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시에르의 <<미학 안의 불편함>>은 근래에 읽었던 책 중에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책입니다. 그리고 가장 열렬한 동의를 보내면서 읽었던 책이었습니다. 랑시에르의 미학을 이해함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저서임에도 불구하고, 번역은 좋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철학적 용어가 어떻게 잘못 번역되었는지 보이도록 하죠.

이 글은 <<미학 안의 불편함>>의 오역을 지적하는 글이기도 하지만, 이전에 제가 썼던 글들에 대한 보충으로도 읽힐 수 있겠구요, 제가 앞으로 쓰고 싶은 칸트에 대한 글과도 연결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어인 "자유로운 외형," "감각적 외형," "아름다운 외관"이라는 번역어를 보겠습니다. 그냥 그럭저럭 이 책을 읽어가다가, 저 번역어와 부딪히면서, "자유로운 외형"이 무엇을 의미할까라는 생각에, 저 번역어로 인해 문맥이 흐트러지기 시작하더군요. 그래도 계속 읽어나갔습니다. 저기서, "외형"이란 번역어가 무엇일까를 궁리하면서 말이죠... 그러다,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발견했습니다.


"자유로운 외형은 외형을 현실과 연결시키는 구속과 반대된다. ... 플라톤의 공화국에는 ... 외형을 평가하는데 사용되는 현실 없이 외형은 없다." (국역판 64, 불어판 46-7).


여기서, "외형"이라는 번역어의 불어는 무엇이겠습니까? 위 번역문에서 잘못된 번역어인 "현실"이라는 번역어 때문에, 저 "외형"이란 번역어의 원어가 무엇인지 유추할 수 있겠더군요. "현실"은 realite(악상은 편의상 빼겠습니다)의 번역어겠죠. 그렇다면, "외형"의 번역어는? 바로 apparence의 번역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랑시에르에게 있어서 핵심적인 개념어인 "자유로운 외형 (libre apparence)"은 apparence를 realite와 연결시키는 구속과 반대된다는 것이고, 랑시에르의 "libre apparence"와는 다르게, 플라톤의 공화국에서는 apparence를 평가하는데 사용되는 realite없이 apparence는 없다고 랑시에르가 말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위에서 인용한 번역문에서, apparence와 realite는 어떻게 번역되겠습니까? "외양과 실제," "현상과 본질," 혹은 "현상과 실체" 등등으로 번역되어야 겠죠. 즉, 제가 <가면의 정치학>에서 썼듯이, 랑시에르의 libre apparence는 플라톤적인 이미지 체계에서 처럼 현상(사물의 나타남, 혹은, 그것의 나타나는 바, 그 겉모양)과 실체를 연결시키고, 실체 없이는 현상도 없기 때문에, 현상 뒤에 실체가 숨어있다고 가정하는 구속들과는 동떨어진 개념이라고 랑시에르가 말하는 것이죠. 위에서 인용된 번역문을 제 방식으로 바꿔보면,


"libre apparence는 외양(혹은 현상)을 실체와 연결시키는 구속과 반대된다. 플라톤의 공화국에서는 외양을 평가하는데 사용되는 실체 없이 외양은 없다." libre apparence를 어떻게 번역할지는 잠시 접어두고, apparence가 realite와 대립쌍으로 엮어지는 경우에 있어서, apparence를 외양, 혹은 현상으로 번역하였고, 그것과 대립되는 개념으로서의 realite를 실제, 혹은 실체로 번역할 수 있었네요.


결론적으로, apparence의 번역어는 그것의 동사형인 apparaitre(영어의 appear)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문맥에 따라, "나타남, "[대상의] 출현," "현상," "외양 (혹은 외형)" 으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즉, apparence와 realite의 이분법으로부터 벗어난, libre apparence라는 개념은 칸트로부터 유래하는 미학적 체계에서, 그 이전 체계에서는 들려지지 않고, 보여지지 않던 대상이, 혹은 대상의 어떤 무엇이 주체의 감각 경험에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문제삼는 개념인 것이죠. 한 마디로, "자유로운 출현"을 일컫는 것이죠. 이 문제의식은 다분히 현상학적인데, 물론 랑시에르는 현상학을 넘어설터이긴 합니다.


랑시에르는 "자유로운 외형"의 한 예로 그리스 여신상을 언급합니다.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리스 여신상의 외형이 자유롭게 변화한다는 말이겠습니까? 아니죠. 그 외형은 변화가 없을 터이지만, 플라톤의 이미지 체계에서는 그것이 신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나타난다면,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재현 체계에서는 완벽한 여성성을 지닌 것으로 나타난다면, 이제 칸트로부터 유래하는 미학적 체계에서는 이전 체계에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것이 "자유롭게 나타난다"는 것이겠죠. 마치 라캉의 object a처럼... 하나의 예를 더 들죠.


"외형들을 해체하는 작품은 저항하는 외형의 낯섦을 죽인다. ... 세계의 영속성 안에서 사물들의 기호로의 변형은 해석적 기호들을 초과시키고, 이것은 사물들의 모든 저항을 소멸시킨다." (국역 84, 불어판 65-6)


이 번역문에서, "외형"은 무엇보다, 사물들의 이러저러한 겉모양, 즉 겉으로 드러난 모양, 형태를 말하면서, 동시에 보여지지 않고, 들려지지 않던 사물이 "출현한다"는 것을 의미할 터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제서야 이러저러하게 나타나는, 기존의 감각 경험을 해체시키면서 낯선 대상으로 나타나는 그 대상의 겉모양은 사실상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뿐이죠. 단지 우리가 "들을 귀"와 "보는 눈"을 갖지 못했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외형"은 "사물의 출현"으로 바꿔서 읽는게 좋을듯 하네요.


realite를 실제, 혹은 실체라고 번역하기보다는 현실이라고 번역해야할 경우들도 있습니다. "외관(apparence)을 ... 현실(realite)로 변형" (160), "예술의 외관들을 공동 삶의 현실들로 변형" (160), "자유로운 외형의 고독을 체험된 현실로 변형"이라는 문장들이 그러합니다. "사물의 출현"이라는 잠재성을 현실화시키는 문제를 다루는 부분이겠죠. 기이하게도, 플라톤에서는, realite(실체)가 apparence(현상)에 앞서지만 랑시에르에서는 이것이 역전된다고도 말할 수 있겠네요. 랑시에르가 플라톤에서의 진짜 재현과 시뮬라크르를 언급하는 부분이 참고될 수 있겠네요.


짧게 두 가지... matiere와 forme를 재료와 형태라고 번역하는데, 이 두 용어가 아리스토텔레스와 관련이 된다면, 질료와 형상으로 번역해야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리고, forme가 칸트적인 맥락에서 빈번하게 쓰이는데, 형태가 아닌 형식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네요.


그리고, sensorium을 감각중추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그냥 감각경험, 혹은 "감각 경험의 망 (le tissu meme de l'experience sensible)" (불어판 47) 이라고 바꿔서 읽는게 이해에 도움이 될듯싶네요. 그래서, "예술의 감각 중추" (국역 76)를 "예술에 대한 감각 경험"으로 바꿔 읽는게 편하시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