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훈교수-경찰력에 의존하는 정권은 민중과 공존할 수 없어
 
1. 경찰국가(Polizeistaat)와 노무현 정권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을 끝까지 추적하는 자벨 형사는 경찰국가(Polizeistaat)에 대한 상징적인 인물이다. 도시의 외곽인 성(bourg)를 경계로 살았던 상인 및 중인계급에서 자본가들이 분화해서 상층부를 형성하고, 노동자 계급의 분화가 시작된 17~18세기의 유럽 사회를 분석할 때 ‘경찰국가’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되는데, 실제로 비밀경찰의 원조는 유럽에서 중앙형 근대국가를 가장 먼저 형성한 프랑스라고 할 수 있다.
 
파시즘과 인종주의가 환상적으로 결합해서 결국 2차 세계대전으로 달려나가던 파시즘의 시대는 외부로는 군사주의 그리고 내부로는 경찰국가의 시대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이 시기에 한국도 일본 순사들의 식민지형 경찰국가를 거쳤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2.

그러나 경제학에서는 ‘경찰’에 관한 은유들은 자유주의적 시각과 결합되고, 국가의 최소한의 역할을 얘기할 때 경찰과 치안에 관한 이야기들을 한다. 이는 최초의 사회계약론인 홉스에서 아담 스미스에 이르기까지 대체적으로 비슷하고, 아주 최근의 신자유주의인 로버트 노직의 ‘경찰국가론’으로 넘어오더라도 마찬가지이다. 국가가 능력에 안 맞게 이것저것 하겠다고 그러지말고, 공공의 최소한의 질서유지를 위한 경찰 역할이나 하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극단적인 정부의 시장에 대한 방임 즉 lassez-faire의 상태를 지향하는 ‘작은 정부’라는 의미에서 경찰국가라는 말이 사용된다. 노직에게 있어서 국가는 그야말로 ‘세콤’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마피아나 이런저런 집단 중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치안유지를 가장 잘 하는 ‘쎈 넘’이 바로 정부였고, 그래서 이런 ‘공폭력(public violence)’을 행사할 수 있게 된 집단이 바로 국가라고 이해할 수 있다.
 
대체적으로 자유주의 계열의 경제학자들은 국가에 의한 전쟁을 반대하는 대신에 질서유지로서의 경찰의 역할은 긍정하는 편이다.
 
3.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검사와의 대화’라는 걸 한 적이 있다. 강금실 전장관과 노무현 대통령이 ‘젊은 평감사들’과 논쟁했던 이 시기는 불과 3년 전의 일이지만, 정말 까마득한 먼 옛날의 일로만 느껴진다. 이 정부에게도 그런 시기가 있었다. 힘을 밑으로 내려주고, 경찰과 검찰 그리고 판사 사이에 발생하는 견제와 균형에 의해서 적절한 해법을 찾아나가는 방향으로 진화하게 될 것이라고 사람들이 희망을 갖던 그런 시기가 분명히 이 정부에도 있었던 것 같다. 그 당시에 이 ‘참여정부’라고 불리고 싶었던 사람들이 이렇게 이상하게 변질되고 ‘닫힌 구조’로 자신들만의 공화국을 만들 것이라고 예상하기는 쉽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면, 백 가지 이상의 이유들을 찾을 수 있겠지만, 확실한 것은 노무현 정부의 지금 모습은 경찰국가와 매우 비슷한 모습을 가지고 있고, 사실상 경찰들의 힘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질문했을 때 딱히 아니라고 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비정규직과 관련된 KTX 여승무원 사건이 중간의 한 점화점이 된 셈이지만, 화물연대와 포항의 건설일용직을 비롯한 비정규직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힘으로 맞섰고, 정책이라는 것은 거의 존재한 바가 없다. 이 와중에 전체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으로 전환되는 일이 벌어졌고, 노무현 시기를 역사적으로 평가한다면 비정규직들에게는 지옥이 펼쳐진 시간으로 이해될 것이다.
 
농민들은 사망자의 숫자로 세는 것이 더 빠를 것이고, 대규모 시위가 한 번씩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죽어나갔던 것이 노무현 시기의 농민들이 살아온 현실이다.
 
철저하게 침묵 속에서 가려진 하중근씨의 죽음은 그래서 더욱 마음 아픈 일이다.
 
선생님들 역시 이상한 계산으로 만들어진 자신들의 구조조정과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관점에서 이미 경찰들의 통제 대상으로 전락해버린 것 같다.
 
한미 FTA를 추진하면서 노무현 정부의 경찰국가로의 전환은 매우 빠르고 구조적으로 진행되었고, 이제 정권 초기에 내걸었던 대화와 타협 같은 것은 머리 속 아련한 기억 속에 노스탈지아 같은 것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대화의 여지가 없는 사안들이 너무 많다. FTA가 그렇고 농민들의 몰락이 그렇고, 정규직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지만, 이런 것들을 내리누르는 정부의 힘은 그야말로 전경들일 뿐이다.
 
4.

제주도 FTA 집회에 대해서 일절 허가를 내주지 않은 것은 보통의 경우 이례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미 대추리에서 행정대집행이라고 부르는 강제수용 과정에서 군대도 동원한 적이 있는 이 정권에서는 자연스러운 균형이라는 것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이다.
 
▲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은 20일 서울지방경찰청 앞 기자회견에서 22일 민중총궐기대회를 금지시킨 경찰에 강력히 항의했다.     © 대자보
 
제일 치졸한 것은 도심 교통을 거론하면서 도심 집회를 불허할 것을 행정행위로 포장하는 일이다. 물론 교통 문제가 생기는 것은 맞지만, 전후 맥락을 짚어보면 특별히 더 교통의 문제로 지금 집회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경찰국가로 전환하다보니까 핑계거리로 교통 문제를 제기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그렇게 교통 문제의 심각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권에서 구조적이고 심각한 교통 문제를 발생시킬 것이 뻔한 서울 및 수도권 고밀화 대책을 바로 그 시기에 정책이라고 내밀고 있는 것들을 보면 말이다.
 
본질적으로 노무현 정권은 여러 가지 불만에 대한 에너지들을 경찰의 힘으로 막으면서 버틴 셈인데, 정권 마지막 1년은 믿을 것은 경찰 밖에 없다고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는 셈이다. 그래서 도시교통을 문제 삼으면서 집회를 불어하기 위한 최근 진행되는 일련의 흐름은 어느 정도로 이 정권이 경찰국가에 가깝게 갔는가를 보여주는 예비 지표 같은 것이다.
 
5. 오, 꽃병!

병에 꽃을 담아서 던지거나 아니면 꽃으로 병을 만들면 좋겠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는 말에는 동의한다. 그래서 말 그대로 꽃병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다.
 
나도 폭력은 싫어하지만, 사실상 ‘공폭력’으로 정권의 마지막 보루를 삼는 이 정권의 반민중성에 대한 해답은 무엇인지 그리고 이 사회가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나가게 될 것인지를 주의해서 쳐다보는 중인데, 점점 더 노골적으로 경찰국가로서의 자신의 본질을 수정해나가는 중이라고 생각하지 않기가 어렵다.
 
질문 하나를 던져보자. 과연 노무현 정권과 민중은 공존할 수 있는가?

적어도 한미 FTA라는 외부수단을 통해서 국내 개혁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 한에서는 정권과 민중은 공존이 불가능하다. 정권이 끝날 때까지도 이 급하고 빠른 변화를 밀고 나가겠다는 것은 정권 차원의 선택이지만, 그냥 죽지 못하겠다고 생존권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요구는 정권보다 더 애타는 요구이다. 이 두 개의 힘이 부딪힐 때, 어떠한 정치적이고 정책적인 해법도 없다면 남은 것은 경찰의 힘 뿐이다.
 
그리고 지금 노무현 정권이 선택한 것이 바로 이 경찰력의 힘인 셈이다. 그래서 충돌은 불가피하다. 민중과 현 정권은 공존할 수 없는 선을 넘어선 상태이다.
 
여기에 수도권 과밀화로 부동산 문제를 풀겠다는 정권의 해법은 노태우 이전 시기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노태우에서 DJ까지 이어지는 정권이 경기도에 죽어라고 집짓는 간단한 해법을 몰라서 수도권 총량제를 도입한 것은 아니다. 지방도 먹고 살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있던 제도였는데, 경기도와 서울의 생태적 문제는 또 다른 문제라고 하더라도, 현 상황에서 지방에 거주하는 민중들과 정권과의 관계도 이제는 공존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더 이상한 것은 이 정권이 행정수도 이전으로 지역 경제를 살리겠다는 명분으로 집권한 정권이라는 점이 현 상황을 더욱 아이러니하게 만든다.
 
물리적으로는 꽃병이 등장해도 벌써 등장했을 상황이지만, 그러지 않는 것은 더 민주적이거나 더 민중적인 정권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경찰의 힘이 비대칭적으로 너무 커졌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6. 폴리차이슈타트!

경찰력으로 정권을 지키는 경찰국가라는 의미의 폴리차이슈타트로 노무현 정권이 변질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혼란스럽더라도 대화와 타협 혹은 토론 같은 것을 통해서 하나씩 결정하는 과정을 밟았더라면, 비록 효율은 떨어지더라도 새로운 역사적 전기를 우리 사회가 가질 수도 있었던 순간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새만금, 부안, 그리고 천성산 같은 것들은 초기부터 공작으로 일관해온 정권이 FTA와 비정규직 문제를 공작정치 같은 것으로 해결하려다가 민중들의 저항에 부딪힌 셈이고, 그래서 바로 물리적인 경찰력에 기대게 된 것이 현상황인 것 같다.
 
공작과 힘이 정권의 실체가 된 상황을 보면서 노무현식 폴라차이슈타트(Polizeistaat)가 만개하는 걸 보게되니,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된다.
 
“힘으로 흥한 자, 힘으로 망한다”는 옛 경구를 들려주고 싶다. 10%의 지지율로 통치하고자 하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남은 것은 경찰력 밖에 없는 셈인데, 앞으로의 1년을 경찰력으로 힘들을 누르겠다는 이 전략 뒤에 남은 것은 너무 많은 목숨과 희생일 뿐이다.
 
자꾸 보수신문 핑계를 대지만, 경찰력으로 통치하는 경찰국가로 정권이 전환된 스스로 그렇게 간 것이지, 신문들이 그렇게 하라고 주문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왜 진심을 몰라주느냐고 하고 싶겠지만, 정권이 떠나도 한미 FTA를 비롯한 정권이 한 일들의 폐해는 사라지지 않는데, 지금 여기서 밀릴 수 없는 것이 이 땅의 민중들의 서러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