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가 스펙을 이긴다"는 책이 있다. 고만고만한 스펙보다는 자기만의 독특한 이력이나 경험으로 승부를 하라는 내용의 책이다. 무한 경쟁의 취업 시장에서는 남들 다 가진 토익 점수보다는 나만의 인생 여정이나 스토리가 비교우위를 가질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스토리를 채우는 과정 역시 하나의 스펙이 되어가는 현실도 무시할수는 없다.

한국 정치는 전통적으로 "스토리"에 의존해왔다. 전쟁, 쿠데타, 학살, 민주화 투쟁, 개헌, imf, 최초의 정권 교체등으로 이어지는 정치 현실 자체가 웬만한 대하소설도 따라갈수 없는 거대한 스토리였고 정치인들은 역량과 체급에 따라 주연, 조연, 엑스트라등에 배치되어 움직였다. 각자의 기준에 따라 악역과 선역이 철저하게 분리되었고 그렇게 형성된 전선에 중립지대나 관용은 있을수 없었다. 이 대하소설은 누군가에게는 "5000년 가난을 끝낸 위대한 발전의 역사"였고, 누군가에게는 "친일파가 승리한 비극의 역사"였으며, 그래서 주인공들은 그만큼의 엄청난 역사의 무게를 짊어지고 악마로 비난받거나 신으로 추앙받았다.

유시민이 김해 선거에서 보여준 노무현 마케팅은 바로 이 "스토리 마케팅"의 극치라고 볼수 있다. 부엉이 바위의 비극은 노무현의 "기득권 세력과 의 싸움"의 최종 종착지였으며, 이 비극을 비극으로 끝내지 않는 방법은 유시민이 내세운 이봉수를 뽑는 것이다. 이를테면 유시민은 노무현의 현신이요 이봉수는 그 대리인이라고 할수 있으며, 노무현계시록은 그들의 승리로 인해 비로소 비극이 아닌 해피엔딩으로 끝날 단초를 갖게 된다.

반면 김태호는 이 스토리에서 보잘것 없는 악역에 지나지 않는다. 비리로 점철된 그는 노무현이 겨냥했던 "기득권 세력"을 구성하는 전형적인 조무래기에 불과하다. 따라서 노무현을 낳은 베들레헴 김해에서 노무현의 현신인 유시민 세력이 승리하고 분봉왕 헤롯(이명박)이 보낸 조무래기가 비참하게 패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 정치의 흐름이 변했다는 것이다. 나는 복지 논쟁이 한국 정치가 스토리에서 스펙으로 전환하는 하나의 전환점이라고 생각한다. 민주화와 산업화, 그리고 최초의 정권 교체를 거치면서 스토리적 정치는 점점 빛이 바래고 있다. 이제 한국 정치는 무겁고 둔중한 역사적 굴레를 등에 짊어지고 벌이는 처절한 싸움이 아니라 저마다의 강점과 매력을 내세우며 유권자들에게 호소하는 시장 경쟁이 되어가고 있다.

보궐 선거 직전, 유시민은 민주당이 주도한 복지 담론을 비판하며 "국가론"을 내세웠다. 래디컬리스트 유시민이 복지 논쟁이 경제 정의의 근본적 부분을 의식적으로 간과한 담론이라는 것을 캐취한 것은 칭찬할만 하다. 문제는 그가 당장 실현될수 있는 정책을 고민하는 대신 추상적인 국가주의를 다뤘다는데 있다. 이를 테면 그는 아직도 스토리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복지 정책이라는 민주당의 "스펙"이 조잡해 보일지는 몰라도, 흐름 자체를 거슬러 버린 국가론 타령보다는 백배 낫다.

이 연장선상이 보궐선거다. 그의 이해할수 없는 일련의 행보는, 그가 스펙 중심의 정치 현실에서 심각할 정도로 유리되어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는 내세울수 있는 모든 스펙적인 부분을 철저하게 차단하고 파괴함으로서 노무현 스토리만을 붙잡아야 하는 막다른 골목으로 스스로를 몰고 갔다. 누구라도 감지할수 있는 정치 흐름의 변화를 깨닫지 못하고 청개구리처럼 반대 방향으로 질주한 것은 유시민 개인의 성격적 특이성에 기인한게 아닌가 싶다. 이 부분을 논의하는 것은 이제 심리학의 영역이라고 본다.

반면 손학규를 보자. 손학규는 보궐 선거의 기본인 "정권 심판론"을 부각시키기 보다는 경기도 지사로서의 경력을 내세우고 중도층의 표심을 잡는데 주력했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대립각은 단지 "변화가 필요하다면 손 들어 주십시오"라는 온건한 표현으로 갈음했을 뿐이다. 이것은 그가 스토리적 캐치프레이즈인 "반mb연대"의 효과에 대해 회의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래서 손학규가 승리하고 유시민이 패배한 이번 보궐 선거는 "스펙이 스토리를 이기는" 정치 변화를 알려주는 중요한 계기라고 본다. 민주당은 유시민을 거울삼아 시효를 다한 스토리적 정치에 거리를 두고 스펙 중심의 실용적 정치 행보를 보여야 할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영남 공략론", "탈호남론"을 저버리는 것이 스펙 정치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