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작가 아나톨리 김이 5월 말 이태만에 서울에 와서 외국어대학 별관에서 있었던 자전 에세이 두권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했다.
역시 고려인 출신인 부인 엘레나와 동행이었는데 출판기념회는 러시아문학 동호인들과 그리고 번역을 맡고 출간에도 전적으로 힘을 쓴
외대 김현택 교수 지인들 몇사람 등 아주 조촐하게 진행되었다.
 08년에도 그는 한국에 와서 춘향골 남원에서 한동안 머물며 지리산 부근 풍경을 그림으로 그렸고 천리포 수목원에서도 보름 가까이 머
물며 일대의 풍경을 화폭에 담아낸 바가 있다. 좀 덜 알려진 사실이지만 아나톨리 김은 작가가 되기 이전 미술대학에 재학하던 화가지망생이었다. 그는 기회가 되면 한국에 와서 한국 풍경을 화폭에 담아보고 싶다고 늘 말했는데 그 꿈을 이룬 것이다.

 이번 출간된 자전에세이는 두권으로 첫권-{초원, 내 푸른 영혼}은 작가 이전의 자기 성장과정과 삶을 다뤘고 두번째 -{나의 삶, 나의 문학}은
작가가 되기 위한 기나긴 각고의 과정, 그리고 작가 이후 소련 문단의 풍속도와 자신의 문학 정체에 대한 솔직한 술회 등을 다루고 있다.
 
 고려인 작가 아나톨리 김을 말할 때 다소 기이하고 재미있는 현상이 하나 있다. 웬만큼 독서를 하는 사람이면 그의 이름 정도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작품을 읽어봤다거나 그의 작품 내용,혹은 작품의 성격에 관해 얘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물론 러시아 현대문학 전공자는
예외로 두고 하는 말이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아나톨리 김은 현대 러시아문학에서 높이 평가받는 작가 가운데 한사람인 것은 분명
하다. 필자가 몇해 전 야스나야 팔리아나에서 거행된 작가대회에 가서 그가 러시아 신구세대 작가들로부터 원로작가의 융숭한 예우를 받
는 걸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그 장소는 러시아의 중요 현역작가들이 백여명이나 모이는 곳이였다. 그 작가대회에서 아나톨리 김은 톨스토이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 이 상의 성격이 재미있었다. 당장 발표된 작품을 대상으로 주는 상이 아니고 과거에 좋은 작품을 썼는데 기회
를 놓쳤다거나 암튼 좋은 작가인데 상복이 좀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에게 상을 수여하는 것이다.

 한국의 독자들이 아나톨리 김의 이름은 알면서도 작품에는 왜 캄캄한가? 그건 그의 작품이 이른바 아방가르드 계열의 전위적 성격이 강
해서 스토리텔링 위주의 소설에 익숙한 독자에겐 흥미를 주지 못한다는 것이 첫째 이유가 되겠고 다음엔 그나마 번역이나 좀 충실하면
이해하기에 도움이 되겠는데 번역상황도 썩 좋지 못하다는 것이다. 가령 그의 대표작이자, 출세작인 <다람쥐>나 <아버지 숲> 등이 80년
대에 이미 국내출간되었는데 상기한 두가지 이유로 출간과 동시에 소리소문 없이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다. 
 아나톨리 김도 이 점에 대해 몹시 아쉽게 생각하고 있으며 지금도 그 얘기만 나오면 얼굴을 붉힐 지경이다. 그는 스스로 김시습의 후예란걸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강능에 두번씩이나 찾아가서 선조의 유택에 참배하기도 할만큼 한국에 깊은 애착을 갖고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 자기
작품이 읽히지 못하고 이해되지도 못하는 현상에 대해 그만큼 안타까워 하는 것이다.

 한국의 독자들이 이 작가의 작품에 쉽게 접근하지 못했던 저간의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이번 자전에세이 출간은 그의 문학세계로 접근
하는 우회로를 제공하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된다. 이번에는 내용 자체가 어려울 것도 없는 사실과 체험의 기록인데다 번역도 김교수의
오랜 노력과 정성으로 흠 잡을 데 없이 훌륭하다 여겨지기 때문이다. 출판과 러시아어학교육원을 겸하는 {푸쉬킨 하우스}에서 출간된
책은 장정도 예쁘고 사이즈도 아담해서 쉽게 손에 잡힌다.

 무엇보다 이 두권의 자전에세이는 흥미로운 내용으로 가득하며 쉽게 읽힌다. 필자의 지인 한사람은 두권을 이틀만에 완전 독파했다며
너무나 재미있었다고 혀를 내둘렀다. 그만큼 아나톨리 김의 활동무대가 광활하고 삶 자체가 파란만장하다는 얘기다. 러시아 문단 풍속도에 특히 관심을 갖고 읽었는데 거물 작가 시인들이 문인회관에 진을 치고 앉아서 보드카로 곤죽이 되도록 만취해서 갖은 추태를 연출하는 장면
등에서 통제된 사회주의 사회의 일단이 엿보이는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나는 왜 책을 쓰는 것일까? 우선은 지루해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위해서일 것이다. 알코올이나 마약의 도움 없이 괴로움과
우울함에서 벗어나, 그리고 사는 것이 따분하다고 엉뚱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서 말이다. 요컨데 지금까지 내가 일관되게 간직하고 있
는 예술 및 창작관은, 문학의 사회성을 강조하는 러시아의 일부 급진적인 비평가들이 주장했던 사회 전체 또는 민중 전체의 구원수단
으로서의 예술 보다는 개인적인 구원수단으로서의 예술인 것이다-

2권에 나오는 작가의 창작관의 술회가 눈길을 끈다. 대표작 {다람쥐}가 하마터면 검열에 걸려 출간직전에 폐기될 번한 사건은 아슬아
슬한 스릴마저 느끼게 한다. 그는 사실상 반체제에 속하는 작가인 것이다. 자신의 문학관을 몇마디로 요약해서 말한 다음 같은 대목은
특히 주목을 끌었다.
-나는 자신을 인간 개개인의 유일무이한 특징을 탐구하는 작가라고 일컫고 싶다. 미학적인 면에서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영원히 존재
하는 어떤 선명한 상징보다는 오히려 순간 속에서만 찬연히 빛을 발하는 미묘한 떨림의 뉘앙스이다. 고전적 작가들이 어떤 계층이나
부류에 속하는 인물들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고 있다면, 나는 이 우주를 방랑하는 무수한 인간 개개인을 대변하는 작가인 셈이다.-

 아나톨리 김의 소설문법이 너무 난해하다고 하지만 러시아 문체로는 매우 이름다운 문체라고 말한다. 러시아의 이방인일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역시 그는 이방인이다. 그의 이런 입지가 그의 독특한 문학관을 형성하는데 한몫 했을 거라고 믿어진다. 그의 자전 에세
이는 러시아사회를 폭 넓게 이해하는데도 큰 도움이 된다. 쉽고 흥미있는 이 자전을 통해 한국의 독자들이 작가 자신의 바램처럼 그
의 문학에 더 친근감을 갖는 계기를 얻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