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 최 노인은 60세가 좀 넘은, 조선인 2세라고 했다. 스탈린 시대에 극동에서 중앙아시아 쪽으로 이주한 조선인 부모가 자신을 낳았다고 했다. 사실 노인이라곤 했지만 실제 얼굴은 노년 초입에 접어드는 장년이라고나 할 인상이었다.

통역료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데 아마 하루에 15달러 정도 주지 않았나 싶다. 최 노인 말로 서울에서 온 사람들 통역을 맡으면 보통 그 정도 받는다고 했다.

내가 소프트웨어 전시회에서 수집한 자료를 기반으로 디알로그 관계자와 상의해서 취재 대상 업체를 선정하면, 이들 업체에게 전화해서 취재 약속을 잡는 등의 일은 최 노인이 맡았다. 취재 약속이 잡히면 정해진 시간에 내가 최 노인과 동행해서 해당 업체를 방문하고 인터뷰이와 인터뷰를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최 노인은 내가 쏘련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먼저, 가장 빠르게 자본주의의 물에 오염된 것처럼 보인 인물이었다. 말투, 태도, 표정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별히 행동에 문제가 있다거나 악의가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묘하게 부패한 느낌, 야비한 느낌, 비굴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도무지 근거를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었는데, 어느날 이 분과 어떤 파티 자리에 갔다가 내 느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이틀에 한 번 정도는 디알로그를 찾아갔다. 취재 약속을 잡기 위해서도 협조를 얻어야 했지만 그게 아니라도 빈 시간에는 찾아가곤 했다. 하루 종일 취재 약속이 잡히는 것도 아니고 하루에 두세 건, 많아야 서너 건 정도 인터뷰 약속이 잡히는데, 빈 시간이 한두 시간 정도라면 몰라도 서너 시간씩 빈 시간에는 숙소에서 죽치기도 애매했기 때문이다. 아침은 숙소에서 먹었지만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디알로그 직원들과 하는 경우도 꽤 있었다. 최 노인은 나와 동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루는 디알로그의 젊은 이사 M이 나에게 "오늘 중요한 사람이 주최하는 파티가 있으니 함께 가자"고 제의했다. 대충 이야기를 들어보니 쏘련 컴퓨터 분야에서 상당히 중요한 정부 인물이라는데, 정확한 직책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장차관급은 아니었고, 지금 생각해보니 산하기구의 책임자 정도 아니었나 싶다. 그래도 직급에 비해 컴퓨터 분야에 미치는 영향력은 상당한 것 같았다. 마침 빈 시간이 있어서 나는 동행하기로 했다.

M과 나, 그리고 최노인이 차를 타고 찾아간 곳은 10층 정도 높이로 호텔처럼 보이는 건물이었다. 둔중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그다지 넓지 않은 방으로 들어가니 부페 식으로 음식이 차려져 있고 벌써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먹고 마시면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시간은 점심 때에서 한두 시간이 지난, 대낮이었다. 우리나라 컴퓨터 산업계도 호텔에서 이런 파티를 열곤 했지만, 대개 저녁 시간에 행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렇게 벌건 대낮에 파티를 열고 사람들이 술에 취해 있는 경우는 못 본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벌써 거나하게 취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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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중요 정치인들의 캐리커처가 이미 모스크바 길거리에서 팔리고 있더군요.


M이 나를 데리고 그 자리의 호스트라고 할 수 있는 그 중요 인물에게 인사를 시켰다. 나야 말이 통하지 않으니 명함을 건네주고 간단하게 영어로 인사만 건넸는데, M이 유력인사에게 뭐라고 내 소개를 하는 것 같았다. 그 유력인사는 사실 내가 인사를 건넬 때도 술이 거나해진 탓인지 이미 얼굴이 벌건 모습이었는데, M이 뭐라고 나를 가리키며 이야기를 하자 갑자기 얼굴이 더 벌개지며 폭소를 터뜨리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M에게 뭐라고 빠른 러시아 말로 떠들어대는데, 내가 그 발언의 의미를 알아챌 수는 없지만 결코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내가 "쏘련 인민 대중은 건강한데, 지도층이 썩어서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은 당시 파티의 경험도 영향을 주었다. 그 날 파티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어떤 기준으로 봐도 당시 쏘련에서 평범한 노동대중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옷차림이나 행색도 그러했고, 태도에서도 그런 여유 같은 게 느껴졌다. 대낮부터 그런 파티에 참석한다는 것 자체도 일반 노동대중에게는 상상하기 힘든 일 아니었을까? 그 자리의 주빈이라고 하는 사람의 태도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술에 취해서 낄낄대는 모습이라니... 우리나라 고급 공무원들에 대해서도 좋은 인상을 가진 적이 없지만 적어도 그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대낮부터 취해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공무원들은 없었다.

그 주빈과 인사를 마치고 한쪽에 물러서서 살펴보니 최 노인은 다른 것은 일체 신경쓰지 않고 오직 '먹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집중'한다는 표현이 적당할 수밖에 없는 게, 파티 자리에서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체면 그런 것 일체 신경쓰지 않고 오직 먹는 것 하나에만 주력하는 사람의 모습은 나로서는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최 노인은 그렇게 부지런히 먹다가 문득 고개를 나를 보더니 손짓을 해서 불렀다.

"D선생님(나를 그렇게 불렀다), 이거 굉장히 귀한 음식들입니다. 많이 드십시오. 쏘련에서 이거 일반 사람들 구경도 못하는 음식들입니다. 저는 이런 음식 처음 먹어봅니다."

나로서는 그 음식들이 뭐가 신기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정말 보지 못했던 음식들은 있었다. 바로 캐비어였다.

서울에서도 호텔 파티 등에서 캐비어를 구경하기는 했지만 대개 한 가지 색의 캐비어밖에 보지 못했다. 그래서 으레 캐비어는 그런 색깔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파티 자리에 올라와있는 캐비어는 적게 잡아도 10가지 정도는 되어 보였다. 모양도, 색깔도 무척 다양했다. 하긴, 당시로서는 그게 다 캐비어라고 쉽게 생각했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냥 다양한 생선알 요리였을 뿐인데 내가 오해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로서는 처음 보는 다양한 생선알들이었고, 그런 음식은 그 뒤로는 구경해보지 못했다.

음식의 종류야 둘째 치고, 최 노인의 그런 식탐은 사실 불쾌했다. 서글픈 생각도 들고, 쏘련의 민망한 현실을 보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단 맛을 본 사람들이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 것인지를 실감했달까? 내가 최 노인에게 느낀 불쾌감의 정체가 이것이었던 것 같다.

최 노인과 이삼일 정도 쏘련 소프트웨어 업체들의 취재를 다니다가 나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다.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점점 취재를 진행할수록 최 노인이 도대체 제대로 통역을 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워졌던 것이다.

원래 컴퓨터나 소프트웨어 쪽에는 어려운 전문용어가 많고, 나는 이 분야의 전공도 아니고 사전 지식도 거의 없는 편이어서 국내에서 취재를 진행할 때도 취재원이 말하는 용어를 100% 알아듣기는 어려웠다. 다만 대부분의 컴퓨터 용어가 영어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이해는 할 수 있었고 그래서 일단 적어두었다가 정 모르는 용어는 나중에 선배들에게 물어서 이해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하지만 최 노인의 통역은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나름 노력을 하며 최 노인이 통역하는 말을 취재노트에 받아 적었는데, 점점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나중에는 내가 최 노인의 통역을 도중에 중단시키고 확인해서 물어보았다.

"방금 말씀하신 용어가 뭐였죠?"

"글쎄, 이 분은 란, 란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 선생님?"

란? 아무래도 직접 쏘련의 인터뷰이에게 확인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란이 무엇이냐고 영어로 물어보았다. 그러자 인터뷰이도 뭐라고 더듬더거리며 영어로 설명하는데, 이건 장님이 장님에게 설명하는 식이어서 도무지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인터뷰이가 답답한지 펜을 들어 종이에 써주는 것을 봤더니, LAN, 바로 랜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런 제길, Local Area Network 즉 LAN을 우린 '랜'이라고 읽지만 쏘련에서는 '란'이라고 읽는 게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이 간단한 차이를 알게 되면 금방 이해하게 되지만, 알기 전에는 그 간단한 차이를 이해하기 쉽지 않다. 문제는 이렇게 요령부득의 통역이 한두 개이겠는가 하는 점이었다. 통역하는 최 노인이 잘 모르는 개념이면 인터뷰이나 나에게라도 꼬치꼬치 물어봐주면 좋을텐데, 최 노인에게 그렇게 까다로운 자본주의적 직업윤리까지 요구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랜과 란의 차이야 간단한 발음상의 문제일 뿐이지만, 생각해보니 LAN의 개념도 처음 들어보는 최 노인이 나머지 전문적인 소프트웨어 용어를 듣고 제대로 의미를 전달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한 얘기였다. 외국어 실력이라는  것이 단순한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전문지식의 존재 여부의 문제라는 것을 그때 처음 실감했다. 나중에 중국에 진출한 우리나라 기업들이 언어 소통의 필요 때문에 조선족들을 고요했다가 바로 그 언어 소통에서조차 실패했다는 얘기에 내가 깊이 공감했던 것도 바로 쏘련에서의 경험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취재 방향을 전환하기로 했다. 어차피 직접 인터뷰를 통해서 고급 정보를 얻어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가급적 취재 대상 업체들의 자료(대부분 영어로 작성돼 있었다)를 얻어서 나중에 이것을 번역하는 것으로 대충 면피만 하는 것으로 마음을 굳혔다. 비겁한 방식이었지만 당시 나로서는 다른 선택의 길이 없었다.

마음을 고쳐먹으니 한결 부담은 덜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취재를 도중에 중단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이미 상당수 업체들과 인터뷰 약속이 잡혀있는 상태라 그 약속을 다 취소하고 귀국 비행기에 오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통역 계약을 취소할 수도 없었다. 실제로 최 노인이 아니면 내가 모스크바 시내를 돌아다니는 것도 별로 자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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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길거리를 말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말을 타고 비교적 자유롭게 다녀도 길이 넓어서 불편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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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길거리에 세워진 조상들. 예술가들인 것 같았습니다만 확인은 못했습니다.
 

최 노인은 통역을 맡았던 한국인들을 통해 한국에 대해서 이것저것 들은 것이 많기도 했지만 그만큼 오해도 많았다. 자신이 통역을 맡았던 어느 대학교수 일행의 얘기를 꺼냈는데, 그 교수가 "한국 최고 대학의 교수"였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나는 서울대학교에서 온 교수라고 생각하고 한참 얘기하다 보니 그게 아니었다.

"어느 대학이라고 했다구요?"

"아, B대학이라고, 그 분이 분명 대한민국 최고 명문대학이라고 했습니다."

솔직히 말해 나는 그 대학의 이름을 그때 처음 들었다. 한국에 있는 대학의 이름을 쏘련에 와서 처음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대학이 한국 최고의 명문대학이라니... 아무튼 최 노인은 그렇게 굳게 믿고 있었다. 길게 설명해봐야 도무지 이해를 시킬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포기했지만, 우리나라의 교수니 뭐니 하는 양반들이 외국에 나가면 얼마나 파렴치한 짓들을 서슴없이 하는지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딴에는 재미있는 농담을 한다고 하면서 얼마나 낄낄거렸을까? 별 것 아닌 장난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 모스크바의 나는 한국의 B대학 교수가 했다는 그런 식의 발언이 견딜 수 없이 몰상식하게 느껴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