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강님의 글을 보다가, 한국불교 조계종에서 <21세기 아쇼카 선언>을 했다는 말을 듣고 검색해서 전문을 읽어보았습니다.

글이 아름답게 느껴질 만큼 훌륭하군요. 관심 있는 분을 위해 전문을 옮겨봅니다.

 

조계종 화쟁위원회에서 작성하여 선언했고, 무료책까지 만들어 배포했다고 합니다.

불교계 일각에서 반발이 있었나 본데, 외람되지만 그분들은 공부 좀 더 하셔야겠습니다.  

 

 

<21세기 아쇼카 선언> -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

 

<목차> 

□ 총론 

□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의 입장과 실천 
- 열린 진리관 
- 종교 다양성의 존중 
- 전법과 전교의 원칙 
- 공적 영역에서의 종교 활동 
- 평화를 통한 실천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의 서원 

총론 

아름다움은 서로 다른 것들의 어울림입니다. 자연이 아름다운 것은 다양한 모습과 색깔들이 어울려 있기 때문입니다. 붉은색은 초록색이 있어 아름답고 초록색은 노란색 속에서 더욱 빛납니다. 숲과 바위, 강물이 조화를 이뤄 아름다운 산수를 만듭니다. 초록색이 노란색과, 산이 물과 다투지 않습니다. 유정물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날짐승이 뭍짐승에게 하늘을 고집하지 않듯이 누구도 자신의 세계를 다른 생명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것의 조화가 자연세계의 아름다움이며 최선입니다.

 

인간의 세계도 조화가 최선입니다. 인간은 피부색도 언어도 서로 다릅니다. 문화적 관습과 종교적 믿음도 서로 다릅니다. 다르다는 것은 나와 남을 가르는 기준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 있는 생명체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자연의 세계가 그러하듯 다양성은 살아 있는 생명의 실상이며 생명 활동의 발로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우리’일 수 있습니다. 차이와 다양성은 인류문명 발전의 자연스런 경로였으며 지속적 발전의 기반입니다. 

 

부처님의 연기적 세계관은 서로 다른 인간들이 상호 존중하고 상생할 수 있는 평화적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연기적 세계란 모든 존재가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과 ‘저것’ ‘나’와 ‘남’은 서로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연관된 존재입니다. 연기적 세계관으로 본다면 반목과 대립은 바람직한 생존의 방식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저것’을 부정하는 것은 ‘이것’ 또한 부정하는 것이요, 남을 부정하는 것은 곧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내가 인정받기 위해서는 남을 인정해야 하고 나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는 남을 이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 연기적 세계관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의 연기적 세계관을 아름답게 형상화 한 것이 바로 화엄세계의 인다라망입니다. 인다라망은 본래 천신 인드라의 궁전에 드리운 주렴을 말합니다. 이 주렴을 엮고 있는 수천수만의 구슬들은 서로를 비추면서 그 비추어진 것이 다시 다른 것을 비추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의 구슬에 모든 구슬이 들어 있고 다시 모든 구슬에 그 하나의 구슬이 들어 있는 모습입니다. 화엄의 세계에서 인다라망은 우리 존재가 서로 연관 되어 있는 관계의 그물망을 의미합니다. 이런 세계에서 보자면 각 개별 존재는 근원적으로 평등하며 상호의존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구슬에 모든 구슬이 들어 있는 것처럼 개별 존재는 전체의 일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전체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연기적 세계관, 그리고 화엄의 인다라망은 불교적 관점에서 바라본 존재의 실상이며, 세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입니다. 차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조화롭게 공존할 것인가에 대한 불교적 해답입니다. 나와 상대가 다른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 인연의 차이일 뿐입니다. 각자 다른 인연이 만들어 내는 다양성은 ‘있는 그대로’ 세계의 실상이며 아름다움입니다. 바로 이런 세계관이 불교가 오늘날 한국 사회의 다종교적 상황을 이해하고 이웃종교와 관계 맺기를 원하는 바탕입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한국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다인종, 다문화 사회입니다. 이와 함께 한국사회는 다종교 사회입니다. 기독교, 불교, 유교, 원불교, 천도교, 천주교, 민족종교, 이슬람 등 다양한 종교가 한국사회에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믿음과 진리관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다원적 상황에서 종교인들은 차이와 다름에 대해 관용과 열린 태도를 가져야 하며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모범이 돼야 합니다. 종교란 본디 ‘나’를 넘어서는 것을 추구하는 가르침이며 자신을 낮추고 ‘나’를 버려 원수조차도 사랑하는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에 대한 관용과 인정은 종교적 실천의 출발이자 종교인의 기본적 덕목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입니다. 종교인들이 모범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독선과 아집을 조장하고 분쟁과 갈등을 일으키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나의 믿음만이 옳고 내 종교만이 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엔 잘못된 종교관·진리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나의 종교를 믿는 것이 다른 종교를 불신하는 이유가 될 수 없고 나의 종교를 사랑하는 것이 다른 종교를 미워하는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나의 부모님을 사랑한다고 해서 다른 부모님을 미워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종교는 모든 이들의 안락과 행복을 위한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입니다. 종교는 미움이 아닌 사랑, 갈등이 아닌 평화, 어리석음이 아닌 지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언어적 표현이 서로 다를 뿐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 모든 생명의 안락과 행복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가 다른 믿음의 체계를 용인하지 않고 ‘나만의 진리’를 고집할 때 종교는 평화와 구원의 메시지가 아니라 분열과 폭력의 메시지가 될 뿐입니다.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믿느냐가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약 2500년 전 아쇼카왕 치세의 인도 사회 또한 다종교적 상황이었습니다. 오랜 전통의 바라문교와 함께 당시 젊은 종교였던 불교와 자이나교 등 다양한 신흥종교와 수행문화가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아쇼카왕은 부처님께 귀의하고 스스로 불교도임을 자처했지만 통치자로서 다른 종교를 억압하거나 다른 종교인을 억지로 개종시키려는 권력행위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각 종교의 차이를 인정하고 관용과 존경으로 이웃종교를 대할 것을 백성들에게 요청했습니다. 아쇼카왕은 이런 내용을 새김글로 남겨 후대에 전했으며, 고금의 격절을 넘어 오늘날 우리에게도 좋은 귀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 아쇼카왕은 모든 종교의 신자들, 그들이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모두를 존경합니다. 각 종교마다 기본 교리는 다를 수 있으며, 자신의 종교를 선전하느라 남의 종교를 비난하는 것은 어떤 의도에서이건 자신의 종교에 오히려 더 큰 해악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조화가 최선입니다. 우리 모두 다른 사람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존경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자신의 종교도 발전하게 되고 진리도 더욱 빛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불교인은 이 내용을 역사적 기록으로서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소중하게 실천해야 할 가르침으로 받아들여 발전시키고자 합니다. 이와 함께 우리 불교인은 오늘날 종교 간의 갈등상황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고 반성합니다. 연기적 세계관은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부처님의 관점이며, 불교가 세상과 관계 맺기를 원하는 방식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불교인들은 이웃종교를 진정으로 ‘이웃’으로 생각하는데 충분하지 못했으며 이웃종교인의 허물을 내 허물로 여기고 그들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여기는데 충분하지 못했음을 반성합니다. 이웃종교를 질시하거나 경쟁하는 상대로 여겼던 적은 없었는지 반성합니다. 그리고 이웃종교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귀 기울여 배우려는 노력이 충분하지 못하였음을 반성합니다. 

 

이런 반성과 참회 위에서 우리 불교인은 한국사회의 종교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불교적 입장과 실천을 다음과 같이 천명합니다.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의 입장과 실천 

(1) 열린 진리관 

 

불교는 ‘나만의 진리’를 고집하지 않으며 불교에만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이웃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진리에 대한 표현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열린 진리관은 이웃종교를 대하는 기본 원칙이며 대화와 소통을 위한 출발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을 진리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이요, 생사윤회의 고해를 건너는 뗏목이라고 하십니다. 불교, 그 자체가 진리가 아니라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불교사의 다양한 사상은 진리에 이르는 길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임을 실천해 온 역사적 과정이었습니다. 불교는 그 다양한 길을 수레(乘)라고 합니다. 각자가 선택한 수레의 모양과 크기는 다르지만 자신의 수레만이 진리의 피안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불교의 이러한 정신은 오늘날 다종교적 상황에서도 실천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곧 이웃종교의 가르침 또한 진리에 이르는 길임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진리란 특정 종교나 믿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진리는 모두에게, 모든 믿음에 다 열려있습니다. 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와 문법이 다를 뿐입니다. 

 

원효스님은 자신의 진리만을 진리라고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고 하셨고, 마하트마 간디는 자신이 섬기는 신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신이 진리가 아니라, 진리가 신”이라고 하셨습니다. 두 분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동일합니다. 진리에 대한 표현은 다양하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진리는 더 큰 진리의 한 조각일 뿐이라는 겸허한 태도를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2) 종교다양성의 존중 
 

내 종교가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종교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이웃종교에 대한 인정과 관용이라는 소극적 차원을 넘어 그들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배우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웃 종교와 우리는 경쟁적 관계가 아닙니다. 진리를 향한 동반적 관계이며 이웃종교의 장점을 통해 내 종교의 부족함을 채우는 상호보완적 관계입니다. 그리고 사회적 공동선을 실현하기 위한 동지적 관계입니다. 

 

대승불교의 원융적(圓融) 세계관을 오랫동안 내면화해온 우리 불교인은 이웃종교에 대한 인정과 관용의 측면에서 비교적 모범적이었습니다. 이웃종교에도 진리가 있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해 왔습니다. 

 

그러나 종교 다양성의 측면에서 볼 때 스스로 반성해야 할 점이 없지 않습니다. 진리는 둘이 아니라는 불이(不二)의 정신을 강조하는 가운데 서로간의 ‘차이’를 인정하는데 소홀하였던 점이 있었습니다. 다양성은 곧 ‘차이’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차이’를 무시한 채 결국 다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 종교의 관점으로 수렴해버리는 것은 이웃종교를 진정으로 존중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각 종교마다 고유한 전통과 고유한 신앙의 방식이 있습니다. 이 차이를 무시한 채 “결국 다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 종교의 관점으로 수렴해버리는 것은 이웃종교를 진정으로 존중하는 태도라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내 종교의 관점과 언어로 타 종교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입장과 언어로 그들의 종교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이웃종교를 진정으로 존중하는 종교인의 태도일 것입니다. 서로의 차이와 다름을 존중할 때 공통점이 더욱 빛나 보이며 모두 진리를 향한 동반자라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한편 나와 다른 관점을 인정하는 것이 다종교 시대를 살아가는 종교인의 덕목이라 하더라도 여기에는 하나의 원칙이 있습니다. 종교 다양성 자체를 부정하는 관점을 다양성의 이름으로 용인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상호존중의 호혜성은 종교다양성을 실천하는 최소한의 원칙입니다. 이 원칙은 다종교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불교인이 지켜야 할 또 하나의 정법입니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되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진정한 정법수호의 정신입니다. 


 

(3) 전법의 원칙 
 

나의 믿음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은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종교를 존중하고 다른 사람의 종교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조심스럽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라는 울타리를 치고 다른 믿음을 갖는 이들을 배척하며, 내 울타리 안으로 남을 끌어들이려는 방식으로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믿음을 전하는 일은 곧 자신의 믿음을 다듬어 나가는 과정이요, 서로 다른 믿음을 지닌 이들과 어우러지면서 큰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과정입니다. 논쟁적 대화를 통해 나의 믿음이 옳다는 것을 밝히려고 하는 것은 종교인의 성숙한 태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논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천적 활동을 통해 내 믿음의 참됨을 보여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말없는 감동이 가장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말로 전하는 일은 가장 나중의 일이며, 또한 가장 조심스럽게 행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전법은 다른 종교인을 개종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당시 시하라는 이름의 장군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장군은 자이나 교도로서 많은 명예와 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시하장군은 부처님의 명성을 듣고 약간의 반감과 호기심으로 부처님을 만나러 옵니다. 부처님과의 오랜 토론 끝에 시하장군은 불교로 개종하기를 결심하고 부처님께 허락을 청합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허락을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자이나교의 큰 후원자로서 존경을 받고 있던 장군이 개종할 경우 자이나교도들이 받을 충격 때문이었습니다. 몇 번의 거절 끝에 부처님은 장군이 앞으로도 자이나교도들을 잘 대해주고 물질적으로 후원할 것을 다짐 받고서 그의 개종을 허락합니다. 

 

전법은 ‘사람들의 행복과 안녕’을 실현하는데 그 궁극적 목적이 있습니다. 나의 종교를 선전하기 위해 타종교를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와의 공존을 지향하고 다른 종교인들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방법이어야 할 것입니다. 


 

(4) 공적영역에서의 종교 활동 

국가와 종교가 분리되어 있으며 민주주의의 이념과 절차를 지향하는 한국사회에서 개인은 자신이 믿고자 하는 종교를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 자유는 어떤 종교도 믿지 않을 자유 또한 포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종교적 믿음을 전파하려고 하는 행위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일 뿐 아니라 자신에게 위임된 공적 권력을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는 법과 제도의 문제 이전에 종교인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양식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법과 제도의 문제 이전에 가장 기본적 양식의 문제입니다. 
 

종교인은 공적 영역에서는 민주시민이어야 합니다. 다른 종교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양식과 상식을 갖춰야 합니다. 사회적 공동선을 추구해야 하는 공적영역에선 개인의 믿음과 종교적 신념은 어디까지나 사적 영역에 속합니다. 특히 공무원과 같이 공공적 봉사를 하는 사람은 더욱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공공적 장소에서의 종교 행위 또한 자제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자유가 헌법으로 보장돼 있는 만큼 종교적 행위나 표현을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공공장소에서의 종교적 행위나 표현은 다른 사람의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국가대항 월드컵 경기에서 종교적 표현의 골세러모니를 금지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공적 영역의 종교 활동은 민주적 이념과 시민적 상식과 부합돼야 합니다. 특히 자신의 믿음을 전하기 위해 공적 지위나 권력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공적 권력이 신앙전파의 수단이 되거나 공적 장소가 신앙 전파의 무대가 되는 것은 우리 사회의 비극입니다. 개인적 신앙이 공적 영역에 작용해 종교적 편향성을 낳는 것은 결과적으로 모든 종교의 비극으로 이어집니다. 언제나 이를 유념하고 공정성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5) 평화를 통한 실천 
 

종교가 추구하는 이상은 높고 신앙의 힘이야말로 무엇과 비길 수 없이 큽니다. 따라서 높은 이상과 큰 실천력이 사회적으로 건강한 방향성을 지니도록 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종교 간의 크고 작은 갈등과 충돌이 언제든 벌어질 수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현실은 종교의 이상과 실천력을 가늠해보는 좋은 현장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올바른 가르침을 판별하는 기준의 하나로 ‘사람’이 아닌 ‘법’에 의지하라고 하셨습니다. 종교 간의 갈등과 충돌은 사람의 일이지 가르침의 문제가 아닙니다. 종교 간의 갈등 상황에서 상대방 종교의 가르침이나 지도자를 비난하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더 악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평화만이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종교간 평화를 가로막는 갈등 상황이 오더라도 우리 불교인은 평화로운 방법으로 평화를 이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의 여러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는 하나의 좋은 모범을 만들어야 합니다.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은 처음부터 끝까지 평화로운 것이어야 합니다. 비폭력은 불교가 지향하는 가치관이자 실천윤리입니다. 비폭력은 단지 행동의 비폭력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말과 의도도 비폭력적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쟁과 갈등의 과정에서 마음속에 분노나 증오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분쟁과 갈등의 해결이라는 목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과 수단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진정으로 불교적 가치를 실천하고 구현하는 일입니다.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의 서원 

우리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고통에서 벗어나 평화와 안락을 얻고자 하듯이 이웃종교인들도 그들이 믿는 종교를 통해 평화와 안락을 구하고 있습니다. 길은 다르지만 우리가 원하는 바는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이웃종교의 가르침도 소중하게 여기겠습니다. 내 종교의 관점과 언어로 이웃종교를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그들의 입장과 언어로 그들의 종교를 이해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까지도 존중하겠습니다. 

 

이웃종교인과 더불어 고통 받고 소외된 모든 생명들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겠습니다. 그들과 함께 지구촌 곳곳의 가난과 질병을 퇴치하고 전쟁과 폭력을 방지하며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환경파괴를 막아 모든 생명이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