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에 대한 창조론자의 태도가 제각각이다. 따라서 창조론자와 논쟁할 때에는 그 사람이 진화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신이 개입한 정도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1. 진화가 눈곱만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입장

 

이 입장에 따르면 진화는 절대 불가능하다. 소진화(microevolution)조차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인위 선택으로 품종 개량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신이 그레이하운드, 닥스훈트, 달마티안, 도베르만, 치와와, 푸들 등을 일일이 다 창조했다. 잘 찾아보면 옛날옛적에 살았던 치와와 화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신은 흑인과 백인도 따로 창조했다.

 

이 입장은 가장 전투적인(?) 창조론이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전투적인 창조론자를 본 기억이 없다. 혹시 이토록 진화론을 싫어하는 창조론자를 안다면 알려주시기 바란다.

 

 

 

2. 소진화는 일어났다는 입장

 

이 입장에 따르면 인위 선택을 통한 품종 개량 정도는 가능하다. 하지만 대진화(macroevolution) 즉 새로운 종이 만들어지는 수준의 진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특히 인간의 조상을 아무리 거슬러올라가도 계속 인간이다. 물론 가장 최초의 인간은 신이 창조했다.

 

내가 보기에는 이 입장이 독실한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것 같다.

 

 

 

3. 대진화도 일어났지만 신이 개입했다는 입장

 

이 입장에 따르면 인간의 조상을 거슬러올라가다 보면 원숭이도 나오고, 물고기도 나온다. 결국 단세포 생물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눈이나 뇌와 같이 지극히 절묘한 기관은 자연 선택만으로는 만들어질 수 없다. 즉 물리 법칙의 작동만으로는 그런 절교한 기관이 진화할 수 없다. 신이 그런 절묘한 기관이 만들어지도록 진화에 참견을 했다.

 

지적 설계론자들 중 일부가 대충 이런 입장을 취하는 것 같다.

 

 

 

4. 생명의 탄생 이후에는 신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입장

 

이 입장에 따르면 일단 생명이 탄생한 이후에는 신이 모든 것을 물리 법칙의 작동에 맡겨 두었다. 자연 선택만으로도 인간의 눈이나 뇌와 같은 기관이 진화할 수 있다.

 

하지만 생명 자체는 신이 창조했다. 단세포 생물 또는 그보다 원시적인 어떤 형태의 생물을 신이 창조했다. 신은 이런 기적을 일으킨 이후에는 자연에 개입하지 않는다.

 

다윈이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하는 구절이 있다. 『종의 기원』 1판에는 없던 “by the Creator”라는 구절이 이후에 추가되었다.

 

1: There is grandeur in this view of life, with its several powers, having been originally breathed into a few forms or into one; and that, whilst this planet has gone cycling on according to the fixed law of gravity, from so simple a beginning endless forms most beautiful and most wonderful have been, and are being, evolved.

http://darwin-online.org.uk/content/frameset?itemID=F373&viewtype=text&pageseq=1

 

6: There is grandeur in this view of life, with its several powers, having been originally breathed by the Creator into a few forms or into one; and that, whilst this planet has gone cycling on according to the fixed law of gravity, from so simple a beginning endless forms most beautiful and most wonderful have been, and are being, evolved.

http://darwin-online.org.uk/content/frameset?itemID=F391&viewtype=text&pageseq=1

 

현대 생물학자들은 생명의 탄생도 물리 법칙이 작동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자연 선택으로 생명이 탄생했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5. 일관된 이신론

 

이 입장에 따르면 신이 기본적인 물리 법칙과 물질을 창조한 직후에, 즉 빅뱅 직후에 우주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신의 위대함은 어떤 식으로 물리 법칙과 물질을 창조하면 인간과 같은 생명체가 나타날 수 있는지 미리 알고 있었다는 점에 있다.

 

아인슈타인이 이와 비슷한 입장이었던 것 같다. 이런 입장이라면 현대 진화 생물학과 충돌할 일이 전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런 입장을 취하는 사람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자칭 이신론자는 꽤 있었지만 대부분은 결국 이런저런 식으로 “개입하는 신”을 상정하는 것 같다.

 

 

 

인간의 진화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도 있다.

 

A. 동물도 인간도 모두 신이 직접 창조했다는 입장

 

이것이 독실한 기독교인들 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입장으로 보인다.

 

 

 

B. 동물은 진화의 산물이지만 인간은 신이 직접 창조했다는 입장

 

 

 

C. 인간의 육체는 진화의 산물이지만 정신은 신이 직접 창조했다는 입장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인간의 몸이 그 이전에 존재했던 생명체에서 생겨났다 하더라도(If the human body take its origin from pre-existent living matter), 영혼은 하느님이 직접 창조하셨다. ...... 결과적으로, 영혼이 생명체의 힘에서 출현한다고 또는 생명체의 부수적 현상에 불과하다고 간주하는이것은 진화론을 부추기는 철학과 부합한다 - 진화론은 인간에 대한 진리와 양립하지 못한다. 또한 개인의 존엄을 뒷받침할 수도 없다.

(『빈 서판』, 332, page 186, 교황이 1996년에 했던 연설)

 

이런 입장이라면 진화 생물학에는 대체로 동의할 수 있지만 진화 심리학은 거부할 것이다.

 

자칭 진화론자 중에도 진화론을 인간의 마음에 적용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 꽤 있다. 나는 이런 사람이 진화론자인지 창조론자인지 좀 헷갈린다.

 

 

 

D. 인간의 정신도 진화의 산물이라는 입장

 

위에서 말한 <4. 생명의 탄생 이후에는 신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나 <5. 일관된 이신론>이라면 진화 심리학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자칭 창조론자가 진화 심리학을 무턱대고 거부하는 자칭 진화론자보다 진화론에 더 호의적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