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추억' 은 브람스의 피아노 곡 "네 손을 위한 판타지"를 탄생시킨 시와 민요들을 통칭하는 제명이며
이 곡의 부제처럼 되어있다. 본래 5곡인데 음반에는 첫 곡이 제외되고 4곡만 차례로 나와있다. Souvenir de la Russie 는 직역하면
'러시아의 추억'이 되겠지만 다소 감상적 느낌을 주는 것 같아 조사를 빼기로 했다.
 네개의 곡에는 저마다 또 부제들이 딸려 있는데 이것은 바탕이 된 시나 민요의 타이틀을 그대로 살린 것이다.
처음 등장하는 2번은 '지류' 혹은 '갈래길'인데 Titoff 의 소네트가 출처이고
 3번 '그대 아직 깨어나지 않은 어스름 새벽에' 는 Warlamoff 의 담시에서,
4번 '나이팅게일' 은 A.Alabieff 의 리트에서,
5번 '커다란 마을이 길을 따라 길게 누워있다.' 는 러시아 민요에서 악상을 빌려오고 있다.
 내겐 이 5번의 부제가 유난히 흥미롭게 느껴졌다.
 
 브람스의 이 곡은 인기를 끌거나 널리 알려진 곡은 아니다. 이 LP 음반을 만나게 된 것은 오직 한 사람 연주가 때문이었다.
 빅토리아 포스트니코바.-모스크바 출신 피아니스트로 66세의 원로급? 연주가인데 서구, 특히 영국 쪽에 자자한 명성에 비하면
서울에 아직 한 차례도 왕래하지 않은 사실이 조금 아쉽게 느껴진다. 필자도 불과 4년 전 지하상가의 음반 가게에서 아주 우연히
마주쳤다. 계기가 된 것은 멘델스죤의 <무언가>.
 가게 벽에 달린 소형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었는데 댓바람에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귀기 (鬼氣)"라는
말을 그 순간 떠올렸다.
 수십번 아니 그보다 더 많이 <무언가>를 들었지만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돌아올 때 눈치 빠른 주인이 그 음반을 내게 슬쩍
건네주었다. 그 이후로 포스트니코바 음반을 두번째 건네받은 것이 바로
이 "네 손을 위한 피아노 판타지"인 '러시아 추억'이다. 함께 손을 맟춘 사람은 잘 알려진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겐나디 로쯔데
벤스키(Guennadiy Rozhdestvensky), 피아노 여걸 포스트니코바의 생의 반려자이기도 하다.

 비록 포스트니코바 음반이라 해도 한동안 쉽게 손길이 가지 않아 잊고 지냈다. 듀엣 연주곡은 모차르트 곡이라 해도 솔로곡
에 비해 웬지 싱겁다는 선입관 탓이 컸다. 또 'Souvenir de la Russie' 란 표제가 재킷에 워낙 작게 표기되어 미쳐 그걸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뒤늦게 그걸 발견하고 나는 눈이 번쩍 떠졌다.
 브람스에게 이런 작품이 있었던가? 브람스는 러시아를 여행하고 이 작품을 쓴 것일까? 여행을 하지 않았다면 어떤 동기로 이
작품을 써낸 것일까?

이태전  기후가 가장 좋다는 7월부터 9월까지 나는 모스크바와 동남부의 랴잔 지방, 그리고 톨스토이 영지인
야스나야 팔리아나를 오가며 러시아를 여행했다. 지금도 그 여행지의 풍경들이 자꾸 눈 앞에 어른거리고 나는
러시아에 대한 일종의 향수병을 앓고 있다. 여건이 허용된다면 내일이라도 그곳으로 날아가고 싶은 것이다.
 이태 전 여행에서는 고려인 작가로 잘 알려진 아나톨리 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아까강 근처 가브리노에 있
는 그의 아름다운 다차에서 함께 일주일을 보내기도 했다. 아나톨리 김의 단편 가운데
 ,<바흐를 들으며 버섯 따기>라는 작품이 있는데 다차에 머무는 동안 수차례 함깨 숲으로 가서 버섯을 따기도 했다.

 호수 건너 마을에 사는 니나네 집에 가서 삶은 계란을 맛있게 먹은 일도 있다. 집단사육이 아니고 농토에서 놓아 기르는
닭의 계란이 정말 맛있다는 걸 다시 깨달았다. 친절한 니나 할머니의 기억도 새롭지만 무엇보다 아까 강변에 있는 소도
시 카시모프를 아나톨리의 차를 타고 방문했던 일이 즐거운 기억으로 남았다. 카시모프는 터키식 회교사원과 초창기
러시아 정교회 교회당이 있는 유서깊은 소도시였다. 그곳에서 아나톨리의 친구인 사냥꾼 이바노프를 만났는데 그는
체격이 건장했으며 쉴새없이 농담을 건넸고 카시모프 도시 일원을 내게 안내하는 친절을 베풀기도 했다. 카시모프에서
러시아 지방작가,시인들을 만나 보드카를 마시고 기타 반주에 맟춰 노래를 부르던 일도 떠오른다.

러시아의 숲은 끝이 없다. 하늘도 끝이 없다. 러시아 하늘은 한국 하늘 보다 훨씬 넓다. 시야를 가로막는 산이 없기 때문
이다. 모스크바에서 카시모프까지 차로 다섯시간을 달려도 조그만 언덕배기 하나 발견되지 않고 평지가 계속되었다.
햇빛도 조금 더 투명하고 공기 냄새도 조금 다른 것 같고 들판에 피어있는 야생화의 색채도 한국의 그것 보다 더 투명하고
강렬했다. 러시아에는 <하늘은 정말 넓어요> 라는 민요도 있다고 아나톨리가 내게 알려줬다.

 브람스는 <러시아 추억>을 어떤 선율로 그려냈을까? 그 제명을 보는 순간 곡에 대한 궁금증이 부쩍 생겼다. 근래 CD에서
다시 LP로 취향이 옮겨가는 추세이다. 마침 이 특별한 감상을 더 빛내줄 손님이 거실에 자리잡고 있다.
국내 대표 오디오 제작처인 사운드포럼에서 제작된 <아이다 1.5>가 그것이다. 검정으로 도장된 특이한 디자인의 몸체가
마치 연주를 위해 연미복을 입고 지금 막 무대 복판으로 나선 근엄한 독주자처럼 위엄있게 보인다. 매끄러운 표면 재질과
색채 때문에 그랜드 피아노가 연상되기도 한다. 무게가 65킬로나 되는 이 메이져급 스피커는 사실은 그곳에서 보내준 선
물이다. 그 선물과의 첫 대면이 공교롭게 <러시아 추억>이 된 것이다.

 포스트니코바와 로쯔데벤스키의 <러시아 추억> 연주는 과연 반려자들 답게 완벽한 호흡을 뽐내는, 한치 빈틈도 없는 연주
였다. 이 판타지의 첫 악장의 장려한 문이 열릴 때 나는 벌써 잔뜩 긴장해버렸다. 내가 랴잔에서 보았던 드넓은 러시아 하늘
과 끝없는 숲의 행진이 금방 눈앞에서 펼쳐지고 독특한 러시아적 활기와 우수를 담은 곡의 진전에 따라
그땅에서 만났던 여러 인물들의 갖가지 표정과 목소리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가슴에 차오르는 향수를 음미해본다. 브람스의 이 음악은 우랄합창단이 부르는 러시아 민속곡인
<레비니슈까>나 <카투사> 같은 노래 보다 도리어 더 직접적이고 사실적이며 포괄적으로 러시아의 풍경과 정취를 생생
하게 전해준다. 이것이 뛰어난 예술작품, 뛰어난 기악곡의 매력이고 미덕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