 되지 않을까? 남자들이 이런 이득을 위해 서로 뜻과 힘을 합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실상은 어떤가? 오랑우탄의 경우에는 전체 성교에서 강간(강간 미수 포함)이 차지하는 비율이 매우 높다. 그에 비하면 인간의 경우 강간(강간 미수 포함)의 비율이 훨씬 낮다. 만약 모든 남자들이 진짜로 여자를 마음껏 강간하는 체제를 만들자라는 구호 아래 뜻을 모았다면 세상은 어떨까? 남자들은 강간은 나쁘지 않다는 이데올로기를 퍼뜨리려 할 것이며, 강간을 처벌하는 법을 없애려 할 것이며, 강간범에게 사적으로 복수하지 말자고 사람들을 설득하려 할 것이다. 남자들이 육체적인 힘도 사회적인 영향력도 여자들보다 세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남자들의 의도가 관철될 것이 뻔하다. 그런데 실제 인간 사회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여자들뿐 아니라 남자들도 강간은 부도덕한 행위라고 생각하며 강간을 공적으로 처벌하거나 사적으로 복수를 한다. 또한 전시 강간과 같은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면 강간이 그렇게 자주 발생하지 않는다. 인간 사회에서 남자들과 여자들이 늘 마주침에도 불구하고 평균적으로 남자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여자를 강간할 정도로 강간이 만연하는 문화권은 없는 것 같다.

 

 

 

남자들이 여자를 마음껏 강간하는 체제를 만들자라는 구호로 똘똘 뭉칠 수 없는 진화론적 이유가 있다. 강간에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해관계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이해관계도 관련되어 있다. 특히 피해자인 여자의 가족이 관련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그 중 일부에 대해서만, 그리고 남자 관련자들에 대해서만 살펴 보자.

 

강간 피해자인 여자에게 오빠 또는 남동생 또는 아버지 또는 남편이 있는 경우가 많다. 여자의 가까운 친족인 오빠, 남동생, 아버지는 강간 사건으로 상당한 손해를 본다. 왜냐하면 여자가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친족 선택 이론에 따르면 친족이 손해를 보면 대체로 자신도 손해를 본다. 특히 근친도(degree of relatedness)가 매우 높은 가까운 친족의 경우에는 그 손해가 상당히 크다.

 

여자의 남편은 보통 여자의 가까운 친족은 아니다. 하지만 남편도 막대한 손해를 본다. 왜냐하면 강간으로 여자가 임신을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내가 남의 유전적 자식을 임신하면 자신이 임신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여자의 자궁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게 해서 태어난 자식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쏟을 가능성도 있다.

 

 

 

강간 사건이 일어나면 여자는 고통에 시달린다. 대체로 동물은 자신의 번식에 손실이 생겼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을 때 고통을 느낀다. 강간이 피해자인 여자에게는 엄청난 번식 손실이기 때문에 여자가 강간을 당하면 고통을 느끼도록 진화한 것 같다.

 

강간을 당했다는 것이 친족이나 남편에게 알려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나? 오빠, 남동생, 아버지, 남편이 이번에도 어떤 남성 동지가 여자를 예속시키자는 대의를 위해 강간을 했군. 경사 났네, 경사 났어.라고 외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나한테 알려 주시기 바란다. 내가 알기로는 한결 같이 그들의 반응은 고통과 분노다. 분노는 보통 강간범을 향한다. 내 추측으로는 자신의 친족이나 아내가 강간을 당하면 자신이 번식 손해를 보기 때문에 남자가 그런 식으로 반응하도록 자연 선택에 의해 설계된 것 같다.

 

 

 

강간에 얽힌 이해관계는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매우 복잡하다. 강간 사건이 일어나면 어떤 남자는 이득을 보지만 다른 어떤 남자들은 손해를 본다. 강간 피해자의 친족과 남편이 보는 손해는 너무나 막대하기 때문에 설사 강간이 모종의 여성 예속화 효과를 발휘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남자가 얻는 이득을 압도한다. 이것이 여자를 마음껏 강간하는 체제를 만들자라는 식의 대의 아래에서 남자들이 뭉칠 수 없는 진화론적 이유다.

 

 

 

2011-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