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와 번식 잠재력

 

현대 선진 산업국에서는 태어난 아기 중 거의 대부분이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아남는다. 하지만 사냥-채집 사회에서는 신생아의 절반 정도는 사춘기가 되기 전에 죽는다. 따라서 사냥-채집 사회에서 신생아의 번식 잠재력은 사춘기의 번식 잠재력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친족애를 연구할 때 인간이 현대 산업국에서 진화한 기간은 무시해도 될 듯하다. 농경 사회의 경우에도 사냥-채집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신생아 중 상당수가 사춘기가 도달하기 전에 죽었다. 이 글에서 번식 잠재력을 따질 때에는 사냥-채집 사회가 기준이다.

 

번식 잠재력은 사춘기 직후 무렵에 최고점이 되었다가 점점 작아진다. 폐경이 지난 여자의 번식 잠재력은 0이다. 남자의 경우에는 70세가 넘어도 번식 잠재력이 0이 되지 않는다. 그 나이에 자식을 보는 경우도 가끔은 있다. 하지만 0에 근접한다.

 

여기에서 번식 잠재력은 직접적 번식만 따진다. 즉 자신의 정자나 난자가 아기가 되는 경우를 말한다. 따라서 자연 선택과 관련된 그 사람의 가치를 온전히 표현하지는 못한다. 예컨대 폐경이 지난 여자는 자신이 직접 아기를 낳지는 못하지만 친족을 돌볼 수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식 잠재력이 의미 있는 척도이기는 하다.

 

 

 

나이와 친족애

 

친족 선택 이론에 따르면 서로 가까운 친족일수록 즉 근친도가 높을수록 서로 더 사랑하는 것이 적응적이다. 하지만 친족에 대한 사랑에 근친도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다. 자신과 상대의 나이도 중요하다. 자신의 번식 잠재력이 작을수록, 상대의 번식 잠재력이 클수록 상대를 위해 자신을 더 희생하는 것이 적응적이다.

 

70세인 어머니가 더 이상 직접 번식할 수도 없고, 친족을 돌볼 수 있는 능력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가족에게 부담만 된다고 하자. 이럴 때에는 어머니를 위해 자신을 많이 희생하는 것이 적응적이지 않다. 여러 문화권에 있었던 고려장 풍습을 이런 사정과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부모가 늙고 자식이 젊은 경우에는 내리 사랑이 두드러진다. 즉 그런 경우에는 부모의 자식 사랑이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보다 훨씬 더 크다. 이것은 인간이 나이를 고려하여 친족애를 조절하도록 진화했음을 암시한다.

 

늦둥이에 대한 각별한 사랑도 친족 선택 이론과 아귀가 잘 맞는다. 늦둥이를 낳은 부모 즉 나이가 많은 부모는 젊은 부모에 비해 번식 잠재력이 상대적으로 낮다. 따라서 적응적 관점에서 볼 때 잃을 것이 별로 없다. 이런 경우에는 자식을 위해 더 희생하는 것이 적응적이다.

 

갓난아기의 번식 잠재력보다 사춘기의 번식 잠재력이 더 크기 때문에 부모가 갓난아기인 자식보다 사춘기인 자식을 더 사랑하도록 진화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식이 갓난아기일 때 죽는 경우보다 사춘기에 죽는 경우에 더 부모가 슬퍼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연구 결과가 있다.

 

 

 

내리 사랑은 항상 진실일까?

 

일반적으로 자식이 사춘기가 되면 그 이후부터 항상 자식의 번식 잠재력이 부모의 번식 잠재력보다 크다. 따라서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보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클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또한 온갖 현상들이 이런 기대와 부합한다.

 

하지만 항상 자식의 번식 잠재력이 부모의 번식 잠재력보다 큰 것은 아니다. 만약 부모가 매우 젊고 자식이 매우 어리다면 오히려 그 반대다. 예컨대 부모가 사춘기가 지난 후 몇 년 안 된 나이이고, 자식이 신생아인 경우에는 부모의 번식 잠재력이 신생아보다 훨씬 크다. 친족 선택 이론만 고려한다면, 이런 경우에는 자식의 부모 사랑이 부모의 자식 사랑보다 더 크다고 기대할 수 있다. 즉 부모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려는 욕망보다 자식이 부모를 위해 희생하려는 욕망이 더 클 것이다.

 

하지만 신생아가 부모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따라서 부모를 위해 희생하려는 욕망이 설사 신생아에게 있다 하더라도 검증하기가 극히 어려워 보인다. 어차피 신생아는 부모를 위해 희생할 수가 없기 때문에 아예 그와 관련된 기제가 진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자식이 5세 정도 되고 부모가 매우 젊은 경우에도 여전히 부모의 번식 잠재력이 자식의 경우보다 클 것이다. 5세 정도 되는 아이는 신생아에 비해서는 뭔가를 할 능력이 있지만 부모를 위해 희생하기에는 여전히 너무 무력해 보인다.

 

어쩌면 잘 궁리해 보면 이런 경우에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이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보다 더 크다는 점을 입증할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행동을 조절하는 심리 기제보다는 생리 기제에서 찾으면 더 가망성이 클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방면의 연구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자매와 관련된 편애와 형제와 관련된 편애

 

제목이 애매하기 때문에 보충 설명을 해야겠다. 여기에서는 아들과 딸이 있을 때 아들을 더 편애할지 딸을 편애할지를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여러 명의 아들이 있을 때의 편애와 여러 명의 딸이 있을 때의 편애를 비교하려는 것이 제목의 의도다.

 

대체로 수컷의 번식이 암컷의 번식에 비해 편차가 심하다. 극단적인 하렘 체제의 경우에는 으뜸 수컷이 되어 장기 집권하는 수컷의 경우에는 수십 마리의 자식을 보는 것이 가능한 반면, 으뜸 수컷이 되지 못하고 죽는 수컷의 경우에는 한 마리의 자식도 못 보는 것도 가능하다. 일부다처제의 경우에는 편차가 심하다.

 

일부일처제에 가까울수록 그런 편차가 작다. 인간의 짝짓기 체제는 일부일처제에 상당히 가깝지만 일부다처제의 경향이 약간은 있다. 따라서 수컷의 번식 편차가 하렘 체제인 바다코끼리보다는 훨씬 작다. 하지만 여자의 번식 편차에 비해서는 남자의 번식 편차가 더 크다.

 

인구의 증감이 없는 경우 평균적으로 남자도 여자도 자식을 두 명 정도 본다(엄밀하게 따지자면 그냥 자식이 아니라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는 자식이라고 해야 하며 다른 요인들도 고려해야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냥 넘어가자). 이 때 남자들 사이의 편차가 여자의 경우보다 더 심해서 어떤 남자는 평생 열 명이 넘는 자식을 볼 것이며 어떤 남자는 자식을 한 명도 못 볼 것이다. 반면 여자의 편차는 이렇게 심하지 않을 것이다.

 

더 잘 번식할 것 같은 자식을 더 사랑하는 것이 적응적이다. 따라서 그런 자식을 편애하도록 인간이 설계되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실제로 부모는 더 잘난 자식을 더 사랑하는 경향이 있다.

 

남자들 사이의 번식 편차가 더 크기 때문에 두 딸이 있는 부모에 비해 두 아들이 있는 부모의 편애가 더 심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부모의 입장에서 볼 때, 두 아들 중 잘될 것 같은 아들에 올인하는 전략이 두 딸 중 잘될 것 같은 딸에 올인하는 전략에 비해 더 합리적이다(또는 덜 불합리하다).

 

이것은 내가 생각해낸 가설이다. 적어도 나는 이런 가설을 본 기억이 없다.

 

 

 

어떻게 검증할 것인가?

 

잔인한 실험을 할 수 있다면 여러 아들을 또는 여러 딸을 죽여보고 부모가 보이는 슬픔의 편차를 재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보다 덜 잔인한 실험 방법도 있다. 아들 또는 딸이 죽었다고 속인 후에 나타나는 생리적 변화나 행동을 측정하면 된다.

 

물론 그런 잔인한 실험은 윤리적인 문제가 있다. 따라서 자식이 죽었다는 상상을 하도록 만들고 얼마나 슬픕니까?라고 묻거나 생리적 변화를 측정하는 방법을 쓸 수 밖에 없다. 이런 실험은 덜 정확한 결과로 이어지겠지만 그나마 허용되는 실험이다.

 

실제로 자식들이 죽은 과거 일을 회상하도록 하여 슬픔의 정도에 대해 물어보는 방법도 있다.

 

만약 딸인 경우에 비해 아들인 경우에 슬픔의 편차가 더 심하게 나타난다면 내가 제시한 가설과 부합한다.

 

형제들과 자매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하는 방법도 있다. 만약 자매로 자란 경우보다 형제로 자란 경우에 편애의 희생자가 되었다고 하소연하는 경우가 더 많거나 그런 하소연이 더 강렬하다면 내가 제시한 가설과 부합한다.

 

부모에게 소피의 선택(Sophie's Choice)을 하도록 하는 실험 방법도 있다. 물론 이것도 윤리적인 문제 때문에 상상 실험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http://en.wikipedia.org/wiki/Sophie%27s_Choice_(novel)

 

두 아들이 있는 부모와 두 딸이 있는 부모를 대상으로 이런 실험을 한다. 물에 빠진 자식 둘 중 한 명만 구할 수 있다면 누구를 구하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지거나 나찌가 두 자식 중 한 명만 살려주겠다고 할 때 누구를 살리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때 만약 자매를 둔 부모보다 형제를 둔 부모가 덜 망설이면서 한 명을 선택한다면 내가 제시한 가설과 부합한다.

 

 

 

2011-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