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비평>좋은 포퓰리즘은 어디에도 없다.

조선일보 7월 1일자에 송희영 논설주간의 <좋은 포퓰리즘과 나쁜 포퓰리즘>이라는 칼럼이 실렸다.

그는 그 칼럼에서 19세기 말 미국 사회에도 포퓰리즘이 극에 달했다고 적으면서 우리의 지금 복지 포퓰리즘과 비교하고 있다. 그러면서 미국의 포퓰리즘은 좋은 포퓰리즘, 우리의 포퓰리즘은 나쁜 포퓰리즘이라는 듯한 딱지를 붙이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구분하는 합리적인 기준을 하나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이런 방향으로 몰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정황적 서술만 한 두 군데 존재할 뿐이다.

그 중 하나다. 미국의 포퓰리즘이 좋은 포퓰리즘인 이유는 정치권이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아마도 나쁜 것을 극복하는 노력이 있었던 것이 그가 '좋은 포퓰리즘'이라고 말하는 원인인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원래 좋은 것이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그리고 미국의 당시 산업사회의 상황을 정보사회에 돌입한 지금 우리의 상황과 직접 비교하는 데도 무리가 있다.

이처럼 논리 구성에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는 이런 칼럼을 통해서 두 가지의 주장을 하고 있다.

그 첫째는 포퓰리즘은 원래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그 둘째는 진짜 포퓰리스트를 학수고대한다는 것인데 아마도 진짜 포퓰리스트가 그가 말하는 좋은 포퓰리스트의 개념인 것 같고 그 또한 근거는 없지만 그런 쪽으로 몰아가고자하는 의도를 보여주는 서술 하나가 제시되어 있다.

“재벌을 욕하면서 분할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서술한 것이 그것이다. 아마도 그것으로 우리 포퓰리즘을 나쁜 포퓰리즘으로 몰려고 하는 것 같다. 이를 역으로 보면 재벌의 분할을 요구해야 좋은 포퓰리스트로 보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앞의 서술에서 당시 미국의 포퓰리스트가 재벌분할을 요구했다는 서술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가 3류 논설가인지 아니면 악질적 선동가인지 구분이 가지 않지만 어쨌든 그의 글 마지막 초입에서 새로운 정치세력 형성을 촉구하는데, 그 뒤의 그의 결론을 보면 그 새로운 정치세력은 진짜 포퓰리스트 혹은 그의 제목에 따를 때, 좋은 포퓰리스트의 정당인 것으로 보이고 작금의 조선일보가 포퓰리즘적 선동에 앞장서는 경향에 힘 하나를 더 보태는 것 같다.

이에 우리 (가칭)녹색사회민주당 주비위는 조선일보 송희영에 그가 3류라면 충고를 그리고 그가 악의적이라면 경고를 하고자 한다.  42%가 부동층을 형성하는 나라에서 새로운 정치세력 형성을 바라는 요구는 옳다. 그러나 포퓰리즘에 좋은 것은 없다. 다만 포퓰리즘을 정책으로 수용할 수 있는 합리적 정치세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그 사회의 멸망과 성장을 담보할 뿐이다. 그런 관점에서 합리적 정치세력이 들어서면 송희영류는 언제든지 뒤로 좀 물러나 주시길 바란다.

2011.07.04. 녹색사민당 주비위 (www.weldom.or.kr)



-송희영 칼럼 원문-

저쪽 편에 재벌이 서 있다. 이쪽에는 노동자, 농민들이 웅성거린다. 저쪽에는 권력을 쥔 사람들이 가세하고, 이쪽에는 못 배우고 천대받은 민초(民草)들이 몰려든다. 서로 상대를 비방하고 성토하는 함성이 솟구치고 때로는 총알까지 튄다.

이런 19세기 말 미국 사회의 풍경은 요즘의 한국과 많은 것이 겹친다. 선진국으로 가 보겠다는 국가적 야심이 닮았고, 사회가 두 편으로 갈라져 충돌하는 장면도 비슷하다.

그 당시 인기있는 단어가 '포퓰리즘'이었다. 인민당(People's Party) 당원들은 '포퓰리스트(Populist)'로 통했고, 그 별명에 자부심을 가졌다. 한때는 주지사 10명, 상·하원 의원 45명을 배출하는 기세를 올렸다.

그런 미국과 비교해 한국에서 포퓰리즘을 '인기편승주의' '대중영합주의'로 딱지 붙이는 것은 편견이 심한 해석이다. 복지 구상이 나올라치면 주저 없이 '무책임한 포퓰리즘' '포퓰리즘식 나눠먹기'라고 비난하는 지식인이 적지 않다. 대중의 입맛에 맞추는 정치행위를 비판해야 머릿속에 역사와 철학이 가득 찬 인물이고, 그래야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지사(志士)가 된 듯 뻐긴다.

그러나 포퓰리즘은 본디 나쁜 말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에서 대중(大衆)의 뜻을 받들고 다수 의견을 존중하는 일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정책에 반영하려는 의지가 없는 정치인이 선거에 나와서는 안 되고 권력을 잡으려 해서도 안 된다. 민주국가에서는 포퓰리즘을 정치적 에너지 자원(資源)으로 생각해야 옳다.

더군다나 우리는 포퓰리즘이 왕성할 수밖에 없는 토양 위에서 살고 있다. 재벌은 갈수록 커지고 이자·배당 수입으로 수백억원씩 소득을 올리는 수퍼 부자들이 속속 탄생한다. 120년 전 미국에서도 석유재벌과 철도재벌이 부(富)를 독차지했고, 신흥부자들이 줄지어 등장했다.

저쪽 편에 풍요가 넘친다면 이쪽에는 곤궁한 무리들이 득실댄다. 비정규직 근로자가 828만명(노동사회연구소 추정), 소득보다 지출이 많은 적자(赤字)가구가 530만, 대출금 갚느라 허덕이는 '하우스 푸어'가 157만가구, 실질적인 청년실업자가 120만명, 신용카드 발급이 정지된 신용불량자가 100만명이다.

과거에는 은행거래가 끊겨 몰락하면 개인 책임으로 돌릴 수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았길래"라고 책망하며 혼자 힘으로 위험에서 탈출하라는 압박이 사회적으로 강했다. 하지만 그런 낙오자들이 이제는 수백만명 단위로 집단화하고 말았다. '우리들'과 '그들'을 가르는 경계선도 분명해졌다.

미국의 포퓰리스트들은 1888년 미시시피에서 처음 전국 모임을 가졌을 때부터 재벌을 욕하고 은행가를 매도했다. "엘리트 계층을 타도해야 한다"는 발언도 이어졌다. 재벌·은행·먹물들에 대한 반감이 극심한 오늘의 한국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미국의 지배층은 빈손을 내미는 패배자 집단을 "나라 장래를 걱정하지 않는다"고 깔보거나 "칭얼대지 말라"며 경멸하지 않았다. 자기들이 하면 친(親)서민이고, 저쪽이 하면 포퓰리즘이라는 논리도 펴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의 분노와 주장을 하나 둘 정치권이 흡수해갔다. 미국 포퓰리스트당(黨)은 18년 만에 몰락했다. 그들이 유태인과 가톨릭을 적대시하는 데까지 극단으로 흘러갔던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정치권이 불만계층의 분노를 정치에너지로 변환시키는 데 성공한 덕분이었다.

담배연기 자욱한 밀실에서 지명되던 상원의원을 유권자의 직접투표로 선출하고 민주당과 공화당이 전국을 돌며 대통령 후보를 공개경선(競選) 방식으로 뽑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그들 주장대로 철도 재벌·석유 재벌을 해체했고 기업 간 담합을 금지하는 법안도 만들었다. 복지를 실행하기 위해 미국역사상 처음 소득세와 상속세를 신설한 것도 포퓰리즘의 부산물(副産物)이었다.

미국이 포퓰리즘 대결을 계기로 국가운영의 틀을 개조했던 것에 비하면 한국의 포퓰리즘 다툼은 아무것도 아니다. 재벌을 때릴지언정 분할을 주장하는 정치인은 없고, 기존 정당을 다 뒤엎겠다고 나선 정치단체도 미미하다. 그저 무상(無償) 복지를 둘러싼 어정쩡한 포퓰리즘 논쟁만이 들끓고 있다.

이렇듯 어정쩡하기 때문에 반값 등록금 대책도 뒤끝이 개운치 않고, 수백만명씩 거대집단을 형성한 낙오자 세력들에 대한 처방도 나오지 않는 듯하다. 어쩌면 우리는 좋은 뜻의 포퓰리즘을 정치적 밑천 삼아 나라를 바꿔보겠다는 진짜 포퓰리스트를 학수고대하고 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