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아니, 벌써 한물 간건가?)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겨우 다 읽었다. 업무랑 겹쳐서 생각만큼 빠르게 끝내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뒷부분을 읽다가 앞부분을 잊어버릴 정도로 진행이 늦어지지는 않았다. 생각난 김에 내용 잊어버리기 전에 간략한 독후감이나 적어볼까 한다.

많은 내용을 말하고는 있는데 사실 내 흥미를 끌었던 것은 칸트의 자유개념에 대한 부분이었다. 이전에 칸트 관련 서적을 읽어보기는 했지만 주로 순수이성비판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그의 도덕철학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무심했었는데 이번에 저자의 알기 쉬운 설명과 예증을 읽고 나니 새삼 내용이 확하고 다가온다.

얼마 전 이덕하님이 칸트철학이 횡설수설이라는 글을 올렸다가 이 말에 흥분(?)하신 빅월드님과 논전을 벌인 적도 있었지. 당시 나도 몇마디 참견한 적 있지만 이 책에서 읽은 내용을 당시에 알았더라면 좀 다르게 이야기했을 것 같기도 하다.

책을 본 사람들은 이해했을 테고 그렇지 않더라도 아는 사람이 많겠지만 칸트에 있어서 자유라는 개념은 그냥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게 아니다. 배고플 때 음식을 먹고 목마를 때 물을 마시는 것은 동물적 본능에 지배받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높은 빌딩에서 떨어지는 사람이 중력에 지배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유롭다고 할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진정한 자유라는 것은 이성에 따라 판단하고 스스로 세운 원칙에 따라 행동하고... 뭐 대충 이런 내용인데 이를 보고 나서 내가 떠올린 것은 좀 엉뚱하게도 키플링의 정글북이었다.

소설의 내용은 누구나 아는 그대로... 어떤 인간의 아이가 늑대 무리에 섞여서 자라나다가 인간 세계와 여러 동물들의 세계를 왔다갔다 하고 원수와 은혜를 갚으면서 이리저리 활약한다는 모험담... 동물들간의 대화에서 you 대신에 thou를 쓰는 등 고어를 섞어가면서 나름 장중한 표현을 하느라 노력은 무지 하더군... ㅋ 솔직히 아주 거지같다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내가 그다지 좋아하는 소설은 아니다. 우선 주인공 모글리에게 주어진 혜택이 너무 많아서 그의 적들에게는 처음부터 불공평한 승부다. 머리 좋고 무기 쓸 줄 아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모든 동물들은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어떤 비단뱀은 최면술 비슷한 걸 써서 다른 동물들을 홀리게 하기도 하는데 이것도 주인공에게만은 통하지 않는다. 거기다가 이 친구 불도 쓸 줄 아는데 이것만 한번 손에 들었다 하면 그를 둘러싸고 있던 수천 마리의 적대적인 동물들이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한다. 좀 몸집이 자란 후에 “이제는 힘으로도 정글에서 모글리를 당해낼 동물은 없었다”는 귀절까지 나오더군. 이건 타잔도 해내지 못한 일이다.

가만, 내가 이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그렇지. 거기선 늑대들이 자신을 ‘자유로운 종족’이라고 자칭한다. 그런데 여기서 자유롭다는 것은 호랑이 같은 강한 맹수들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흑표범 바기라가 모글리를 살리기 위해 늑대들에게 황소 한 마리를 기증한 바 있다. 그런데 나중에 다시 모글리를 죽이느니 마느니 하는 논쟁이 일자 바기라가 그때의 약속을 언급한다. 늑대들은 10년 전에 이미 먹어버린 소가 무슨 구속력이 있냐며 코웃음을 친다. 그러자 바기라가 흥분한다. “너희 스스로 정한 약속을 어기겠다는 것이냐? 그러고도 너희들이 자유로운 종족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여기서 말하는 자유가 바로 칸트식의 자유개념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실 이것만이 아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 오만과 편견, 센스 앤 센서빌리티, 맨스필드 파크 등 - 들에선 착한 인물들과 악역들이 비교적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다. 그런데 악역이라고 해서 사람을 죽이거나 고의로 괴롭히는 그런 악행을 하는 건 물론 아니다. 그러면 주인공을 비롯한 착한 인물들은 어떤 점에서 악역들과 구분되는가? 이 점은 작가가 분명히 언급을 해주고 있다. ‘원칙을 지키려는 의지의 유무’ 이것이다. 여기서의 원칙이란 분명히 자기 스스로 설정한 원칙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역시 칸트의 자유 개념과 통하는 게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칸트가 독자적으로 생각해 낸게 아니라 중세 내지 근세를 통하여 유럽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도덕 개념이었을지도 모른다.

반면에 동양의 사고방식은 어떤가? 정치를 하는 사람이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기 자신이 정한 원칙을 지키려 하는 상황을 일컫는 용어가 있기는 하다. 바로... 송양지인(宋襄之仁). 분명히 이는 긍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비웃는 표현이다. 그런 것은 세상에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짓이라는 뜻이다. 병불염사(兵不厭詐, 전쟁에 임해서 적에게 속임수를 쓰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라는 사고방식은 모든 도덕률의 앞에 자리잡고 있다. 글쎄... 내가 이것 하나만 가지고 서양이 더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회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편전쟁 때 중국에서는 서양인들이 한번 우세를 차지하면 끝까지 자신들의 골수를 빨아먹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종전 이후 이들이 조약을 철저하게 지켜 군대를 철수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한번 곱씹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하려는 이야기가 좀 더 있었는데 아무래도 둘로 나눠야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