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늘 나가수에 대해 떠오른 한토막입니다. 황당하다면 황당하고 흥미롭다면 흥미로운.

예술을 둘러싼 내용과 형식 논쟁은 많이 아실 겁니다. 구체적으론 리얼리즘을 둘러싸고 벌어졌죠. 형식은 내용을 따라야 하는가, 아니면 예술의 형식은 그 자체로 내용인가. 조금 더 거칠게 정리해봅시다. 노래는 무언가를 표현하는 수단인가, 그 자체로 완성태인가. 쉽게 말해 노래는 가수의 감정이나 사상을 표현하여 공감케하는 수단인가, 아니면 그 자체로 목적인가. 더 조야하게 말해 멜로디나 형식은 가사와 일치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다시 거창하게 역사적 논쟁을 끌고 오면 멀리 루카치와 브레히트까지 올라갑니다. 루카치는 소설을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뤘던' 그리스 시대와 달리 파편화된 인간에게 총체성을 회복케 한다고 본 반면 브레히트는 그러한 루카치의 입장을 부르주아의 환영에 굴복한다고 비판합니다. 그래서 브레히트는 대립과 파편화, 소격화를 자신의 예술에 도입하죠. 슬픈 장면을 웃기게 보여주기도 하고 의도적으로 고전적 내용에 삼류 예술 형식을 집어 넣기도 합니다.

물론 위의 논쟁이 나가수에 그대로 대입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다만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네요. 가사와 멜로디가 어긋난 노래를 언제부터 들으셨는지?

전 어릴 적 거의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어쩌면 모든 예술을 자신의 사상이나 이념의 반영으로 보았던 조선시대의 영향 때문인지 몰라도 어릴적 들은 대개의 노래 멜로디는 가사를 따랐죠. 예외가 있다면 '갑돌이와 갑순이' 정도랄까? 그 노래도 민요조의 옛 이야기라는 관습을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큰 예외라 보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80년대 후반 이런 경향은 붕괴 조짐을 보입니다. 가령 아래의 두 노래를 비교해보세요.

 http://www.youtube.com/watch?v=fNh7yl50OcU
http://www.youtube.com/watch?v=_XfBICzwAMM

수준을 떠나 하남석의 '밤에 떠난 여인'이 비교적 고학력층에게, 그리고 태진아는 그야말로 전국민적 사랑을 받았죠. 둘의 차이라면  회고적이지만 어쨌든 하남석의 노래는 가사에 충실하여 어떤 슬픔을 드러내는 반면 태진아의 노래는 미안 미안하다 반복하지만 멜로디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제 기억에 태진아의 노래는 가사를 배신한(?) 멜로디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최초의 사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미안 미안해'가 발표된 시점은 의미심장합니다. 바로 민주화가 시작된 1990년입니다. 우리 사회가 엄숙주의, 혹은 권위주의나 독재를 벗어나 개인의 표현 자유가 본격화된 시점에 대중 가요는 가사라는 굴레를 벗어나 개인의 쾌락이나 욕망에 다가가기 시작합니다.

뒤이어 서태지가 등장했죠. 서태지는 사회비판이란 내용에 담겨있던 엄숙주의나 비장함을 벗겨내고 사회비판도 욕망의 반영이란 점에서 상업적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봇물 터지듯 대중 문화가 만개합니다.

어쩌면 요 몇년 새 걸그룹의 전면화는 이러한 경향의 극점이었을 겁니다. 여기 스카이넷의 쥔장 한분도 본업보다 '걸그룹 전문 평론가'라는 타이틀에 희희낙낙하며...쿨럭. 걸그룹의 가사는 노래의 내용이 아니라 멜로디나 보컬의 특성을 받쳐주는 '수단'이죠. 가사가 중요하다 아니다가 아니다를 떠나 그 역할 자체가 과거와는 전도되어 나타납니다.

그런데 걸그룹의 노래들이 잘 보여주는 이러한 내용과 형식의 전치는, 예술성이나 수준을 떠나 감상자 입장에선 어떤 이분법의 딜레마를 안깁니다. '즐기거나 혹은 무관심하거나'(혹은 분개하거나) 특히 자신의 삶과는 유리된 어떤 감정이죠. 다시 루카치와 브레히트로 돌아가서 설명하자면 '오락임에 솔직'(브레히트나 고다르 식으로 표현하면 장르 속성을 그대로 드러내는)하되 '그저 오락일 뿐'('자신의 삶과 무관한 유희'(루카치 식으로 표현하면 총체성의 상실)이죠.

이소라가 보아의 '넘버 1'을 소개하며 '여성의 슬픔이 들어있다'고 말했죠. 이소라의 매니저가 밝혔듯 이소라는 발음을 따로 적을 만큼 가사를 중시하고 가사에 담긴 감정 전달에 탁월한 가수입니다. 반면 그래서 어떤 층으로부터는 부담스럽다, 혹은 쿨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기피를 당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소라는 보아의 노래 가사에 들어있던 '슬픔'을 끄집어내 그 형식을 새롭게 창조했죠. 저도 그랬거니와 이소라의 노래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 '어, 이 노래 가사 슬픈 거였잖아'하며 새삼 놀랐을 겁니다.

즉, 나가수의 부상 이면엔 과거 대중 가요계의 주류이자 소비층의 욕망인 가사의 감정 전달과 공감이 걸그룹 및 기타에 눌려있다 나가수라는 계기를 통해 분출되었다는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특히 이런 측면은 임재범에게 가장 잘 드러납니다. 제가 평가할 능력은 없습니다만 가창력이나 실력이란 측면에서 김연우가 임재범보다 특별히 못하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공감'이란 면에서 김연우는 도저히 임재범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는 김연우 스스로 '전 평탄하게 살아왔다'는 후일담에서도 드러납니다. 즉, 나가수의 평가단 투표는 '실력'이 아니라 '공감'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라이브의 속성상 당연하겠지요.

나가수 출연진중 예외라면 김범수를 들 수 있을 겁니다. 다른 가수들이 점점 더 전통적 모델로 회귀하는 가운데 그만 예능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엔 김범수의 페르소나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는 강명수가 어느 라디오 프로에서 '얼굴없는 가수'라 농담했을 만큼 예능과는 거리가 먼 캐릭터로 시작했죠. 그래서 그의 예능 퍼포먼스는 청중들의 관용도 내에 있습니다. 반면 본래 예능 이미지가 강했던 김건모는 '실력'에도 불구하고 립스틱 한방에 그 관용도를 벗어나면서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거기에 쏟아지는 비난까지.

그래서 전 나가수 현상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궁금합니다. 세시봉 현상만 해도 가사와 멜로디가 일치했던 시절로의 복고적 취향이라 여겼지만 나가수 열풍까지 보아하니 이제 복원이라 불러도 될 것 같군요.

곁가지입니다만 임재범은 도중 하차로 신화를 완성합니다. 그는 운이 좋게도 자신이 부를 수 있는, 혹은 공감케할 수 있는 노래만을 부르고 내려옵니다. 만약 그가 걸그룹의 노래를 불렀다면 과연 YB 만큼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요? YB는 소녀시대의 노래 가사가 '공감이 안되도' 어쨌든 퍼포먼스로 최소한의 만족을 줄 수 있었지만 임재범이란 캐릭터도 그럴 수 있을까요?

이상 재떨이걸그룹 평론가 듣보잡 시닉스였습니다. - -;;;

ps  -원래 스카이넷의 댓글로 쓴 글이라 난삽합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댓글 쓰기가 차단되어 이 곳의 본문이 되어 버렸다능. (망상이라도 아깝자나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