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ro가 점점 위태위태해지는 느낌이 들어 오해를 무릅쓰고 글을 올려 봅니다.


건대생의 호남차별 발언과 그에 대응한 신상털기 문제로 몇 일 동안 계속 이 acro가 시끄러운 것 같습니다. 호남차별 발언(혹은 글)은 반인륜적인 문제이며, 법적 제재를 할 수단이 없음으로 사적 제재를 통해서도 응징이 필요하다는 분들의 생각에 저는 사실 아연실색했습니다.

먼저 저의 입장을 말씀드리면, 사적 제재의 인정(합리화)에도 동의하지 않지만, 그 제재 방법인 신상털기에는 더욱 더 반대합니다.

이름없는 전사님이나 열불님도 많이 말씀하셨지만, 사적 제재는 일단 법의 안정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과 결코 약자에게도 유리하지도 않으며, 그 성격상 재생산의 악순환의 폐해가 막심해 문명사회에서 용인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1. 사회의 도덕적 합의가 사적 제재의 정당성을 담보하는가

이 논쟁을 지켜 보면서 제가 가장 걱정스럽게 생각된 점은 사적 제재의 정당성을 확보하는데 있어 사회적 합의(법적 제재에 합의한 것이 아닌 도덕적 사회적 합의)를 내세운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사적 제재 필요성을 주장하는 분들이 내세운 것은 호남차별 발언은 반인륜적이라는 도덕적 사회 합의였습니다. 물론 저도 호남차별 발언(글)은 용인되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사회 도덕적 합의라는 것이 참 요상하고 추상적이라 그 시대의 구성원과 사회적 상황에 따라 사회적 합의가 달라지며, 어디까지 사적 제재를 용인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인가를 우리가 어떻게 결정할 수 있는지가 애매해진다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겠습니다. 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우리 사회는 반공주의를 대부분의 국민들이 수용하고 있었습니다. 일종의 사회적 합의라고 볼 수 있지요. 이런 상황에서 6.25전쟁에서 인민군에 부모를 잃은 형제가 있어, 간첩으로 의심되는 이웃을 사적으로 살해했다고 합시다. 이런 행위를 용납해야 할까요?

님들은 이번 건대생의 신상털기와는 상황이 다르지 않느냐고 할 것입니다. 간첩죄는 당시의 국가보안법이나 형법으로 제재할 수단이 있음에도 형제들이 사적으로 보복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건대생의 호남차별 발언은 현재 법적 제재 수단이 없으니 신상털기라는 사적 제재가 동원된 것이라고 하시겠죠. 그런데 호남차별 발언(글)이 과연 법적 제재 수단이 전혀 없는 것일까요? 사이버 수사대에 신고할 수 있으며, 해당 사이트 운영자에게 글의 삭제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 님들은 이것으로 부족하니까 사적 제재가 필요하다고 또 항변하시겠죠.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미흡(부족)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각 개인이 그 사안에 대해 느끼는 심각성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님들은 당연히 미흡하다고 생각하지만 저 정도는 사이버 수사대에 신고해서 해결할 정도면 된다고 판단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재의 대상이 된 발언이 잘못된 것에는 모두 동의하지만 그것을 제재할 수준에 대해서는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 사적 제재를 사회가 용인해야 할까요?

6.25 때 인민군에 부모를 잃은 형제는 개인적으로 사소한 이적행위도 사형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국가보안법과 형법은 금고형 수준에 머물러 제대로 법적 제재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사적으로 이웃을 살해했다고 한다면 님들은 이 형제들에게 손을 들어 주실런지요?

2. 사회적 합의를 동원한 사적 제재의 부작용

문제는 또 있습니다. 도덕적 문제에 있어 사회적 합의라는 것이 앞에서도 제가 요상하다고 말씀드렸지만, 이것이 조작되거나 강자(기득권과 집권자, 기성 언론)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름없는 전사님께서 악용의 가능성, 쿠데타의 정당성 부여 우려까지 잘 설명을 해 주셨어 더 이상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3. 도덕적 문제에 동의했다고 사적 제재와 수준에 동의한 것은 아니다.

님들이 오판하는 것은 또 있습니다. 님들은 님들 임의대로 타인의 행위에 대해 제재 수준을 결정해 버립니다. 호남차별 발언에 신상털기가 그에 상응하는 제재 수준인지에 대해서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성문법 국가이며, 죄형법정주의를 채택합니다. 범죄에 대한 처벌과 형량은 법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죠. 이것은 우리가 합의해서 만든 법률로 결정되어야 하며, 개인이 임의로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4. 신상털기는 연좌제 성격이 있으며 인권 침해 요소가 강하다

신상털기가 호남차별 발언에 상응하는 처벌(제재) 수준인지도 문제지만, 신상털기는 그 개인의 문제를 넘어 가족, 그가 속한 조직, 사회에도 제재를 하게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범죄의 처벌은 그 범죄를 범한 개인에게 국한되어야 합니다. 그 가족들과 그 주변 사람들에게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신상털기는 이 원칙을 훼손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범죄 용의자의 얼굴도 피의자의 인권을 위해 가려야 하는 마당에 인터넷에 개인의 신상이 까발려지는 것은 용의자의 얼굴이 공개되는 것보다도 훨씬 인권 침해의 요소가 강합니다.


5. 문제 발언을 한 건대생은 공인인가

건대생이 학생회 간부임으로 공인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더군요.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합니다. 물론 건대생이 학생회 간부임으로 공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건대생의 공인의 영역은 건대 내의 일로 한정되며, 발언의 내용도 학내 일이나 학생회를 대표하는 대외적 발언에 대해서 공인으로서 책임을 지면 된다고 봅니다. 사실 제가 이 학생의 발언 내용과 목적을 정확히 몰라 단정할 수 없으나, 건대 학내의 일과 관련이 없는 개인적인 생각이라면 공인으로서 책임을 묻는 것은 곤란하다고 봅니다.


저는 건대생의 호남 비하 발언은 매우 잘못되었으며, 이런 발언(글)들이 다시는 나와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신상털기 같은 사적 제재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과도한 호남 차별 발언(헤이트 스피치)을 제재할 법적 수단을 강구하기 위해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려는 노력은 경주해야 하겠지만, 현재 법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사적 제재, 특히 신상털기는 절대 반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