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파상의 단편소설 가운데 러시아 귀부인과 어떤 프랑스 청년의 비극적이고 플라토닉한 사랑을 다룬 작품이 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행복하지 못한 결혼생활을 하던 여인이 열차에서 정치 망명객이던 프랑스 청년을 만나고, 짧은 만남 이후 두 사람은 서로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며 서로 연모하며 속을 태우던 내용이었던 것 같다. 결국 이 여인이 병에 걸려 죽고, 프랑스 청년은 이 귀부인을 멀리서 지켜보다가 결국 여인이 죽은 후 미친 듯이 비탄에 잠겨 사라져가는, 그런 줄거리로 기억한다.

스토리보다도 더 뚜렷하게 기억나는 것은 이 단편소설의 화자(주인공들이 아닌, 제3의 목격자가 주인공들의 얘기를 또다른 사람에게 전해주는 구성으로, 유독 모파상 작품에 이런 형식이 많다)가 듣는 사람들에게 "러시아 여인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잘 아시죠?" 이렇게 물어보는 부분이다. 어렸을 때 이 작품을 읽으면서 "도대체 러시아 여자들이 얼마나 예쁘기에..." 이런 의문을 품었던 적이 있다. 그 소설을 읽을 때 내가 십대 소년이었으니 이런 종류의 환상에 약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아무튼 쏘련에 가면서 나도 모르게 그 작품의 기억을 떠올렸고, 모스크바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여인들의 용모를 유심히 지켜보곤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명불허전이랄까, 러시아 여인들의 미모는 특출한 데가 있었다.

무엇보다 러시아 여성들의 용모가 특이했던 것은 분명 서양인들인데도 그 윤곽이 무척 동양적이라는 점이었다. 머리카락, 피부, 눈동자, 신장 등은 분명 서양인인데, 그 얼굴 윤곽은 무척 갸름하고 계란형인 경우가 많았다. 헐리우드 영화나 그런 데서 보게 되는 미국이나 유럽의 미인들과는 뭔가 분위기가 달랐다. 유럽계 미인들은 어딘지 억세고, 거칠고, 남성적이고 야성적인 요소가 많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러시아 미인들을 보면서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체형 자체도 러시아 여성들이 훨씬 가늘고 섬세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미인들의 모습은 나이가 먹어가면서 일순간에 사라지고, 중년 여성들 즉 우리나라 식으로 표현하자면 아줌마들은 봐주기 민망할 정도로 망가진 얼굴과 몸매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냥 '통'이라는 표현이 이렇게 잘 들어맞는 체형이 또 있을까? 영국에서 위스키를 숙성시키는 그 둥근 통 안에서 그대로 굳혀서 뽑아낸 듯한 몸매였다. 이상하게도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그 미인들과, 30대를 넘어선 아줌마들 사이의 중간 형태는 없는 것 같았다.

보기 흉한 추녀가 왕자의 사랑에 힘입어 어느 한 순간 절세미녀로 변모하는 그 스토리의 뒤집힌 버전이랄까... 마치 러시아 미녀들이 하룻밤 사이에 동그란 윤곽의 아줌마로 변신하는 것 아닐까...? 이런 생각도 했다. 그 중간 형태가 없을 리가 없지만, 적어도 내 주관적인 인상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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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모스크바 지하철의 내부 모습. 화려하다는 소문이 사실이더군요. 지금은 우리나라 지하철도 많이 화려해졌지만, 당시에는 모스크바 지하철의 내부 장식과 비교할 수도 없었죠. 모스크바 지하철 내부는 약간 과장하자면 예술 작품을 연상시키는 수준이었습니다.


모스크바 길거리를 다니면서 여성들을 구경하는 것도 즐거웠지만, 통역 없이 혼자서 굼 백화점에 갔던 기억도 새롭다.

굼 백화점은 천장이 인상적이었다. 건축에서 뭐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는데, 우리나라 코엑스의 컨퍼런스센터 천장처럼 건물 한가운데를 모두 비워서 각 층이 그 공간을 공유하도록 하고, 천장은 유리로 덮은 모양이었다. 당시 코엑스가 그런 천장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분명치 않은데, 내가 코엑스 컨퍼런스센터에 처음 갔을 때 "모스크바 굼 백화점과 비슷한 형태구나..." 이렇게 느꼈던 것으로 유추해보면 아마 코엑스 컨퍼런스센터가 나중에 생겼던 것 같기는 하다.

백화점 안의 물건은 특별한 게 없었던 것 같은데, 기억에 남는 것은 점심 때가 되어 백화점 안 스낵코너 같은 곳에서 식사를 했던 일이다. 사실 쏘련에 도착한 뒤 디알로그 임직원들이나 통역이던 최노인 등이 공통적으로 쏟아내는 불만 가운데 하나가 '먹을 것'에 관한 것이었다. 내가 보기엔 특별하게 먹을 게 부족한 것 같지도 않았는데, 왜 그리들 불만인지 내가 직접 한번 음식을 사먹어서 실상을 확인하고픈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스낵코너는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일종의 미니 부페 같은 식당으로,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을 쭉 지나가면서 자신이 먹을 음식을 식판에 담은 뒤 제일 마지막 카운터에서 고른 음식만큼 계산하는 형태였다. 내가 그날 본 메뉴에는 빵, 버터, 생우유, 크림, 토마토, 베이컨, 소시지, 샐러드 등이 갖춰져 있었다. 나는 가격을 알아볼 겸해서, 대부분의 메뉴를 식판에 담았다. 혼자서 다 먹기 힘들 정도의 분량이었다.

나중에 계산대에서 나온 금액은 기억이 분명치는 않지만 원화로 환산했을 때 약 3천~4천원 수준이었던 것 같다. 내 기억에 당시 서울 시내 대중 음식점 식단의 평균 가격보다는 약간 싼 수준이었다. 아주 싼 금액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결코 비싸다고 할 수도 없는 금액이었다. 게다가 쏘련에서 제일 유명한 백화점의 음식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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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굼 백화점의 내부 모습입니다. 사진 상태가 좀 심하게 안 좋네요.



이 경험을 통역인 최노인에게 얘기했더니, 최노인은 "이것저것 있다지만 중요한 것은 고기 아닙니까? 고기 구경하기 힘듭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베이컨이나 이런 것은 고기가 아닙니까?" 이렇게 반문했더니 최노인은 또 "아, 미국 사람들이 잘 먹는 통조림 스팸 그런 게 없잖아요? 그런 걸 먹어야죠" 이렇게 반박해왔다.

아니, 베이컨이 통조림 스팸보다는 훨씬 좋은 음식일 텐데, 그따위 스팸 말 그대로 쓰레기 같은 식품을 못 먹어서 이리 불만이라니... 쏘련의 일반 시민들이 체제에 대해 느끼는 불만이란 게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겠지만 그 가운데 상당 부분은 오해에서 나온 것일 가능성이 커 보였다.

쏘련의 길거리에도 이런저런 노점상들이 많았다. 서울 같은 손수레 형태는 드물었던 것 같고, 대부분 그냥 조립식 테이블 같은 것을 길거리에 내다놓고 그 위에 물건들을 늘어놓거나 아니면 아예 그런 테이블조차 없이 그냥 길바닥에 보자기나 종이 등을 깔고 그 위에 기념품 등을 진열해놓는 경우였다.

내가 그 길거리에서 가장 많이 산 물건이 레닌 뱃지였다. 내 기억에 레닌 뱃지 외에 다른 정치 지도자의 뱃지는 거의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스탈린이나 마르크스 등은 보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이 더 있었는지 모르지만, 내가 얼굴을 모르니 알아봤을 리 없고... 하긴 마르크스나 스탈린의 뱃지도 없었으니 다른 정치적 이념적 지도자의 뱃지도 거의 없지 않았을까?

내가 레닌 뱃지를 많이 산 것은, 서울에 있는 내 후배들에게 주기 위한 것이었다. 사회주의 종주국의 건설자, 위대한 스승, 영원한 혁명가... 당시 우리에게 레닌은 그런 존재였다. 그리고 그런 레닌을 기념하는 뱃지는 당연히 대한민국에서 팔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레닌 뱃지는 후배들에게 무척 좋은 선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가격도 무척 쌌고 종류도 다양했다.

실제로 서울에 돌아와 나는 후배들에게 그 뱃지를 많이 뿌렸다. 적어도 30~40개는 나눠준 것 같다. 하지만 내게도 몇 개 남아있는 레닌 뱃지를 보니 몇 년 안에 모두 세라믹이 벗겨지는, 조악한 물건이었다. 그 뱃지를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는 후배는 아마 없을 것이다. 나에게도 역시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길거리 좌판에서 또 흔했던 물건이 바로 호박(琥珀)이었다. 사실 나는 그 전까지 호박이란 걸 구경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나름 보석 류에 속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모스크바 길거리 좌판에 숱하게 널려있는 그 호박들은 그다지 보석 같은 느낌을 주지 못했다. 오랫동안 땅속에 파묻혀 변형된 나무수액이라는 점을 빼면, 솔직히 말해 그냥 공장에서 생산해낸 싸구려 플라스틱 모조품보다 뭐가 나은지 실감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신기해서 호박 목걸이와 그냥 호박 덩어리째로 파는 것들을 꽤 많이 사왔는데, 역시 남은 것은 하나도 없다. 이 호박은 후배들도 대부분 사양하고 받아가지 않았다.

길거리를 다니다가 약간 특이한 구경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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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마녀와 권력의 결합을 연상시켰던 두 여인.


모스크바 시내에는 이런저런 공원이나 숲이 무척 많았다. 어느 날 그런 숲속을 지나다가 이상한 여성 두 사람을 발견했다.

한 여성은 약간 흐트러진 머리를 하고, 선홍색 원피스를 입고 하얀  색 숄을 두르고 있었고, 또 한 여성은 제복처럼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다.

선홍색 원피스를 입은 여인은 그 옷 색깔과 함께 머리 모양새 그리고 얼굴 표정 등이 한눈에도 뭔지 마녀 같은 분위기였다. 제복을 입은 여인은 양 손에 디귿자 모양으로 구부러진 철사를 들고 있었다. 무심코 지나던 내가 그들을 한동안 유심히 살펴보았던 것은 그 철사의 움직임 때문이었다. 제복을 입은 여인이 손이나 팔을 전혀 움직이는 것 같지 않은데(물론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지켜본 내가 그 내막을 자세히 알 수는 없었다), 철사가 좌우로 자유롭게 움직이고 그 속도가 너무 빠르게 느리게 자유자재로 변화했던 것이다. 그 정도 속도로 철사를 움직이고 더군다나 속도를 그렇게 바꾸려면 최소한 팔의 움직임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제복을 입은 여인의 몸과 팔은 거의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내가 그 광경을 보면서 일순간 생각한 것은 '저 붉은색 옷을 입은 여인이 뭔가 힘을 사용해서 제복을 입은 여인이 쥐고 있는 철사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황당한 얘기지만, 솔직히 말해 그 당시에는 이것만이 가장 합당한 해석처럼 느껴졌다. 오해일 수도 있지만 나는 당시 쏘련 군부 또는 정부가 저런 초능력을 연구 개발하고,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발굴해 훈련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내가 그런 훈련의 한 장면을 우연히 마주친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다. 어디선가 쏘련 정부가 오컬트나 초능력 쪽에 관심을 갖고 상당한 투자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