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에서 일요일을 맞아 카메라만 들고 거리로 나섰다. 별다른 일정이 없었기 때문에 좀 자유롭게 여기저기 다녀보고 싶었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거리에 평소보다 사람이 많은 것 같았는데, 그 가운데 인상적인 모습이 있었다.

나이가 일흔은 넘어보이는 동양계 노인이 부인과 함께 팔짱을 끼고 거리를 산책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왜소한 체구에 정장을 입고 중절모를 쓰고 지팡이까지 든 노인의 입성은 비록 단정하고 깨끗했지만 어딘지 초라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내 눈을 끈 것은 그 초라한 양복이 아니라 그 양복 가슴팍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훈장들이었다.

한국에서는 아무리 단정하게 차려입었다 해도 제복이 아닌 사복을 입은 민간인이 가슴에 그렇게 훈장을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본 적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사실은 그런 식의 모습을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그냥 낯설고 의아한 느낌이었지만 노부부를 지나쳐 길거리를 걸으면서 내가 본 모습의 의미가 새삼 가슴에 무겁게 다가왔다.

내가 본 저 모습은 국가 사회의 공식적인 규범체계와 평범한 일반 사람들이 실제 생활에서 의지해 살아가는 규범이 모순되지 않고 일치한다는 증거 아닐까? 즉, 정부가 인정하는 규범이 그대로 평범한 일반인들의 삶 속에 그대로 수용되고 살아남고 발전한다는 얘기 아닐까? 이것은 나로서는 낯선 경험이었고, 사실 상상하기 힘든 현상이었다. 내가 30여년 대한민국에서 살아온 경험에서 정부의 공식적인 규범은 아무리 좋게 봐줘야 그냥 적당히 지키는 시늉만 하면 되는 의무였고 보다 노골적으로 얘기하자면 마지못해 수용해야 하는 일종의 강요였다.

나는 병역 의무를 일종의 명예로 생각하는 사람을 주위애서 본 적이 없었고, 가끔 서양 영화나 소설에서 등장하는 '전쟁에 참가하고 싶어서 일부러 나이를 올려 지원하는' 등의 에피소드는 일종의 변태스러운 행위 또는 실제가 아닌 허구의 묘사처럼 느껴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쏘련 모스크바의 거리에서 본 그 노인의 모습은 나에게 그런 세계 즉, 공동체의 규범과 개인이 실제 의지해 살아가는 규범이 모순되지 않고 사이좋게 공존하는 그런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저 노인은 무슨 전쟁에 참가해서 싸운 공로로 저 훈장을 받은 것일까? 모르기는 해도 2차세계대전 참전용사 아닐까 짐작했다. 무슨 전쟁이건, 저 노인에게 그 전쟁의 경험은 자랑스러운 기억이며, 그 자부심에 대해서 주위 사람들도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얘기 아닐까? 나로서는 그런 모습이 진정으로 부러웠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공동체의 가치관이 '눈에 보이지 않는 강제'에 의해 개인에게까지 침투된 결과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내게 그 모습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최인훈의 <광장>에서 이명준이 끝내 만나지 못했던 그 '광장'이 이곳 모스크바에서는 그냥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 아닌가?

쏘련에 들어온 후 쏘련 체제와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깔보는 듯한 느낌까지 갖게 되었던 내게 그 노부부의 모습은 이런 점에서 새로운 충격이었다. 나는 모스크바의 거리를 여기저기 다니면서 비슷한 충격을 연달아 경험해야 했다.

모스크바에 처음 도착해서 들은 일본인 관광객의 사례도 있고 또 비용 부담이란 점에서도 나는 택시보다는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디알로그 직원들이 승용차에 태워주는 경우 외에는 모두 대중교통을 이용했던 것 같다. 전부터 명성을 익히 듣고 있었던 모스크바의 지하철은 내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우선 놀란 것은 지하철 플랫폼의 깊이였다. 내가 서울에서 본 지하철 역 플랫폼 가운데 가장 땅속 깊이 들어가는 곳은 이화여대역이었다. 하지만 모스크바의 지하철 역들은 대부분 그보다 훨씬 깊었다. 전쟁 특히 핵전쟁에 대비해서 대피호를 겸한 용도였다고 하니 이해할 만했지만, 아무튼 그렇게 깊은 지하철역이 존재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게다가 그렇게 깊이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는 왜 그리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지... 서울 지하철의 에스컬레이터에 비해 역시 두 배 가량 빠른 것 같았다. 나중에 디알로그 M이사에게 "그렇게 에스컬레이터가 빨라도 불편하지 않으냐?"고 물어봤더니 "할머니들도 불편없이 잘 이용한다"고 가볍게 일축해서 나를 무안하게 만들었다.

빠른 것은 또 있었다. 지하철 차량 출입문의 열리고 닫히는 속도가 그것이었다. 우리나라 지하철 차량과 달리 문이나 내부 장식에 목재를 많이 사용한 것 같았는데, 그 출입문의 닫히는 속도와 위력이 장난 아니었다. 쾅~ 만일 출입문 두 쪽이 딱 부딪히는 그 지점에 목이라도 대고 있다면 그대로 부러질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정말 놀란 것은 지하철의 운행 간격이었다. 휴일이 아닌 평일 낮 12시쯤에 지하철 역에서 사람을 만나기로 하고, 플랫폼에서 기다린 적이 있었다. 약속 장소에 좀 일찍 도착해서 20분 가량 기다리는데 느낌이 어쩐지 이상했다. 일일이 시간을 재본 것은 아니었지만, 지하철 차량이 도착하는 빈도가 너무 잦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서울 지하철의 경우 출퇴근 시간에도 지하철 차량이 그렇게 자주 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한쪽 방향에서 오는 차량이 몇 분 간격으로 도착하는지 체크해봤더니 정확하게 2분에 한 대씩 차량이 도착하는 것이었다. 러시아워도 아닌 평일 낮 12시쯤에 이렇게 지하철을 자주 운행하다니? 이걸 갖고 M이사에게 물어봤다.

"이렇게 지하철을 자주 운행해도 상관 없나?"

그러자 M 이사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앞에 가는 차량에 문제가 생기면 뒤에 오는 차량이 자동으로 속도를 늦추거나 정지하도록 시스템이 되어있기 때문에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모스크바 지하철 생긴 이래로 단 한번도 그런 사고가 난 적이 없다. 그러니 그렇게 자주 운행해도 문제가 없다."

내 질문의 요지는 "사람들이 별로 많이 다니지도 않는 평일 낮에 저렇게 지하철을 자주 운행해도 '경제적으로' 별 문제가 없느냐?" 하는 것이었는데, M에게는 내 질문의 의도가 전혀 다르게 전달된 것이다. 생각해보면 지하철 운행간격에서 경제성을 먼저 고려한 나의 질문보다 '당연하게' 승객들의 안전 문제를 먼저 떠올린 M의 대답이 더 올바른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약간 특이한 의미의 우문현답이었다고나 할까.

생각해보면 그때 평일 낮 모스크바 지하철 차량은 결코 한산하지 않았다. 미어터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빈 자리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고 차량 하나에 서 있는 승객이 10여명은 됐던 것 같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평일 대낮에 일하지 않고 빈둥빈둥(?) 지하철 타고 돌아다니는 인간들이 왜 그렇게 많았을까?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때 그 모스크바 지하철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딱히 업무차 돌아다니는 사람들 같아 보이지는 않았는데...

모스크바 지하철의 차표는 그냥 '동전'이었다. 쏘련에서 이용하는 공식 동전을 개찰구 구멍에 넣으면 통과하게 되는 것이다. 서울 지하철에서 종이 티켓을 이용하던 내게는 그것도 참 신기하게 보였다. 만일 차비를 인상할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동전을 두 개 넣어야 하나? 그것은 차비를 무조건 100% 인상해야 한다는 의미 아닐까? 이 문제도 M에게 물어봤는데, M은 이 질문의 의도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하는 것을 봐서 그렇게 짐작했다.

지하철처럼 자주 이용하지는 않았지만 시내버스를 탄 적도 있었다. 이때는 디알로그의 젊은 직원 S와 동행했다.

S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버스비를 내지 않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었는데 어느새 버스비를 내도록 되었다"며 분개하며 말했다. 세상이 갈수록 타락해간다는 듯한, 일종의 도덕적 분노가 느껴지는 어조였다. S는 버스표라며 조잡한 갱지(70년대까지 우리나라에서 '시험지'라고 불렀던)에 역시 조잡한 글씨가 인쇄된, 과거 우리나라 버스 회수권 2배 정도 크기의 종이를 나에게 주었다. 옛날 우리나라 버스 회수권은 그래도 컬러 인쇄였는데, 모스크바 시내버스 차표는 그냥 중고등학교 시험지을 가위로 대충 자른듯한 느낌의 조잡한 흑백 인쇄였다.

그런데, 이 차표를 누구에게 내는 것일까? 붐비는 버스 안에서 내릴 때가 되어 S의 눈치를 봤더니 그는 사람들을 밀치며 버스 창문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버스 창문 쪽에는 묘하게 생긴 장치가 붙어 있었다. 종이 구멍을 뚫는 일종의 펀치가 거기 장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즉, 버스에 탄 사람들은 자신의 표를 그 펀치로 구멍을 뚫어야 했다. 그렇게 차표 한 장에 구멍을 뚫으면 버스에 한번 탔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그 차표는 버리면 되는 것이다. 물론, 그 종이에 구멍을 뚫는지를 살피는 사람은 없었다. 버스에서 내리려는 사람들은 서로 밀치며 그 펀치로 가까이 가서 구멍을 뚫고 있었다.

나는 궁금했지만 S에게 차마 "(양심 불량인) 사람들이 차표에 구멍을 뚫지 않고 내리면 어떻게 하느냐? 아니, 아예 차표 없이 차를 타도 누구 하나 점검하는 사람이 없던데, 그걸 악용하는 사람은 없느냐?"고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내가 살아온 생활, 내가 살아온 사회가 어떤 것인지 폭로되는 것 같아서 창피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정말 모스크바에 대해, 쏘련에 대해, 사회주의에 사는 사람들에게 놀란 사건은 따로 있었다.

어느날 취재를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숙소에 돌아와 내 방의 문을 열었더니, 이게 웬일인가?

내 방에는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 한눈에 봐도 노동자거나 농부의 행색인, 일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앉아 있었다. 나는 처음에 내가 방을 잘못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을 닫고 방번호를 확인했더니, 이건 분명 내가 그 날 아침 문을 닫고 나왔던 바로 그 방이었다. 이게 말이 되는가?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다시 방문을 열고 들어가 그 사람들에게 손짓 발짓으로 "여기는 내 방이다. 나가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그 사람들도 일제히 나서서 역시 손짓발짓으로 나에게 뭐라고 이런저런 설명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도무지 이야기가 될 리 없었다. 나는 결국 밖으로 나와, 내게 싱긋싱긋 웃어주던 그 아주머니, 호텔메이드를 찾았다.

그 호텔메이드가 불러서 찾아온 다른 숙소 직원까지 나서서 손짓 발짓과 짧은 영어로 대충 소통해서 내가 이해한 스토리는 다음과 같았다.

"지금 당신 방에 들어온 사람들은 시골에서 휴가를 위해 모스크바로 올라온 일가족이다. 멀리서 온 사람들이다. 당신의 다른 일행들이 모두 귀국해서 당신은 혼자서 넓은 방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 '당연히' 당신에게 좀더 좁은 방을 주고, 수가 많은 이 가족들에게 당신의 큰 방을 배정한 것이다."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지만, 사실 뭐라고 반박할 말이 없었다. 원래는, 방을 옮기더라도 나에게 사전에 양해를 구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하지만 이들에게는 그런 식의 절차보다는 '넓은 방은 많은 수의 가족에게, 혼자 머무는 사람에게는 좁은 방을'이라는 원칙이 훨씬 더 분명하고 공정한 원칙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그렇게 평생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내 의사와 무관하게 좁은 방으로 옮겨진 것도 언짢은 일이었지만 내게는 더욱 신경쓰이는 일이 있었다. 바로 내 짐이었다.

혼자서 넓은 방에서 며칠동안 계속 머물다 보니 나는 짐을 거의 정리하지 않고 숙소 여기저기에 대충 팽개치고 나온 상태였다. 이런저런 기념품과 양담배 심지어 거의 손대지 않은 달러를 넣어둔 가방도 활짝 열어놓고 다녔던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기념품 등이야 누가 좀 가져가도 별로 억울할 게 없지만, 달러 현금이 없어지기라도 하면 난처한 일이었다. 통역료도 그렇고 모스크바에서 당분간 돈 쓸 일이 꽤 많을 텐데...

인상을 쓰면서 새로 주어진 방으로 들어가보니 내 짐들은 비교적 잘 꾸려져서 한쪽에 정리돼 있었다. 나는 그 아줌마 호텔메이드에게 잔뜩 인상을 써주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허겁지겁 내 가방을 풀어헤쳐서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내가 모스크바에서 받은 충격의 핵심에는 바로 그 때의 그 느낌이 자리잡고 있다. 정말, 너무 완벽하게 내 짐이 단 하나도 사라지거나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잘 정리돼 있었던 것이다. 열어서 절반쯤 피운 담배갑의 담배도 그대로 (몇 개피 남았는지 세어뒀던 것은 아니지만) 옮겨놓은 것 같았다. 벗어놓은 속옷이나 양말도, 봉지에 잘 넣어져 있었다. 달러는? 그대로 있었다. 꽤 두툼한 봉투였고 눈에 띄는 곳에 두었는데, 열어본 흔적은 없었다.

그때의 부끄러운 심정... 그저 부끄럽다는 말 외에는 내 자신을 뭐라고 형언할 방법이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