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두 번째 글에서 하려던 이야기는 따로 있었는데 그건 좀 다음으로 미루고 먼저 번 동서양의 비교(사실 좀 논란의 여지가 많은 주제이긴 했다)에 대해서 댓글이 꽤 달렸기에 거기에 대한 답변부터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당연히 과거 유럽 및 미국의 역사에서 신뢰와 계약을 짓밟은 경우를 찾아보면 수도 없이 많은 사례들이 쏟아져나올 것이다. 세상에 서양 사람들은 모두 원칙과 약속을 지킨다고 생각하는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약은 지켜야 한다’는 공감대 (패러다임이라고 해야 하나?) 같은 것이 더 널리 받아들여진 것은 이쪽 문화권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나는 적어도 사람이 약속에 목매다는 것은 바보짓이다라는 가르침 - 미생지신(尾生之信) - 을 서양 문화권에서는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중국고사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신념을 지켜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찾아볼 수 있는 예가 정말 있었던가? 글쎄... 지금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굳이 찾아본다면 ‘남아일언중천금’이란 말은 있었군. 남녀차별 문제는 넘어간다 하더라도... 남자도 천금을 준다면 자신이 한 말을 뒤집을 수 있다는 식으로 해석한다면 좀 악의적일까? ^^

그 원인에 대해선 미투라고라님 글 - 중국에선 중앙집권적 정치체제가 강했고 서양에선 계약문화가 발달했다 - 에 대체로 동감하는데... 또 그 근본원인을 따지면 더 복잡해지니까 넘어가겠다. 아무튼 내가 관심있는 건 그로 인해 나타나는 양상들이다.

1. 춘추천국시대의 전쟁 양상을 보자. 두 나라가 전쟁을 한다. 한 나라가 이긴다. 그러면 진 나라는 땅을 떼어주고 화해를 청한다. 그러면 이긴 나라는 그 얻은 땅을 통해서 국력이 더 강해진다. 그러면 더 강해진 국력을 가지고 다시 쳐들어간다. 또 이긴다... 거의 모두가 이 스토리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의 명분이라는 건 그야말로 만들어내면 그만이다. 이렇게 되면 결과는 양의 되먹임이 될 수밖에 없다. 강한 나라는 더욱 강해지고 약한 나라는 더 약해지는... 결국 진나라가 천하통일을 한 것도 이런 식이다. ‘춘추시대에 의로운 전쟁은 단 한번도 없었다’는 소리는 맹자가 했던가...

2. 더 문제가 되는 건 이런 식으로 정벌된 국가에 대한 가혹행위이다. 여기서 생각나는 건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서 안드레이 공작이 피에르에게 자기 생각을 말하는 부분이다. “적장에 대한 예우? 인도적 대우? 웃기지 말라고 하게. 전쟁을 벌이면 이긴 편은 진 쪽의 황제부터 장군들까지 전부 처형해야 하네. 병졸들은 죽는데 왜 장군들은 지고 나서도 예우를 받겠다는 것인가? 전쟁에서 지면 자신도 죽는다는 걸 알아야 전쟁을 시작할 때 그들도 다시 한번 생각을 할 거야.” 물론 이는 전쟁이 싫다는 표현을 역설적으로 한 것이다. 하지만... 톨스토이가 중국 전쟁사를 봤다면 같은 소리를 했을지 의문이다. 거기선 안드레이의 소망대로 전쟁에서 진 나라 왕과 장군들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빈도는 그다지 낮아진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3.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이 남만을 정복하러 갔다. 맹획을 칠종칠금하는 과정에서 등갑군이라는 존재가 있었는데 그들의 등나무로 만든 갑옷은 튼튼해서 창칼이 들어가지 않는데다가 가벼워서 물에도 뜨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물에 강하면 불에 약하다”는 음양오행설에 입각한 공격법을 개발해서 그 일족을 전부 다 불에 태워버렸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 불에 타 죽는 것을 보고 제갈량이 슬퍼하며 찔찔 우니까 (고전적 의미에서 악어의 눈물이라 할 수 있다. -_-) 옆에 있던 조운이 위로랍시고 하는 말이 “야만인들에게 황제의 덕을 전달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니 그들을 다 죽인다 해도 조금도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한다. 더 재미있는 것은 그 구절이 나관중의 진짜 삼국지에는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본의 어떤 작가가 삼국지를 묘하게 변형시켜 앞뒤로 이상한 내용을 붙여 늘여놨는데 (내 보기엔 이야기를 엉뚱하게 더 망쳐 놨을 뿐이다) 거기에서 이 말이 나온다. 자, 이 일본 작가께서는 중국사람들이 황제의 덕을 전달하기 위해 그곳으로 쳐들어가면 뭐라고 할까?

4. 중국의 무협지나 영화를 보면 강자 앞에서 헤헤 웃으며 비굴하게 아첨하는 민초들이 거의 빠지지 않고 조연으로 나온다. 이 사람들은 그게 웃음을 유발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모르겠다. 내가 보기엔 그냥 역겨울 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