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일이라는 것이 참 희한하군요
부정 부패 독재에 저항하여 운동을 한 운동권 명문 가문 (?) 출신이 서민들에게 저런 고통을 줄줄이야
노무현 후보만들기에도 일등공신이라는데
노무현때 매출이 두배ㅔ로 커진것 보면 별 특혜는 못 받은 것 같은데요
참 대단한 집안이기는 한데 웬지 인생무상이랄까요


박형선, 2002년 광주 노풍 주역”

부산저축 의혹 핵심 “대선 경선 때 당원 만들어 지지 … 이인제 대세론 뒤집어”
야권 관계자 당시 상황 밝혀
박형선 ‘호남 운동권 명가’…‘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 박기순이 여동생

부산저축은행 2대주주인 박형선(59·구속·사진) 해동건설 회장. 그는 이 은행의 불법 로비 의혹 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이 가장 비중 있게 다루는 인물이다.

박 회장이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경선에서 ‘노풍(盧風·노무현 바람)’을 일으킨 주역이었고, 노무현 대통령 취임 이후 그의 사업이 대폭 확장됐으며, 이 과정에서 로비와 불법이 저질러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야권 관계자들에 따르면 박 회장은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뽑는 지역 순회 경선 때 노무현 당시 후보가 광주에서 1위를 차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광주 지역의 한 인사는 5일 “2002년 민주당이 경선을 하기 직전까지 이인제 의원이 모든 지역에서 앞서 갔으나 노무현 후보가 광주에서 1위에 오르면서 이인제 후보의 대세론은 꺾였다”며 “그때 박 회장은 노 후보를 광주의 재야세력과 연결시켜 ‘노풍’을 일으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당시 민주당은 국민참여경선제를 도입해 1000원의 당비를 낸 사람 중 선거인단을 뽑는 ‘책임 당원제’를 실시했는데, 박씨가 (광주 지역) 당원 대부분을 만들어 그 덕분에 노 후보는 광주에서 이인제·한화갑 후보를 제압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는 또 "박 회장은 광주지역 시민사회단체가 주관하는 강연이나 세미나에 노 후보가 초대받을 수 있도록 도와줬고, 노 후보의 경선팀을 물적으로 뒷받침했던 사람이다”고 밝혔다.

또 다른 광주지역 인사는 “당시 광주에선 박 회장과 박 회장의 형으로 언론인 출신인 화강씨(전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 가톨릭 수사로 노무현 후보 만들기에 나섰던 김수복씨, 가톨릭계에서 여성·노동 운동을 했던 정향자씨 등이 노 후보 지지자들을 조직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정찬용 전 청와대 인사수석은 자신의 저서 『정찬용의 도전』에서 “(대선 승리 후인) 2003년 1월 28일 광주를 방문한 노무현 당선자와 S호텔에서 면담하는 자리에 김수복·윤한봉·박화강·이강·박형선·정향자·이학영이 모였다”고 밝혔다. ‘당선자 노무현’이 대면한 광주 인사 8명 중 2명이 박 회장 형제였던 셈이다. 이 자리에선 한 참석자가 “경상도선 문재인이란 분이 청와대 수석으로 간다던데 호남 지역도 청와대와 연결고리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냈다고 한다.

2003년 2월 노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박 회장 소유인 해동건설은 급성장했다. 같은 해 박 회장이 부산저축은행의 2대주주가 된 다음 부산저축은행은 캄보디아에 4962억원을 투자하는 등 사업을 확장했다. 이 과정에서 투자금 일부가 비자금으로 조성됐는지 여부를 검찰은 수사하고 있다.

박 회장 집안은 광주에서 ‘운동권 명문가’로 불린다. 박 회장은 광주일고(45회)를 나와 전남대에 입학한 뒤 ‘민청학련’ 사건으로 1974년 구속돼 10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해찬 전 국무총리, 정찬용 전 청와대 인사수석 등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함께 투옥됐던 인물이다.

박 회장의 여동생은 전남대에서 ‘들불야학’ 활동을 하다 78년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한 박기순씨다. 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의 주역으로 옥중에서 단식투쟁을 하다 사망한 박관현 전남대 총학생회장, 당시 광주시청에서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동하다 사망한 윤상원씨는 박기순씨와 함께 ‘들불야학’을 운영했다. 특히 윤씨와 박씨는 연인 사이였다. 그래서 소설가 황석영씨와 광주지역 운동권 인사들은 82년 두 사람의 영혼결혼식을 올렸다. 이 둘을 위해 만들어진 노래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로 시작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박 회장의 부인은 80년 신군부의 5·18조치로 수배를 당하게 되자 미국으로 밀항, ‘5·18 최후의 수배자’로 불렸던 고(故) 윤한봉씨의 여동생 경자씨다. 박 회장의 형 화강씨는 모 신문 광주지국장을 지냈고, 노무현 정부에선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으로 일했다. 박 회장은 80년대 중반부터 동문인 L씨와 보성건설을 운영했다. 후배인 L씨가 회장, 박 회장이 부회장이었다.

그러다 2002년 박 회장이 보성건설에서 독립해 해동건설을 세웠다. 10여 년간 함께 일하던 L씨에게 “나도 이제 바깥에서 ‘사장님’ 소리 좀 듣고 싶다”며 자신의 회사를 설립했던 것이다. 이때 L씨는 박 회장에게 거금을 종잣돈으로 줬다는 게 주변의 소문이다. 박 회장은 노무현 정부에서 회사가 쑥쑥 자라자 노 대통령 측을 후원했다 한다. 노 대통령이 취임하던 해인 2003년 해동건설의 매출액은 275억원이었으나 노 대통령 집권 5년차였던 2007년엔 매출액이 601억원으로 두 배 이상으로 커졌다. 이 회사의 2010년 매출액은 1000억원대다.

박 회장이 노 대통령 측을 적극 지원하자 친노 진영에선 그를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과 함께 노 전 대통령의 3대 후원자로 꼽았다. 노무현 정부 시절 박 회장은 민청학련으로 함께 옥고를 치른 고교 1년 선배 정찬용씨를 청와대 인사수석으로 추천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정찬용 전 수석은 저서에서 노 당선자가 자신을 직접 선택했다고 말했다.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정찬용 인사수석 발탁은 광주 지역의 많은 시민단체가 모여 공동으로 추천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박 회장은 노무현 정부 말기에 광주은행 부행장 출신인 오지열 중앙부산저축은행장(부산저축은행 계열사)과 사돈이 됐다. 당시 서울의 특급 호텔에서 열린 박 회장 아들 결혼식에는 박삼구 금호그룹 회장이 주례를 섰다. 당시 이해찬 총리 등 노무현 정부 실세들도 대거 참석해 축하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