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여름. 나는 국회도서관에서 당시 쏘련 정부 기관지라고 할 수 있는 <프라우다> 지면을 볼 기회가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나는 당시만 해도 내가 얼마 후 쏘련에 가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그때 내가 프라우다 지면을 살펴봤던 것은 신문 지면의 편집 기술을 좀 살펴보겠다는 의도였다.

내가 열람했던 프라우다 지면이 당시로서 최신 일자의 것이었는지 아니면 시간을 좀더 거슬러 올라간 과거의 것이었는지는 기억이 분명치 않다. 어쨌든 내 눈에 비친 프라우다의 지면은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신문의 편집을 그렇게도 할 수 있다니!

내가 알고 있는 신문 지면이란 굵은 활자의 제목이 가로 세로로 종횡무진 지면을 분할하고, 중간중간에 임팩트 강한 사진과 그래픽으로 화려하게 점철되어 있는, 두 손으로 활짝 펼치기도 어려울 정도로 넓은 지면을 좌상단에서 우하단으로 시선을 옮기며, 지난 하루 이 세상이 어떤 모양으로 진통하고 울부짖었는지를 일람할 수 있는 그런 종이를 의미했다. 제목도 그냥 쓰는 법이 없다. 지금 그 이름은 잊었지만, 새카맣거나 또는 이러저라한 무늬가 깔린 바탕을 깔고, 그 위로 선명하게 드러나 독자의 눈을 때리는 그런 제목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세상에나... 내가 처음 펼친 프라우다의 1면은 단 하나의 기사로 신문 전면을 뒤덮고 있었다. 제목도 윗 부분에 그다지 크지 않은 글씨로 단 한 줄! 흔히 미다시라고 부르는 부제목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중간에 딱 하나, 무슨 군부대 마크 같은 게 자리잡고 있을 뿐, 흔해빠진 사진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흔히 5단 통광고라고 부르는, 지면 하단의 광고조차 없었으니 그 광활한 지면을 뒤덮은 단 하나의 기사가 주는 그 생경함이라니...

대충 이해는 할 수 있었다. 상품경제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독자의 눈을 현혹시키는 편집 기술이나 마케팅 기법 따위는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런 식의 편집이 정말 바람직한 것인지는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나도 당시까지 자신이 빨갱이라고 나름 자부하던 시절인데도 그랬다. 물론, 나도 세계에서 가장 요란 시끌 뻑적지근 현란하게, 편집 지저분하게 하는 신문이 일본 신문이고 한국의 조중동 등의 편집은 철저하게 일본 신문의 그 기술을 배워온 결과물이라는 얘기는 듣고 있었다. 그런 한국 신문의 편집 기술보다는 좀 다른 차원의 편집을 살펴보겠다는 의도에서 국회도서관까지 찾아가기는 했지만, 이건 좀 심한 것 아닐까?

프라우다의 다른 지면은 그렇게까지 심한 편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신문의 가독성이나 시각적 편의성은 프라우다의 편집 원칙에서 거의 고려 대상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즉, 마케팅 개념 제로의 신문이었던 것이다.

내가 쏘련에 도착해서 술 마시고 뻗은 다음날부터 직면한 현실은 그보다 2년 전 국회도서관에서 프라우다 지면을 보면서 받은 충격을 되살려냈다.

나도 경험이 많은 기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충 미국이나 한국 기업들이 기자들을 초대했을 때 어떻게 프로그램을 짜는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흔히 생각하는 접대 따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기자를 초대했으면, 언제 어떤 장소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서 어떠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상당히 정밀한 스케줄을 짜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외국의 경우 대부분 통역이 따라붙는다. 통역의 경우 예외는 있지만 정말 예외에 속했다.

하지만 내가 모스크바 도착 다음 날 만난 디알로그사 관계자는 우리의 이런 요청에 대해 정말 황당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의 역할은 당신들을 초대해서 숙식을 제공하는 것까지다. 기자가 무슨 취재를 하건 그건 기자가 알아서 할 일 아니냐? 우리가 왜 그런 부분까지 챙겨줘야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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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디알로그 사 옥상에서 찍은 주변 모습. 숲속에 자리잡은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찍은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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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디알로그 사 내부 모습입니다. 대리석 건물로, 비즈니스 건물이라기보다 마치 무슨 미술관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나의 기자 경험과 상식으로는 말이 안되는 얘기였지만, 또 굳이 원론적으로 따져보자면 사실 반박하기도 어려운 논리이기도 했다. 사실 제대로 된 기자라면 출국 전에 좀더 준비를 하는 게 맞다. 물론 당시 국내에서 쏘련 특히 그 중에서도 정보통신 관련 정보나 자료를 찾을 수 있었을지 의문이기는 하다. 그렇다 해도 그런 노력은 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만한 경험도, 엣지도 없는 기자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과 취재와 마케팅 원칙을 놓고 왈가왈부 따질 여유가 내게 없다는 점이었다. 어떻게든 대안을 마련해야 했다.

A사장은 내게 솔직한 충고를 했다.

"어차피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취재를 하긴 어려울 거에요. 그러니 우리 일행이랑 적당히 시간 보내고 그냥 디알로그가 뭐하는 회사인지 정도만 취재해서 보도하세요. 그것만 해도 충분히 의미가 있어요. 그리고 이왕 쏘련에 왔으니 관광도 좀 하구요."

B이사나 C차장도 비슷한 의견이었다. 실제로 A사장과 선경의 관계자 일행은 그때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소프트웨어 관련 전시회에 출품된 제품들을 살펴보고 디알로그사와 제휴 관련 협의를 한 후 귀국할 예정이었다. 즉, 3박 4일 정도의 일정을 예상하고 왔던 것이다. 나 역시 애초에는 그 정도 일정이면 대충 취재를 마치고 귀국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A사장이 내게 "적당히 취재하고 귀국하자"고 권했던 배경에는 나의 취재능력에 대한 불신이 꽤 깔려있었던 것 같다. 김포공항에서 보여준 모습이나 기타 여러가지 말하는 모양새가 영 미덥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당시에는 A사장의 그런 시선을 미처 의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쨌든 그런 식으로 대충 귀국하기는 싫었다.

일단 디알로그 관계자를 통해 디알로그 회사나 쏘련의 쏘프트웨어 산업의 전반적인 이야기를 소개받되, 나는 혼자 모스크바에 남아 좀더 취재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런 내 계획을 디알로그 관계자에게 알리고 협조를 요청해달라고 A사장에게 부탁했다. 그 협조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취재해야 할 대상 업체를 소개해주고 인터뷰에 동반할 통역을 소개해달라는 것이었다.

A사장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내 요청을 디알로그에 전달해주었다. 하지만 결과는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 디알로그는 특히 다른 업체를 내게 소개해주는 것에 무척 소극적이었다. 그건 당신이 알라서 하라는 식이었다. 대신 통역은 소개해주겠다, 다만 그 비용은 당신이 부담하라는 얘기였다.

나는 별수없이 모스크바의 소프트웨어 전시회에 참가한 업체들을 대상으로 브로셔 등을 수집하기로 했다. 그 업체들이 어느 정도 쏘련의 소프트웨어 산업을 대표하는 위상을 갖고 있는지는 알 재간이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그것을 전시회에 출품해 알릴 필요성은 느끼는 업체들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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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당시 모스크바 소프트웨어 전시회의 디알로그 사 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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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모스크바 소프트웨어 전시회 모습.



기억이 분명치는 않지만 당시 소프트웨어 전시회는 무척 소박한 규모였던 것 같다. 미국의 컴덱스쑈나 한국에서도 자주 열리는 IT관련 전시회에 비하면 그랬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래도 여기저기 부스를 돌아다니며 명함이나 카탈로그, 브로셔 등을 챙겼다. 최소한 이들 업체만이라도 만나봐야지... 물론 대화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며칠 동안 디알로그사 관계자들을 만나면서 들은 얘기는 꽤 재미있었다. 지금 상세한 내용은 별로 기억나는 게 없지만, 대충 떠오른 얘기들이 있다.

디달로그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 자신들의 '역량'에 대해서는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디알로그사의 역량이 아니라 쏘련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전반을 대표하는 자부심이었다.

"칠판과 분필만 갖고 하는 작업에서는 전세계 어느 나라 엔지니어들도 우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에게는 하드웨어가 부족할 뿐이죠."

즉, 수학 실력은 세계 최고라는 자부심이었다.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기본 소양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지만 정작 PC 한 대를 구입하기도 어려워서 제대로 제품을 만들지 못한다는 한탄이었다. 디알로그 엔지니어들에게 들은 얘기로는 당시 쏘련에서 PC 한 대 가격은 거의 승용차 한 대 가격과 비슷하다는 얘기였다.

디알로그 엔지니어가 건네준 자사 소프트웨어 제품의 소스코드를 살펴본 선경의 C차장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이 친구들이 소스코드까지 줬는데도 그 알고리듬을 이해하기 어렵네요. 정말 특이한, 우리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알고리듬을 갖고 있습니다. 좀더 연구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꼭 디알로그사의 제품에 해당하는 것인지는 기억이 분명치 않은데 특히 화상 인식의 경우에는 매우 탁월한 경쟁력을 갖고 있다는 얘기도 들은 기억이 난다. 아무래도 미국과의 군사력 경쟁의 산물이긴 할 텐데, 인공위성을 통한 화상 이미지의 정련과 해석은 다른 나라가 범접하기 어려운 수준이라는 얘기였다. 물론 이것은 쏘련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에게서 들은 얘기이니, 미국이나 다른 나라의 엔지니어들은 또 다른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얘기가 내 기억에 흔적을 남긴 것은 그 뒤 서울 시내 길거리에서 흔하게 팔렸던 망원경 제품들이 러시아에서 온 것이라는 얘기를 들은 때문일 것이다. 그 망원경들이 내게 '쏘련의 막강한 화상 이미지 처리 기술'을 연상시켰던 것이다.

또, 쏘련의 엔지니어들은 해외의 소프트웨어 패키지를 제대로 돈 주고 사기가 어려운 조건이기 때문에 락(lock)을 푸는 기술이 굉장히 탁월하다는 얘기도 들었다. 결코 자랑이라고 할 수는 없는 얘기지만, 이들에게는 이것도 나름 자신들의 '실력'을 입증하는 증거의 하나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았다.

"다른 나라 소프트웨어 회사들이 자신들의 패키지에 아무리 뛰어난 락을 걸어도 그 제품이 우리 손에만 들어오면 순식간에 락을 풀 수 있습니다. 한번 풀면, 그 다음에는 다들 사이좋게 나눠 갖고 사용해보죠."

쏘련이 컴퓨터 CPU를 만든 적이 있다는 얘기도 모스크바에서 처음 들었다. 아마 국가 연구소에서 미국의 컴퓨터 CPU를 대체한다는 취지로 만든 모양인데, 성능 여부를 떠나 일반 컴퓨터 기기에 적용조차 못했다고 한다. 사회주의 국가 특유의 '원칙' 때문이었다.

"쏘련은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산업 생산에서도 국제표준을 준수합니다. 길이의 국제표준은 미터 단위 아닙니까? 그래서 쏘련의 컴퓨터 CPU 역시 미터 단위 기반으로 만들었어요. 그런데, 미국의 CPU들은 모두 인치를 기반으로 만들었더군요. 문제는 전세계 컴퓨터 시장에서 유통되는 마더보드 등이 모두 미국산 CPU를 기준으로 즉, 인치를 단위로 사용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만든 CPU는 마더보드에 꽂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고 하더군요."

좀 황당한 얘기이고, 이런 일이 버젓이 일어났다는 것이 우습기는 했지만 쏘련 사회, 쏘련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신기한 일이 아닌 듯했다.

이렇게 황당한 일이 벌어지는 곳이기는 해도, 내가 디알로그 사무실에서 본 엔지니어들의 근무 분위기는 훨씬 자유로워 보였다. 직원들의 10대 자녀들이 사무실에서 부모와 함께 스스럼없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모습도 봤고, 내가 보기에는 중3이나 잘해야 고등학교 1,2학년 정도로 보이는 소년들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라며 사무실에서 일하는 모습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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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디알로그 사무실에서 일하는 소년. 아무리 봐도 중학생 정도 나이 같은데, 디알로그 관계자들은 저 소년이 '일한다'고 말하더군요. 그냥 농담인지, 사실인지 지금도 자신이 없습니다. 이제 보니 뒤의 달력이 대한항공 것이네요...^&^ 이 사진, 모스크바에서 찍은 것 맞습니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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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모스크바의 인상 가운데 하나는, 거창한 규모의 기념관 등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도시 전체에 도서관, 미술관, 기념관 등이 무척 많더군요. 저 멀리 보이는 건물도 그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무슨 건물인지는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워낙 이런저런 조형물이 많아서...



나는 모스크바에 도착하면서부터 뭔가 지나치게 비장한 느낌을 계속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비장감은 디알로그 관계자들과 대화를 하면서 점점 더 심각해졌던 것 같다. 그 비장감의 정체는 별 것이 아니었다.

"아, 우리의 사회주의 조국이 이렇게 초라한 모습이었단 말인가?"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고, 대충 각오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실제 눈으로 보는 쏘련의 현실은 비록 극히 일부분일지라도 내게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던 것 같고, 약간의 과장된 포즈이기는 해도 그런 비장감이 전혀 가식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내 그런 표정이 다른 사람 눈에도 뚜렷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나를 혼자 남겨두고 일행이 서울로 떠나기에 앞서 B이사가 내게 한마디 건넸다.

"D기자, 모스크바 온 뒤부터 표정이 너무 어두운데, 혼자 두고 가기가 좀 걱정이 되네요. 이왕 남는다니 더 권할 수는 없지만, 정말 조심하세요."

사실 나로서도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모스크바에 온 뒤로 그런 얘기도 많이 들었다. 우리 일행이 도착하기 얼마 전 일본인 사업가가 모스크바에 와서 택시를 탔는데, 택시 기사가 강도로 돌변해 여권과 돈은 말할 것도 없고 팬티까지 완전히 벗겨서 벌거숭이를 만드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는 얘기였다. 당시에도 이미 쏘련에서는 '마피아'라는 단어가 빈번하게 쓰이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정해진 방침이다. 일행을 떠나보낸 다음날 나는 통역을 만났다. 이제부터 정말 고난의 행군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