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글은 번역은 제가 했지만 저작권은 저에게 없는 것이니 가능하면 다른 곳에 퍼가지 마시고 이 게시판에만

머물러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역 지적은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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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 the 1%, by the 1%, for the 1%

 

Americans have been watching protests against oppressive regimes that concentrate massive wealth in

the hands of an elite few. Yet in our own democracy, 1 percent of the people take nearly a quarter of the

nation’s income—an inequality even the wealthy will come to regret.

(By Joseph E. Stiglitz•Illustration by Stephen Doyle)

 

 

1%를 위해, 1%가 하는, 1%의


미국인들은 극소수의 엘리트의 수중에 막대한 부를 집중시키는 억압적 체제들에 맞서는 저항들을 목격해 왔다.

하지만 우리 자신의 민주주의에서, 국민의 1%가 국민소득의 거의 4분지 1을 가져가고 있다. 이것은 부유한

이들조차도 후회하게 될 불평등이다.

(필자 조지프 E. 스티글리츠 / 일러스트레이터 스티븐 도일)  

 

 

* 출처: <바니티 페어> 2011년 5월 
  
http://www.vanityfair.com/society/features/2011/05/top-one-percent-201105?currentPage=1  


 

* 조지프 E. 스티글리츠: 세계은행 부총재를 역임했고 2001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현재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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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s no use pretending that what has obviously happened has not in fact happened. The upper 1 percent of

Americans are now taking in nearly a quarter of the nation’s income every year. In terms of wealth rather

than income, the top 1 percent control 40 percent. Their lot in life has improved considerably. Twenty-five

years ago, the corresponding figures were 12 percent and 33 percent. One response might be to celebrate the

ingenuity and drive that brought good fortune to these people, and to contend that a rising tide lifts all boats.

That response would be misguided. While the top 1 percent have seen their incomes rise 18 percent over the

past decade, those in the middle have actually seen their incomes fall. For men with only high-school degrees,

the decline has been precipitous—12 percent in the last quarter-century alone. All the growth in recent decades

—and more—has gone to those at the top. In terms of income equality, America lags behind any country in the

old, ossified Europe that President George W. Bush used to deride. Among our closest counterparts are Russia

with its oligarchs and Iran. While many of the old centers of inequality in Latin America, such as Brazil, have

been striving in recent years, rather successfully, to improve the plight of the poor and reduce gaps in income,

America has allowed inequality to grow.

 

명백히 일어난 것을 사실은 일어나지 않은 체 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다. 미국인들의 상위 1%는 이제 매년

국민소득의 거의 4분지 1을 가져가고 있다. 소득이 아니라 부의 항에서 는, 상위 1%가 40%를 좌지우지한다.

그들의 실질적 몫 상당히 증대되었다. 25년 전, 각각의 수치들은 12%와 33%였다. 한 가지 반응은 이 사람들에게

행운을 가져다 준 재간과 추진력을 칭찬하고 차오르는 밀물이 모든 배들을 떠오르게 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 반응은 그릇된 것일지도 모른다. 상위 1%가 그들의 소득이 지난 10 년여 동안 18% 증대되는 것을 보는

동안 중위에 속하는 이들은 실제로는 그들의 소득이 감소하는 것을 보았다. 고등학교 졸업장만을 가진 이들에게,

하락은 절벽처럼 가팔랐다 - 지난 25년만 해도 12%가 감소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 그리고 그 이상의 세월 동안 –  

성장의 과실은 모두 꼭대기에 있는 이들에게 갔다. 소득 평등면에서 볼 때, 미국은 조지 W. 부시가 비방하곤 했던 낡은, 

경직된 유럽의 어느 나라에도 뒤쳐져 있다. 이런 면에서 우리와 가장 가까운 나라들 중에는 이란과 과두 지배 하에 있는 

러시아가 있다. 브라질 같은, 라틴 아메리카의 오래 전부터 심하게 불평등한 나라들 다수가 최근 다소간 성공적으로 빈자들의 

곤경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해왔고 소득격차를 감소시켜온 동안 미국은 불평등이 성장하는 것을 허용해 왔다.          

 

Economists long ago tried to justify the vast inequalities that seemed so troubling in the mid-19th century —

inequalities that are but a pale shadow of what we are seeing in America today. The justification they came up with

was called “marginal-productivity theory.” In a nutshell, this theory associated higher incomes with higher productivity

and a greater contribution to society. It is a theory that has always been cherished by the rich. Evidence for its validity,

however, remains thin. The corporate executives who helped bring on the recession of the past three years—whose

contribution to our society, and to their own companies, has been massively negative — went on to receive large

bonuses. In some cases, companies were so embarrassed about calling such rewards “performance bonuses” that they

felt compelled to change the name to “retention bonuses” (even if the only thing being retained was bad performance).

Those who have contributed great positive innovations to our society, from the pioneers of genetic understanding to the

pioneers of the Information Age, have received a pittance compared with those responsible for the financial innovations

that brought our global economy to the brink of ruin.

 

경제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19세기 중반 그토록 격심해 보였던 막대한 불평등들 - 우리가 오늘날 미국에서 보고 있는 것의

창백한 그림자일 뿐인 불평등들 - 을 정당화하는 것을 시도했었다. 그들이 찾아낸 정당화는 “한계생산성이론”이라 불렸다.

간단히 말하면, 이 이론은 더 높은 소득을 더 높은 생산성 및 사회에의 더 큰 기여에 연계시켰다. 그것은 부자들이 언제나

신봉해 온 이론이다. 그것의 타당성의 증거는, 그렇지만, 박약한 것으로 남아 있다. 지난 3년의 경기침체를 초래하는데

일조했던 법인기업 중역들 - 우리 사회에 대한, 그리고 그들 자신의 회사들에 대한 그들의 기여가 막대하게 부정적이었던

이들 - 은 계속해서 거액의 보너스들을 받았다. 몇몇 경우, 회사들은 그러한 보상들을 “성과 보너스”라고 부르는 것이

쑥쓰러웠던지 명칭을 “유지 보너스”라고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비록 유지되었던 유일한 것이 나쁜 성과였지만 말이다).

유전자 이해의 개척자들로부터 정보시대의 개척자들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에 막대한 긍정적 혁신들을 가져다주었던

이들은 우리의 전지구적 경제를 파산 직전까지 내몰았던 금융혁신들에 책임 있는 이들에 비하면 푼돈을 받았다.           

 

Some people look at income inequality and shrug their shoulders. So what if this person gains and that person

loses? What matters, they argue, is not how the pie is divided but the size of the pie. That argument is

fundamentally wrong. An economy in which most citizens are doing worse year after year — an economy like

America’s — is not likely to do well over the long haul. There are several reasons for this.

 

어떤 사람들은 소득불평등을 보고는 어깨를 으쓱한다. 이 사람이 벌고 저 사람이 잃으면 어떤가? 중요한 것은 파이가

어떻게 나누어지느냐가 아니라 파이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 지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 주장은 근본적으로 그릇되다.

대부분의 시민들이 매년 더 가난해지는 경제 - 미국 경제같은 경제 - 는 장기간 [성장세를] 유지할 수 있을것 같지 않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들이 있다.

 

First, growing inequality is the flip side of something else: shrinking opportunity. Whenever we diminish

equality of opportunity, it means that we are not using some of our most valuable assets—our people—in the

most productive way possible. Second, many of the distortions that lead to inequality—such as those associated

with monopoly power and preferential tax treatment for special interests—undermine the efficiency of the

economy. This new inequality goes on to create new distortions, undermining efficiency even further. To give just

one example, far too many of our most talented young people, seeing the astronomical rewards, have gone into

finance rather than into fields that would lead to a more productive and healthy economy.

 

첫째, 증대되는 불평등은 그 밖의 다른 것의 이면이다: 줄어드는 기회. 우리가 기회의 평등을 감소시킬 때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가장 귀중한 자산들 중 일부 - 우리의 국민들 - 를 가능한 가장 생산적인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불평등에 이른 왜곡들 중 다수 - 독점력과 이례적 이윤에 대한 세금우대에 연계되어 있는 것들 - 는

경제의 효율성을 잠식한다. 이 새로운 불평등은 더 나아가 효율성을 더욱 더 잠식하면서 새로운 왜곡들을 야기한다.

한 가지 예만 든다면, 우리의 가장 재능 있는 청년들 중 너무 많은 이들이 천문학적 보상을 기대하면서 더 생산적이고

건강한 경제에 이를 분야들보다는 금융에 몰리고 있다. 

 

Third, and perhaps most important, a modern economy requires “collective action”—it needs government to

invest in infrastructure, education, and technology. The United States and the world have benefited greatly from

government-sponsored research that led to the Internet, to advances in public health, and so on. But America

has long suffered from an under-investment in infrastructure (look at the condition of our highways and bridges,

our railroads and airports), in basic research, and in education at all levels. Further cutbacks in these areas lie

ahead.

 

셋째,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현대적 경제는 “집합적 행동”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 그것은 정부가 하부구조,

교육, 그리고 기술에 투자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미국과 세계는 인터넷에, 공중보건에서의 진보에, 그리고 기타 등등에

이른, 정부의 후원을 받은 연구로부터 막대한 이익을 얻은 바 있다. 그러나 미국은 오랫동안 하부구조에, 기본적 연구에,

그리고 모든 수준들에서의 교육에 과소투자를 행해 왔다(우리의 고속도로들과 교량들, 우리의 철도들과 공항들을 보라).

이 영역들에서의 더 나아간 예산삭감이 눈앞에 있다. 


   
None of this should come as a surprise—it is simply what happens when a society’s wealth distribution becomes

lopsided. The more divided a society becomes in terms of wealth, the more reluctant the wealthy become to

spend money on common needs. The rich don’t need to rely on government for parks or education or medical

care or personal security—they can buy all these things for themselves. In the process, they become more distant

from ordinary people, losing whatever empathy they may once have had. They also worry about strong government

— one that could use its powers to adjust the balance, take some of their wealth, and invest it for the common good.

The top 1 percent may complain about the kind of government we have in America, but in truth they like it just fine:

too gridlocked to re-distribute, too divided to do anything but lower taxes.

 

이것들 중 어느 것도 놀랍지 않다 - 그것은 한 사회의 부 분배가 한 쪽으로 기울어질 때 으레 일어나는 일이다. 한 사회가

부의 측면에서 더 분열될수록, 부유한 이들은 공통의 욕구들에 돈을 들이는 것을 더 꺼려하게 된다. 부자들은 공원이나

교육이나 의료나 인신안전을 위해 정부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 그들은 이 모든 것들을 그들 자신을 위해 구입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보통 사람들로부터 더 멀어진다. 그들이 한때 가졌을 수도 있는 일체의 공감능력을 상실하면서

말이다. 그들은 또한 강한 정부 - 균형을 조정하기 위해, 그들의 부 일부를 가져가기 위해, 그리고 공동선을 위해 그것을

투자하기 위해 권력을 사용할 수 있을 정부 -를 우려한다. 상위 1%는 우리가 미국에서 가진 종류의 정부에 불평하는 것

같지만 실상 그들은 현재 있는 그대로의 정부를 좋아한다: 재분배를 하기에는 진퇴유곡에 처해있고 감세 이외의 것을

하기에는 너무 분열되어 있는 정부.
 


Economists are not sure how to fully explain the growing inequality in America. The ordinary dynamics of supply and

demand have certainly played a role: laborsaving technologies have reduced the demand for many “good” middle-class,

blue-collar jobs. Globalization has created a worldwide marketplace, pitting expensive unskilled workers in America

against cheap unskilled workers overseas. Social changes have also played a role—for instance, the decline of unions,

which once represented a third of American workers and now represent about 12 percent.

 

경제학자들은 미국에서 증대되고 있는 불평등을 어떻게 온전히 설명할 지에 대해 확신하고 있지 못하다. 통상적인 수요와

공급의 다이나믹은 확실히 어느 정도 역할을 수행했다: 노동절약적 기술들은 많은 “좋은” 중간-계급, 블루칼라 직업들에

대한 수요를 감소시켰다. 미국의 값비싼 미숙력 노동자들을 해외의 값싼 미숙련 노동자들과 맞세우면서, 세계화는

범세계적인 시장을 창출했다. 사회적 변화들 또한 한 역할을 수행했다- 예를 들어, 노동조합들의 몰락. 그것들은 한 때 미국

노동자들의 3분지 1을 대변했지만 이제는 약 12%만을 대변한다.

 

But one big part of the reason we have so much inequality is that the top 1 percent want it that way. The most

obvious example involves tax policy. Lowering tax rates on capital gains, which is how the rich receive a large portion

of their income, has given the wealthiest Americans close to a free ride. Monopolies and near monopolies have always

been a source of economic power—from John D. Rockefeller at the beginning of the last century to Bill Gates at the

end. Lax enforcement of anti-trust laws, especially during Republican administrations, has been a godsend to the top 1

percent. Much of today’s inequality is due to manipulation of the financial system, enabled by changes in the rules that

have been bought and paid for by the financial industry itself—one of its best investments ever. The government lent

money to financial institutions at close to 0 percent interest and provided generous bailouts on favorable terms when all

else failed. Regulators turned a blind eye to a lack of transparency and to conflicts of interest.

 

그러나 우리가 그토록 심한 불평등을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상위 1%가 그 정도의 불평등을 원한다는 것이다.

가장 명백한 예는 세금정책을 포함한다. 자본이득에 대한 세율 하락은 가장 부유한 미국인들에게 무임승차권에 가까운

것을 제공했다. 독점들과 과점들은 언제나 경제적 권력의 한 원천이었다 - 지난 세기 초의 존 D. 록펠러에서 세기 말의 빌

게이츠에 이르기까지. 반(反)트러스트법들의 느슨한 시행은, 특히 공화당 행정부들 동안, 상위 1%에게 일종의 신의

선물이었다. 오늘날의 불평등의 대부분은 금융산업 자신에 의해 채택되고 감수되었던 규칙들에서의 변화들에 의해

가능해진, 금융체계의 조작 - 현재까지 금융산업의 최상의 투자들 중 하나 - 에 기인한다. 정부는 거의 0%의 이자율로

금융업체들에게 대출을 해주고 그 밖의 모든 것이 실패했을 때는 호의적 조건들로 후한 긴급원조들을 제공했다.

조정당국자들은 투명성의 결여와 이해갈등들을 못 본 체 해주었다.      

 

When you look at the sheer volume of wealth controlled by the top 1 percent in this country, it’s tempting to see

our growing inequality as a quintessentially American achievement—we started way behind the pack, but now we’re

doing inequality on a world-class level. And it looks as if we’ll be building on this achievement for years to come, because

what made it possible is self-reinforcing. Wealth begets power, which begets more wealth. During the savings-and-loan

scandal of the 1980s—a scandal whose dimensions, by today’s standards, seem almost quaint—the banker Charles Keating

was asked by a congressional committee whether the $1.5 million he had spread among a few key elected officials could

actually buy influence. “I certainly hope so,” he replied. The Supreme Court, in its recent Citizens United case, has

enshrined the right of corporations to buy government, by removing limitations on campaign spending. The personal

and the political are today in perfect alignment. Virtually all U.S. senators, and most of the representatives in the House,

are members of the top 1 percent when they arrive, are kept in office by money from the top 1 percent, and know that

if they serve the top 1 percent well they will be rewarded by the top 1 percent when they leave office. By and large,

the key executive-branch policymakers on trade and economic policy also come from the top 1 percent. When

pharmaceutical companies receive a trillion-dollar gift—through legislation prohibiting the government, the largest buyer

of drugs, from bargaining over price—it should not come as cause for wonder. It should not make jaws drop that a tax bill

cannot emerge from Congress unless big tax cuts are put in place for the wealthy. Given the power of the top 1 percent,

this is the way you would expect the system to work.

 

이 나라에서 상위 1%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부의 막대한 양을 보면 우리의 증대되고 있는 불평등을 본질적으로 미국적인

성격의 것으로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 우리는 평등한 이들의 한 덩어리를 지지하며 길을 출발했지만 이제 우리는 세계적

수준의 불평등을 행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계속해서 이 성취에 의지하게 될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은 자신을 강화시키는 성격의 것이기 때문이다. 부는 권력을 낳고, 그 권력은 더 많은 부를 낳는다. 1980년대의

저축 및 대부 스캔들 -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아도 그 규모가 거의 튀어 보이는 스캔들 - 동안 은행가 찰스 키팅은 한 의회

위원한테서 그가 몇 명의 선출직 공무원들에게 뿌린 150만불이 실제로 영향력을 구매할 수 있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나는 확실히 그렇기를 희망합니다”라고 답했다. 최고법원은 그것의 최근 시티즌 유나이티드 판례에서 선거비 지출 제한을

제거함으로써 법인기업들이 정부를 구매할 권리를 인정했다. 개인과 정치는 오늘날 완벽히 일치해 있다. 실질적으로 모든

미국 상원의원들, 그리고 하원의원들 대부분이 당선 당시 상위 1%의 성원들이고 상위 1%로부터 받은 돈으로 사무실을

유지하며 그들이 상위 1%에 열심히 봉사하면 그들이 의원을 그만둘 때 상위 1%에 의해 보상을 받으리라는 것을 안다.

대체로, 무역 및 경제정책의 주요 집행 부문 정책결정자들 또한 상위 1%의 성원들이다. 제약회사들이 - 약품들의 최대

구매자인 정부가 가격 흥정을 하는 것을 금지하는 입법을 통해 - 수 조 달러의 선물을 받을 때 그것에 놀라서는 안된다.

의회에 세금 법안이 상정될 때마다 부유한 이들을 위한 관대한 세금감면들이 시행된다는 것에 입을 떡 벌려서도 안된다.

상위 1%의 권력을 놓고 보면, 다른 방식으로는 체계가 작동할리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 역주:  ‘behind the pack’에서 'behind'는 ‘후원/지지’를 ‘pack'은 마라톤 경기 따위에서 선두 그룹도 아니고 맨 꼴찌

그룹도 아니고 그 외 대다수 선수들이 속해 있는 중간 무리를 의미한다.

 

America’s inequality distorts our society in every conceivable way. There is, for one thing, a well-documented lifestyle

effect—people outside the top 1 percent increasingly live beyond their means. Trickle-down economics may be a

chimera, but trickle-down behaviorism is very real. Inequality massively distorts our foreign policy. The top 1 percent

rarely serve in the military—the reality is that the “all-volunteer” army does not pay enough to attract their sons and

daughters, and patriotism goes only so far. Plus, the wealthiest class feels no pinch from higher taxes when the nation

goes to war: borrowed money will pay for all that. Foreign policy, by definition, is about the balancing of national

interests and national resources. With the top 1 percent in charge, and paying no price, the notion of balance and

restraint goes out the window. There is no limit to the adventures we can undertake; corporations and contractors

stand only to gain. The rules of economic globalization are likewise designed to benefit the rich: they encourage

competition among countries for business, which drives down taxes on corporations, weakens health and environmental

protections, and undermines what used to be viewed as the “core” labor rights, which include the right to collective

bargaining. Imagine what the world might look like if the rules were designed instead to encourage competition among

countries for workers. Governments would compete in providing economic security, low taxes on ordinary wage earners,

good education, and a clean environment—things workers care about. But the top 1 percent don’t need to care.

 

미국의 불평등은 우리의 사회를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왜곡한다. 그 하나는 잘 기록되어 있는 생활양식 효과이다

- 상위 1% 외부에 있는 사람들은 점차 [대출을 받아] 그들의 소득 이상의 삶을 산다. 통화침투설 경제학은 망상일지

모르지만 통화침투 행동주의는 생생한 현실이다. 불평등은 우리의 외교정책 [또한] 심하게 왜곡한다. 상위 1%는 거의

군복무를 행하지 않는다 - 현실은 “전면 지원” 병제가 그들의 아들 딸들을 끌만큼 충분히 지불하지 않으며 애국주의는 딱

그 만큼만 간다는 것이다.  더욱이, 가장 부유한 계급은 전쟁을 할 때 더 높아진 세금들로부터 아무런 압박도 느끼지 않는다:

빌린 돈이 그 모두를 지불해줄 것이다. 대외정책은 정의상 나라의 이익과 나라의 자원을 균형맞추는 것에 관한 것이다.

상위 1%가 좌지우지하고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을 때, 균형과 제한이라는 개념은 사라진다. 감행할 수 있는 모험에는

아무런 제한도 없다; 법인기업들과 계약자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이득만 취한다: 그들은 사업을 위해 나라들 사이의 경쟁을

조장한다. 그 경쟁은 법인기업들에 부과되는 세금들을 감소시키고 보건 및 환경보호들를 약화시키며 단체교섭을 포함해

“핵심”적 노동권들로 간주되었던 것들을 잠식한다. 규칙들이 대신 노동자들을 위해 나라들 사이의경쟁을 경쟁을 조장하도록

고안된다면 세계가 어떤 모습일지를 상상해보라. 정부들은 경제적 안정, 보통 임금소득자들에 대한 낮은 세금들, 좋은 교육,

그리고 깨끗한 환경- 노동자들이 신경쓰는 것들 - 을 제공하는 경쟁을 벌일 것이다. 그러나 상위 1%는 그런 것들에 신경쓸

필요가 없다.

 

Or, more accurately, they think they don’t. Of all the costs imposed on our society by the top 1 percent, perhaps

the greatest is this: the erosion of our sense of identity, in which fair play, equality of opportunity, and a sense of

community are so important. America has long prided itself on being a fair society, where everyone has an equal

chance of getting ahead, but the statistics suggest otherwise: the chances of a poor citizen, or even a middle-class citizen,

making it to the top in America are smaller than in many countries of Europe. The cards are stacked against them. It is

this sense of an unjust system without opportunity that has given rise to the conflagrations in the Middle East: rising food

prices and growing and persistent youth unemployment simply served as kindling. With youth unemployment in America at

around 20 percent (and in some locations, and among some socio-demographic groups, at twice that); with one out of six

Americans desiring a full-time job not able to get one; with one out of seven Americans on food stamps (and about the

same number suffering from “food insecurity”)—given all this, there is ample evidence that something has blocked the

vaunted “trickling down” from the top 1 percent to everyone else. All of this is having the predictable effect of creating

alienation—voter turnout among those in their 20s in the last election stood at 21 percent, comparable to the

unemployment rate.

 

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그들이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상위 1%에 의해 우리 사회에 부과되는 모든 비용들

중 가장 큰 것은 이것이다: 페어 플레이, 기회의 평등, 그리고 공동체 감각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우리의 정체의식의 부식.

미국은 오랫동안 모든 이들이 평등한 성공기회를 갖는 공정한 사회라는 점에 자긍심을 가져왔다. 그러나 통계는 그 반대를

시사한다: 빈곤한 시민은 물론이고 중간계급 시민조차도 유럽의 많은 나라들보다 상층으로 진입할 수 있는 기회들을 더 적게

갖고 있다. 그들은 불리한 처지에 놓여 있다. 중동에서 소요들을 발생시킨 것은 기회 없는 불공평한 체제에 대한 이러한

의식이다: 상승하는 식품가격들과 증대하는 지속적인 청년실업은 단순히 도화선으로 작용했을 뿐이다. 미국에서 청년실업은

약 20%에 달한다(몇 몇 지역들에서는, 그리고 몇몇 사회 및 인구 집단들 사이에서는 그 두 배에 달한다). 풀 타임 직업을

원하는 미국인 여섯 명 중 한 명꼴로 풀 타임 직장을 얻을 수 없다. 미국인 일곱 명 중 한 명꼴로 식권에 의존한다(그리고 거의

동일한 숫자의 사람들이 “식량부족”에 시달린다). 이 모든 것을 놓고 보면, 뽐내져 왔던 것, 즉 상위 1%로부터 그 밖의 모든

이들에게로의 "부의 점진적 이전"이 차단되어 왔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 이 모든 것은 소외의 야기라는 예측할 수 있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 지난 선거에서 20대의 투표율은 21%였는데, 이는 실업률과 비근한 수치이다.        

 

In recent weeks we have watched people taking to the streets by the millions to protest political, economic, and

social conditions in the oppressive societies they inhabit. Governments have been toppled in Egypt and Tunisia.

Protests have erupted in Libya, Yemen, and Bahrain. The ruling families elsewhere in the region look on nervously from

their air-conditioned penthouses—will they be next? They are right to worry. These are societies where a minuscule

fraction of the population—less than 1 percent—controls the lion’s share of the wealth; where wealth is a main

determinant of power; where entrenched corruption of one sort or another is a way of life; and where the wealthiest

often stand actively in the way of policies that would improve life for people in general.

 

지난 몇 주 동안 우리는 그들이 사는 억압적 사회들에서의 정치적, 경제적 및 사회적 조건들에 항의하기 위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가는 것을 목격했다. 이집트와 튀니지에서는 정부들이 무너졌다. 리비아, 예맨, 그리고 바레인에서도

저항이 발발했다. 그 지역 다른 곳의 통치족벌들은 그들의 호사스러운 펜트하우스에서 주눅들어 있는 듯이 보인다 - 다음은

그들 차례일까? 그들이 근심하는 것은 정상적이다. 그 사회들은 한 줌도 안되는 이들  - 인구의 1% 이하 - 이 부의 대부분을

좌우하는 사회들이다. 그 사회들에서 부는 권력의 주요 결정인자이다. 그 사회들에서는 이런 저런 종류의 관행화된 부패가

생활양식이다. 그리고 거기서 가장 부유한 이들은 종종 대다수 사람들의 삶을 개선할 정책들을 적극적으로 방해한다.

 

As we gaze out at the popular fervor in the streets, one question to ask ourselves is this: When will it come to

America? In important ways, our own country has become like one of these distant, troubled places.

 

거리에 가득한 그 민중적 열망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스스로에게 묻게 되는 물음은 다음과 같다: 미국에서는 언제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인가? 실질적으로, 우리 자신의 나라는 이 멀리 떨어져 있는, 걱정스러운 곳들 중 하나와 유사한 곳이

되었다.

 

Alexis de Tocqueville once described what he saw as a chief part of the peculiar genius of American society —

something he called “self-interest properly understood.” The last two words were the key. Everyone possesses

self-interest in a narrow sense: I want what’s good for me right now! Self-interest “properly understood” is different.

It means appreciating that paying attention to everyone else’s self-interest — in other words, the common welfare — is

in fact a precondition for one’s own ultimate well-being. Tocqueville was not suggesting that there was anything noble

or idealistic about this outlook — in fact, he was suggesting the opposite. It was a mark of American pragmatism. Those

canny Americans understood a basic fact: looking out for the other guy isn’t just good for the soul —i t’s good for

business.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언젠가 그가 미국 사회의 독특한 특질의 주요 부분으로 보았던 것을 기술했다 - 그가 “적절하게

이해된 자기관심”이라 불렀던 어떤 것. 처음 두 단어들이 결정적이었다. 모든 이들은 좁은 의미에서의 자기관심을

갖고 있다: 나는 바로 지금 내게 좋은 것을 원한다! “적절히 이해된” 자기관심은 다르다. 그것은 나 외의 모든 이들의

자기관심 - 달리 말하면, 공동복지 - 에 주목하는 것이 사실 내 자신의 궁극적 복지를 위한 하나의 선행조건임을  인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토크빌은 이 관점에 고귀하거나 이상주의적인  무엇인가가 있다고 시사하고 있지 않았다 - 사실, 그는

그 반대를 시사하고 있었다. 그것은 미국식 실용주의의 한 표지였다. 기민한 미국인들은 한 가지 기본적 사실을 이해했다:

다른 이를 신경쓰는 것은 영혼을 위해서만 좋은 것이 아니다 - 그것은 비즈니스를 위해서 좋다.    

 

The top 1 percent have the best houses, the best educations, the best doctors, and the best lifestyles, but there

is one thing that money doesn’t seem to have bought: an understanding that their fate is bound up with how the

other 99 percent live. Throughout history, this is something that the top 1 percent eventually do learn. Too late.

 

상위 1%는 최고의 주택, 최고의 교육, 최고의 의사들, 그리고 최고의 라이프 스타일을 향유한다. 그러나 그들의 화폐가

구매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한 가지가 있다: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다른 99%의 삶과 결부되어 있느냐 하는 이해. 역사

내내, 이것은 상위 1%가 결국 배우게 되었던 어떤 것이다. 너무 늦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