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의 내용은 약 10년 전 쯤에 종교적으로 중립적이라고 볼 수 있는 독일과 덴만크 그리고 캐나다의 언어학자와 미국과 독일의 사본학자들의 도움을 통해 얻어진 결과를 제가 정리한 것입니다. 여러군데에 흩어져 쓴 내용을 정리하였기 때문에 흐름에 약간의 문제가 있지만 논지는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근본주의 기독교에서는 동성애에 대하여 단호하게 죄라고 말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들은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성경은 동성애를 죄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하게 동성애를 신이 창조한 인간 세계의 질서를 파괴하는 죄라고 말한다. 그들은 한치의 양보도 없이 동성애의 문제에 대하여 단호한 입장을 표명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사회적인 시각으로 볼 때에 동성애의 현상은 현 시대가 안고 있는 불편한 사실이지만 동성애에 대한 과학적 사실이나 문제점에 대한 투명한 진실들이 드러난 상태도 아니다. 과학적으로도 그 메카니즘이 완전히 밝혀져 있지도 않다.
고대부터 동성애는 존재해 왔지만 사회의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았기 때문에 현대에 와서야 사회적인 관심이 집중될 뿐이다.
 
전에 다른 곳에 실었던 글들을 통해 근본주의 기독교가 동성애를 죄라고 규정하기 위해 성경적 근거라고 말하는 부분에 대하여 살펴보자.

한국의 기독교내에서도 동성애를 죄라고 규정하는 기독교인이 있는가 하면 동성애자도 예수의 사랑으로 감싸주고 수용해야 한다는 기독교인도 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는 성경의 근거를 통해서가 아니라 단지 예수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주장을 내세우기 때문에 간은 기독교내에서는 호소력이 약한 것은 사실이다. 더군다나 그들 가운데에도 죄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목소리를 내세우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그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인데 성경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명확한 이해의 부재는 역사적으로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문자주의적 해석이 개신교에 자리하게 되고 성경과 관련된 문화인류사적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성경의 해석학이 발전되어왔기 때문이다.
 
근본주의 기독교에서 동성애에 대하여 말할 때에 인용하는 성경의 내용은 구약에서는 창세기 19장의 소돔성의 멸망에 관한 부분이고 신약에서는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고 있는 부분이다.
 
우선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내용부터 보자.
 
각 문장에 대한 분석을 하기 전에 로마서 전체를 가지고 분석에 필요한 개괄적인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다. 로마교회란 하나의 개교회가 아니라 로마에 위치한 교회들을 총칭하여 부르는 말이다. 로마교회는 누가 세웠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최소한 베드로와 같은 예수의 제자나 바울이 세운 것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로마교회의 구성원은 대부분 로마 시민들이었을 것이며 그 가운데에는 로마인과 그리스인 그리고 유대인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러나 로마교회에서 지도자적 역할을 한 부류는 로마의 지식층 계층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에 학자들은 동의하고 있다.
 
로마서는 서기 57년 경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는 예수가 죽은지 30년도 되지 않은 때이다. 이 시기는 중요한 사실을 추정케 한다. 사도행전과 바울이 쓴 갈라디아서를 보면 예수의 제자들이 바울을 어떻게 대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두 개의 기록은 반대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지만 최소한 제자들이 바울을 아무런 의심도 없이 사도로서의 권위를 순수히 승인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이다. 바울은 어떤 증거나 증인도 없이 자신이 예수에게 직접 계시를 받은 사도로서의 권위를 주장하고 있고 또 그는 과거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자이기 때문에 제자들이 보여준 달갑지 않은 반응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은 바울은 자신의 사명이 이방인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그의 주장 또한 불편한 관계를 형성하게 된 주장으로 비춰지게 된다. 유대인이었던 예수가 3년 동안 함께 고생하였던 제자들과는 달리 어느날 갑자기 바울이라는 사도를 세우고 동족인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전권을 맡겼다는 사실을 순수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이런 학자들의 주장에는 아무런 이견이 없다. 당시의 역사적 상황 그리고 역사가나 교부들이 남긴 기록들을 볼 때에 매우 자연스러운 추측이다.
 
바울은 이 편지를 로마교회에 보내면서 그 수신자를 로마교회의 전 교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즉 이 편지는 로마교회의 지도자나 몇몇 중심적 인물이 아닌 전체 구성원을 대상으로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를 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바울이 로마서를 쓴 목적은 자신의 사도성을 인증받고 자기의 전도 여행에 대한 로마교회의 지원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로마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바울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복음에 대한 이해를 로마 교인들에게 상세히 설명하려는 흔적을 읽을 수 있다. 매우 자세히 설명하면서 그 논리성을 설명하려는 내용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유대인이 지니고 있던 율법에 대한 공격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믿음을 강조하고 예수의 구원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로마인과 헬라인에게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시작부터 강조하면서 율법에 의하여 유대인에게만 국한되었던 유대주의적인 구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가 사도행전에서 보여주었던 태도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사도행전에서는 자신이 비록 이방인을 위한 사도이지만 동족에 대한 사랑을 금할 수 없어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도 한다고 말하지만 로마서에서는 반대의 입장을 보여준다.
 
쉽게 말해서 로마서를 읽으면 바울은 로마인과 헬라인의 편에서 유대인들을 비난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이런 사실은 로마서가 대부분이 이방인었던 초기 정통주의자들의 마음에 쏙 드는 서신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설명된 사실은 근본주의자들이 증거로 삼고 있는 1장 23절 이후의 내용을 바로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근본주의자들은 문자주의 해석에 입각해서 단지 몇몇 구절을 인용하여 그 구절에 나타난 단어들의 자의적 해석을 부각시키고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바울이 로마서를 쓴 대의와 그 구절들의 앞뒤 문장들과의 문맥적 연결은 무시하게 되기 때문에 전체의 주제 및 본래의 의도와는 조화가 되지 않는 해석을 하게 된다는 것을 먼저 결론으로 말하고자 한다.
 
이제 각 문장을 보면서 자세히 분석해 보자. 번역본은 한글 개역본, 한글 쉬운 성경, 영문 NIV 그리고 영문 King James 본을 필요에 따라 사용하겠다.
 
먼저 1장의 초반부에 있는 바울의 인사말을 보자.
 
6 여러분도 그들과 함께 부르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7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성도로 부름을 받게 된 로마에 있는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혜와 평강을 내리시기를 바랍니다.
 
이 두 구절에서 바울은 분명히 이 편지의 대상이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후에 이어지는 바울의 문장에는 복음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깨달음이 이어진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당시에는 복음이라는 개념이 지금 생각하는 복음이라는 개념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에 신약성경이라는 것은 없었다. 4세기 이후에 정통주의자들이 27권으로 된 신약 성경을 정경이라고 발표했고 또 27권의 신약 가운데 바울이 쓴 많은 서신들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로마서가 쓰여진 이후에 쓰여진 것이다. 따라서 로마 지역에 있던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던 것은 기껏해야 두권의 복음서 (마태, 마가)의 사본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신약의 정경에 속하지 않은 몇몇 문서들이 존재하였다. 지금은 영지주의 문서라고 부르는 문서들이 복음서와 같이 존재하였다. 이런 사본들 조차 손에 넣을 수 있었던 몇몇 사람들이나 개인적으로 소장했을 것이고 그럴 여유가 없었던 사람들은 교회에 모일 때에 지도자가 그 사본을 읽어 주는 것을 듣는 것으로 예수의 복음에 관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복음서 전체를 읽어가면서 그 내용을 체계적으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또 복음서들을 서로 비교하면서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것은 당연히 복음의 전체적 내용뿐만 아니라 부분적인 내용도 불완전하게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현재는 위경으로 알려진) 여러 문서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기독교에 대한 이해를 다양한 사상 가운데서 정립해야 하는 혼란이 극심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교회의 체제와 제도에 대하여는 복음서에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기 때문에 그들은 교회의 조직은 기존 이방종교의 조직을 그대로 모방하려고 했을 것이고 구원의 문제에 대하여도 예수의 가르침만 보아서는 어떤 과정과 제도를 걸쳐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유대인을 중심으로 시작한 기독교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유대교의 율법에 대한 준수와 함께 그것을 연장하는 수준에서 기독교를 이해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율법의 준수는 할례와 같은 육체적 규례를 요구하기 때문에 이방인이 기독교인들은 반발이 심했을 것이며 이것은 단지 로마교회뿐 아니라 이방인이 속한 초기 기독교에 당면한 문제였다. 이것이 로마교회 내에 문제가 발생한 기초적 요인이 되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통해 이런 문제가 공통적인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이런 문제에 대한 명확한 해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로마서에서도 이 문제를 처음부터 언급하고 있다.
 
이 때에는 교리가 성립된 것도 아니고 예수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성립된 것도 아니다. 예수가 죽은지 오래 되지도 않은 상황이라 아직도 예수가 인간인지 아니면 신인지 혹은 현대의 기독교가 주장하는대로 신이자 동시에 인간인지 제대로 판가름이 나지 않은 상태였다.
 
즉 교리가 전혀 형성이 되지 않은 당시의 상황은 바울의 편지의 내용을 바라보는 현대인의 시각을 크게 바꾸게 되는 중요한 사실이다.
 
또 하나 생각해 봐야 할 사실은 로마교회의 구성원들의 신관과 세계관이다.
 
그들은 아직도 기독교가 국가의 중심적 종교로서 사회 전반의 문화적 틀을 구성하기 훨씬 전의 사람들이다. 현대 사회는 지난 20세기 동안 기독교적 문화가 서구의 중심적 문화의 기반으로 작용한 역사를 배경으로 이루어진 사회이기 때문에 신이라는 단어를 듣게 되면 서양인은 대부분 기독교의 신을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그 당시의 로마의 종교적 상황을 살펴 본다면 그 당시의 사람들은 다신주의에 입각한 고대 종교가 아직도 성행하였던 시대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다신론적 신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논리적인 추측이다.
 
쉽게 말해서 현대인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신화로 받아들이며 그 신화에 나오는 신은 단지 신화적 허구의 존재로 여기고 있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신화가 아닌 실제의 사실로 여기고 있었고 따라서 그들에게 제우스나 박카스 같은 신은 실제로 인간 세계에 관여하는 신으로 여기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신관을 가지고 있던 당시의 로마인에게 신약성경도 없이 다른 사람이 들려주는 예수와 예수의 가르침에 관한 내용은 당연히 바울이 생각하고 있는 복음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삼위일체와 같은 사상도 정립이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예수의 신성에 관하여 많은 논란이 있었다. 예수가 인간이라면 숭배할 존재가 아니고 만일 신이라면 유대교의 여호와라는 신은 유일신이 될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또 예수가 인간이자 신이라는 주장은 인간이 납득할 수 있는 주장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가정들이 나타나고 각자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논쟁이 치열했다. 따라서 이 시기는 현대의 신학에서 말하는 기독론과 신론 교회론과 같은 신학적 기초를 형성하기 위해 많은 소모적인 논쟁이 난무하였을 것이다. 그 가운데 논리적으로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하고 논증을 제시할 수 있는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당연히 지식 게층이었을 것이고 따라서 로마교회의 경우에는 그리스 철학과 사상으로 훈련 받은 사람들이 중심적 세력을 이루어 갔다.
 
바울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나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예수의 복음을 말하기 전에 17절 이후부터 유일신인 하나님에 대하여 먼저 언급을 한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유대교의 신이 기독교에서도 숭배되어야 할 신이라는 정당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바울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많은 공간을 활용하여 이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다. 몇 줄의 문장을 통하여 이 문제를 언급한 후에 유대교의 율법의 문제로 넘어간다. 여기서 살펴 볼 것은 당시의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가 예수의 신성과 함께 구약의 여호와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였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여호와의 신성에 대하여 의문을 품는 자는 없었고 그 의문은 대부분 로마인과 같은 이방인이 가지는 의문이었다. 따라서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이방인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짧게 언급을 한 것이 나타난다. 물론 자신도 유대인이기 때문에 여호와의 신성에 대하여 이런 저런 언급을 할 필요없이 당연하게 여기는 문제이기 때문에 길게 설명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느 경우이든 이방인의 감정을 자극할 정도의 언급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몇몇 사본학자들은 1장 3절과 4절은 바울이 쓴 것이 아니고 추후에 삽입된 구절이라고 주장한다. 만일 이 주장대로 3절과 4절을 제하고 다시 읽으면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의 정체성이 사라진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의문은 계속 남게 된다. 또 4절을 보면 바울이 지닌 예수에 대한 개념과는 다른 언급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절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 문제는 본 주제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관정에서 문장 하나, 단어 하나 그리고 표현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본문으로 들어가자.
 
21절부터는 로마교회에서 문제에 대한 지적에 들어간다. 이 문제를 언급하면서 그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이며 그들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하는 곳이 바로 21절이다.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알되' 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을 자세히 생각해 보면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사람은 교회 외부에서 이방 종교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 내부의 사람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다신주의에 따른 이방 종교를 믿는 사람은 당연히 유일신인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그들에 대하여 '하나님을 알되'라고 말할 수는 없다. 여기에 더하여 바울의 관심은 로마 사회에서 횡행하는 당시의 이방 종교가 아니라 복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발생된 로마교회 내부의 문제이기 때문에 어 교회 외부에서 나타나는 비기독교적인 문제를 언급한다는 것은 편지의 목적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동떨어진 내용이 된다는 사실이다. 바울의 다른 글들을 보아도 그는 글을 쓰는 목적과 글의 논리적 흐름이 항상 유기적 관계에서 벗어나지 않는 치밀함을 놓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금 바울이 지적하고자 하는 사람이 교회 내부의 사람이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니 계속되는 내용을 읽으면서도 이 사실을 기억하고 읽어야 한다.
 
그 이후에 바울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21절 이후와 그 뒤를 잇는 2장을 자세히 읽으면서 그 안의 논리를 따져보지 않으면 바울이 마치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이방종교에서 우상숭배하는 자들에 대하여만 언급을 하는 것처럼 착각을 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근본주의자들은 쉽게 실수를 하는 것이다.
 
21절부터 각 절마다 중요한 단서가 되는 단어나 구절들을 생각해 보자.
 
21 하나님을 알되...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26 이를 인하여....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1장 21절 이후부터 끝까지 바울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하여 서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2장에 들어가면서 구체적으로 문제의 본질로 접근한다.
 
즉 1장 21절 이후에서 서술한 문제점이 교회 내의 문제점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우상을 섬기고 탐욕과 교만과 자랑 늘어 놓기를 즐기지만 이런 죄악이 로마교회의 기독교인에게도 있다는 것을 말하므로 그들에게 나타나는 문제도 결코 교회 밖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바울은 문제의 구체적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여러가지 증거를 제시한다. 바울은 율법을 말하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대조하면서 그의 논지를 펼쳐 나간다. 이런 사실을 볼 때에 로마교회 내의 문제는 그 교회에 속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문제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이 사실은 역사가의 기록과 초기 기독교의 형성사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로마교회는 다수가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유대인들이 전무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그들의 전통적 종교인 유대교의 연장선에서 기독교를 이해하려고 하였고 이방인들은 유대교와는 완전히 단절된 새로운 종교로서 기독교를 이해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문제의 뿌리가 되었다. 복음서만 읽으면 예수가 다시 세우려는 종교가 이방인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인지 아니면 유대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인지 쉽게 이해할 수 없다. 지금은 신약성경에 바울이 이런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쉽게 이해를 할 수 있지만  그 당시의 기독교인은 복음서 사본 몇 개만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이 문제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지금 유대교의 전통에 따른 율법이 예수의 복음의 중심이 아니며 그렇다고 이방인들이 주장하듯 율법 자체가 무용한 과거의 전통일뿐이라는 생각도 틀리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2장 20절에서 훈도가 되고 선생이 되려는 자들을 꾸짖는 것이다. 어린 아이란 나이가 적은 아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초보 교인을 일컫는 표현이다.
 
즉,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유대교적 전통을 지켜는 것이 기독교의 사상에 포함된다고 가르치려들고 이방인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와 기독교는 완전히 분리되어있는 것이기 때문에 구약의 유대교적 율법은 완전히 무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교인들을 가르치려들기 때문에 교회 내에서 혼란과 분열이 가중되는 모습을 바울은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그리고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라는 표현을 가지고 유대인 기독교인에 대하여 계속 지적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볼 때에 로마교회의 문제가 무엇인지는 분명히 드러난다. 유대교의 전승에 따른 율법의 준수를 강조하는 유대인 기독교인과 그에 맞서는 이방인 기독교인 사이의 분쟁이 바로 그것이다.
 
또 한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은 로마교회내에 유대인 기독교인이 있었으며 그들은 두 가지 사실을 가지고 자신들의 입지를 확고히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두 가지 사실이란 예수가 유대인이므로 유대교가 기독교의 기반이 되고 따라서 유대인인 자신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교리적인 구조를 세울 수 있는 우선권이 있다는 것과 또 하나는 만일 기독교가 유대교의 율법과는 완전히 분리된 새로운 종교가 된다면 자신들이 지금까지 힘들게 지켜온 율법에 의한 자신들의 정체성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강하게 부인함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보호 본능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자기 방어적인 태도와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한 욕망이 섞여서 논쟁을 이끌어가고 있는 것이다. 로마인과 같은 이방인도 유사한 입장에서 그들의 주장을 펼쳐 나갔다. 기독교가 유대교의 연장이라면 그들은 율법을 준수해야 하고 따라서 할례와 같은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에서 노예 계급인 유대인들이 교회 내에서는 지도자 게꼐급이 되어 그들의 권위에 복종해야 하는 수모를 직면하게 된다.
 
이것이 당시 종교적 논쟁의 수면 아래에 있는 중심된 갈등의 실체이다.
 
2장 이후로 바울은 계속해서 율법이 아닌 믿음이 중심이 되는 복음의 이해를 가르치고 있다.

다시 본 주제로 돌아가서, 그렇다면 1장 21절 이후에 나타나는 문장에서 바울은 왜 동성애로 보이는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다시 정리해 보자. 바울은 세상 사람들이 저지르는 죄악을 말하면서 그 죄악이 지금 바울의 글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로마교회의 기독교인에게도 무관한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로마교회 내에도 동성애가 문제가 되고 있다는 얘기일까?
 
만일 동성애가 로마교회 내에 문제였다면 2장의 초반부의 문장은 연결될 수 있는 문장이 아니다. 바울은 남을 판단하는 자들이 자신도 동일한 죄를 짓고 있다고 말한다. 만일 교회 내에서 육체적인 간음이나 동성애라는 문제가 발생하여 그것에 대하여 분쟁이 일어났고 그래서 그것을 죄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그것이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쟁이 문제였다면 바울은 둘 중의 하나를 지적하여 간음과 동성애에 대한 언급만을 하였어야 한다. 그리고 바울은 남을 판단하는 자들도 동일한 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모순이다. 동성애를 추구하는 자가 다른 자들에게 동성애를 추구하도록 가르치고 있고 그들이 자신들의 본성도 아닌 동성애를 따라하였을까?
 
한 가지 더 의문이 가는 것은 만일 로마교회 내의 문제가 육적 동성애의 문제라면 지금 바울은 유대인을 향하여 비난의 목소리를 더 강하게 내는 것으로 보아서 유대인이 동성애의 주범인듯 보인다. 그렇다면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 구약에도 문자적으로 보면 간음과 남색에 관하여 강하게 경고하는 내용이 많은데 유대인이 그것을 모르고 동성애적인 변태 성행위를 행하면서 교회 내부에서 물의를 일으키고 타인에게도 이것을 조장하고 자랑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논리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율법을 어린 아이나 어리석은 자에게 가르치려고 한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그 가르치는 내용이 율법의 준수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동성애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내용이다.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로마교회 내에 영지주의가 침투되어 영지주의적인 사상을 가르치려 했다고 주장하며 바울이 로마서에 그런 것을 지적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영지주의가 육체는 무익한 것이고 영이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육체적인 타락은 영적 부활과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에 육체적 향락을 추구하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리고 그런 주장을 연장하여 따라서 로마서에서는 바울이 그런 영지주의자들이 육체적 동성애를 주장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터무니 없는 주장이다. 우선 영지주의자들은 육이 무익하다고 생각한 것은 맞으나 그렇다고 육적 타락을 방관하고 추구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금욕주의에 가까운 생활을 추구하였다는 사실은 고대의 기록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학자들이 영지주의에 대하여 바른 이해를 지니지 못한 것은 위경 때문이다. 당시에 기독교의 여러 분파 가운데 영지주의 영향이 매우 강하였다. 따라서 초기 정통주의자들은 영지주의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마치 영지주의자가 쓴 것처럼 위장하여 문서를 만들었는데 그 내용에는 남녀의 성적인 문란함을 조장하는 듯한 내용이 들어가 있다. 사본학자들은 이것이 영지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사상을 적은 문서가 아니라 초기 정통주의자들이 영지주의를 공격하기 위한 위조문서라는데 동의를 하지만 일부 근본주의 신학자들은 이런 사실을 거부하고 영지주의에 대하여 왜곡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이 근본주의 기독교에서 영지주의에 대한 바르지 못한 이해로 전파된 것이다. 만일 영지주의자들이 로마교회내에 가장 큰 문제점으로 등장했다면 바울은 영지주의자들의 사상을 적나라하게 지적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로마서를 통해 유대인의 전통적 사상에 기반을 둔 율법의 준수와 기독교의 복음의 차이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다는 사실은 영지주의에 대한 공격이 로마서를 쓴 주된 목적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본 주제와는 초점이 다르지만 여기서 상기할 사실은 로마교회의 분쟁은 유대주의자와 이방인 사이의 문제인데 바울은 유대인에 대한 비난을 주된 문제의 중심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언뜻 보면 이런 논조는 이방인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옹호하며 바울이 유대인에게 손가락질하고 이방인의 손을 들어주는 듯한 착각을 가지게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초기 정통주의자들이 신약의 정경을 채택할 때에 로마서를 서슴지 않고 채택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바울의 다른 글을 보면 그는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에 대한 강한 애착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금 로마서에서 유대인에 대하여 강한 어조로 그들을 비난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이방인보다는 자신의 동족에게 먼저 자신이 지니고 있는 복음의 바른 이해를 전하여 주고 싶은 열망 때문이다. 이제는 더 이상 매달려서는 아니 될 율법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예수의 가르침을 깨달으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게속해서 본론으로 돌아가자.
 
2장에서 분명히 드러나듯 문제의 초점은 율법의 준수를 주장하는 유대주의자들과 그 반대편에 있는 자들의 충돌이다.
 
따라서 1장 21절 이후에 나타나는 문장은 이런 사실을 중심으로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 적절한 이해를 가능케 한다.
 
이제는 문제가 되는 1장 21절 이후의 문장들을 살펴보자.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이 문장에서 하나님을 아는 자는 누구를 지칭하는 말인가?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기독교인들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25절을 보면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무엇을 했는지를 밝힘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그들이 누구인지를 짐작케한다.
 
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배워서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물론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있는 일반적인 인간을 지칭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32절에서 이런 자들이 어떤 자들인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는 말을 남긴다.
 
32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즉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 있는 자이다. 기독교인이 아닌 자들은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 있지 않기도 하고 알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믿지 않는 자이다. 당시의 기독교는 태동의 시기이다. 그리고 당시의 로마에는 많은 이방 종교가 존재하였다. 구런데 이들 다양한 이방 종교들은 서로가 배척하는 관계를 유지하지 않고 대신 서로의 존재에 대하여 우호적인 관게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다른 종교의 신도 경배할 존재이고 내가 속한 종교의 신도 경계할 또 하나의 신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잇었던 사람들이 당시의 로마인들의 종교관이었고 신관이었다. 따라서 때로는 한 이방 종교의 제사에 참가해 제사를 올리고 그 이후에 다른 이방종교의 제사에 참여하여 제사를 올리는 일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시대였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타종교에 대하여 교리적 비판이나 타종교의 신을 모독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바울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꾼' 사람들은 이방 종교인이 아니라 기독교 내에 있는 기독교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당시의 상황 그리고 로마서의 전체적인 주제와 그 목적을 다시 상기하면서 이 사실을 정리하자면 바울은 경전도 없고 교리조차 형성되지 않은 기독교의 초창기 때에 전승적 유대교의 보존을 주장하는 유대인들과 그것에 반대하여 대립하는 이방인 기독교인 사이의 문제를 보면서 하나님의 진리를 배웠던 유대인들이 그들의 지식을 자랑하며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 내에 질서가 확립되지도 않고 이런 저런 주장만 난무하여 혼란을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하여 바른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 1장 부터 로마교회에 속한 자들의 죄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 죄의 자세한 내용이 26절부터 이어진다.
 
그런데 왜 바울은 직접적으로 그 죄를 설명하지 않고 알아듣기 힘든 표현으로 글을 썼을까?
 
이에 대한 이해는 언어에 대한 개념의 역사적 변화를 알고 있어야 답을 할 수 있다.
 
고대에는 언어가 사실을 표현하는 매체로 사용되기도 하였지만 매우 중요한 사실에 대한 이치를 나타내고자 할 때에는 상징적인 매체로 사용되었다.
 
하늘의 태양과 사람의 눈은 동일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태양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에 사람들은 사람의 눈을 연상하게 되었다. 이것이 고대인이 언어를 접할 때의 의식이다. 현대인은 문학적 표현에서나 이런 상징적 매체로서의 언어를 접하게 되지만 그 당시는 많이 달랐다. 합리주의 사고가 서구에 퍼지게 된 이후에야 사실적 기능의 언어가 주된 언어의 기능으로 자리 매김을 하였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어야 고대의 문서에 대한 이해가 열린다.
 
고대의 문자는 상형문자이고 상형문자는 상징을 극대화한 문자이기 때문에 이런 문자로 언어적 인식 체계를 형성한 고대인에게는 당연히 언어를 접할 때에 상징성을 먼저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상형문자 이후로 문명이 발달되고 현대에 쓰이는 문자의 원형이 개발되면서도 인류가 지녀왔던 문자에 대한 개념은 하루 아침에 변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현상은 오랜 시간동안 지속되었다.
 
따라서 고대의 이집트의 문서를 보면 모두 상징적 표현이고 이런 전통이 계속 이어졌던 바울 당시에도 그런 영향은 지속되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왜 예수가 그의 가르침을 모두 비유로 말하고 있었으며 바울 또한 현대인이 이해하기 힘든 표현을 통해 교회 내의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르침을 적었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현대인은 바울의 글을 이해하기 어렵게 언어적인 훈련을 받은 것이고 당시의 사람들은 그것이 오히려 편하고 이해하기 쉽게 훈련이 되었던 차이가 성경 해석의 혼란과 난해도를 높이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고대 이집트 같은 경우에는 대부분이 상징적 표현으로 기록되었지만 그 이후에 바울의 시대에는 부분적으로는 사실적 표현으로 그리고 또 다른 부분에서는 상징적 표현을 사용함으로 혼합된 표현 기법 때문에 두 가지 언어의 기능을 구분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사실이 난해함을 더하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보고있는 26절은 사실적 표현인가 아니면 상징적 표현인가?
 
지금까지 살펴 본대로라면 사실적 표현으로 해석할 경우에는 앞뒤의 문맥과도 상치하지 않고 전체의 대의와도 잘 어울리지 않는 문장이 된다. 그렇다면 상징적인 표현으로 해석을 한다면 그 결과는 어떨까?
 
근본주의자들은 상징적 표현은 거부하지만 일단은 가능성을 열어 놓고 해석을 한 후에 계속 생각해 보자.
 
26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개역 성경)
 
26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사람들을 부끄러운 욕망의 노예로 살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여자들은 남자들과의 자연스러운 성 관계를 여자와 성 관계를 갖는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쉬운 성경)
 
26 For this cause God gave them up unto vile affections: for even their women did change the natural use into that which is against nature: (King James 성경)
 
26 Because of this, God gave them over to shameful lusts. Even their women exchanged natural relations for unnatural ones. (NIV 성경)
 
26절 본문을 저세히 분석하기 전에 쉬운 성경과 다른 성경의 차이를 보자. 쉬운 성경은 아예 성 관계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다른 성경들은 사용한다는 단어를 쓰거나 단순하게 바꾸었다는 단어를 쓰고 있다.
 
그리스어 사본의 성경은 사용한다는 단어로 이 문장을 기술하고 있다.
 
쉬운 성경은 이미 그 번역에 있어서 상당한 문제를 나타내고 있다. 근본주의자들의 해석을 성경의 본문과 대체 시킨 것이다. 따라서 쉬운 성경을 보는 기독교인은 이 문장의 의미에 대하여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닫아놓게 되는 실수를 강요받는 것이다.
 
그럼 이 문장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자.
 
이 문장은 '이로 인하여'라고 시작한다. 즉 26절의 앞 문장인 25절이 26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의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그럼 25절은 무엇을 말하는가? 25절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긴다고 말한다. 이것은 이방종교를 말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만든 자들은 기독교에 대하여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라는 것을 밝혀졌다. 따라서 피조물을 섬긴다는 것은 이방종교의 우상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보다 세상의 것들을 더 사랑하고 그것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들을 교만하게 만들고 자신들의 명예욕이 교회 내에서 선생이 되고 훈장이 되려고 하는 욕망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사상이 옳은 것이라고 우기고 주장하며 당파를 만들고 상대를 비난하며 판단하려는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행위를 부끄러운 욕심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 부끄러운 욕심의 결과가 자신들이 선생이 되고 훈장이 되려는 일을 자행케 할 뿐만 아니라 '여인들도' 역리로 쓴고 있다고 말한다.
 
'여인들'이 아니라 '여인들도'라는 표현을 주목해야 한다. 영어 성경에서도 'even'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번역을 한다면 '심지어는 그들의 여자들까지도'라는 말이다. 즉,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죄를 짓고 있는 자들은 교회 내에서 지식이 있다고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를 잘 알고 있다고 자랑하는 교회의 중심적 역할을 하는 지도자급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보다 못한 여자들까지도 이런 일을 하고 있다." 라는 사실이다.
 
그런 여자들이 뭔짓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바울이 지금까지 말한 내용으로 볼 때에 여자들도 교회에서 자신들의 지식을 뽐내며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바꾸어 사람들을 가르치려 들고 자신들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주장하며 거짓을 행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자연적인 사용(natural use)이라고 직역할 수 있는 영어 성경을 한글 성경에서는 순리라는 말로 번역하였다. 이 번역이 많은 혼란을 가져오게 되었다. 여자가 자연적으로 쓸 것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쓴다는 말인가?
 
이 쓴다는 것이 성관계의 대상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 오류의 첫 걸음이다. 남자와 여자라는 단어가 두 문장(26절과 27절)에 구분되어 표현되니까 사람들은 성문제부터 머리에 떠오르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한글 성경에서는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역리대로 썼다'고 번역을 함으로 마치 이런 죄악의 행위가 여인들이 아닌 '저희'라고 생각하게 만들었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남자가 여자를 성행위의 대상으로 사용하는 순리가 아닌 역리대로 여자가 아닌 남자를 대상으로 성행위를 한다는 인상을 주게끔 번역이 되어있다.
 
영어 성경도 마찬가지이다.  NIV에서는 Even their women exchanged natural relations for unnatural ones 라고 표현함으로 관계(relations)라는 것을 마치 남녀간의 성관계를 말하는 것처럼 번역하였다. 그리고 exchange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마치 성관계의 파트너를 바꿔가면서 성관계를 나누는 인상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었다.
 
King James 성경은 그래도 조금 더 분명한 표현으로 번역한 것 같다. change the natural use into that which is against nature 라는 표현을 통해 성관계를 연상하기는 쉽지 않다.
 
여기서 한가지 살펴 볼 것은 자연적인 것 (naturla one, natural relation), 혹 한글 성경에서 말하는 순리란 무엇을 말하는가이다.
 
바울이 이 단어를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앞에 드러나 있다. 바울은 20절에서 하나님의 신성이 피조물인 만물에 분명히 보여 사람이 알게 된다고 말함으로 그가 말하는 자연적인 것에 이미 신성이 있고 그 신성을 통해 순리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즉, 세상의 이치에는 하나님의 속성이 있고 그 속성을 자연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 순리를 깨닫는 다는 것이다. 그럼 이 순리라는 것이 남자와 여자와의 성적 결합을 말하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속성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이해가 된다.
 
지금 바울은 구약을 가지고 예수의 복음을 이해하고 있다. 예수가 한 말과 가르침을 구약을 통해 이해하고 그것과 비교하면서 구약의 진리가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완전하게 발현되는지를 이해하고 있다. 그럼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속성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구약에서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 질서란 공의와 공평과 정직이라는 세 단어로 표현된다. 이것을 공의가 흐른다고도 말하며 과부와 고아의 하나님이라고도 말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자연적인 것이란 이 세상에 이미 보여진 하나님의 속성인 공의와 공평과 정직이라는 질서를 가리키는 말이다.
 
바울은 로마교회의 교인들이 이런 질서를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질서를 깨뜨림으로 문제가 발생하고 그 질서란 것을 깨뜨리는 이유는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자신의 사상을 가지고 복음을 혼잡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자연적인 것 혹은 자연적인 사용 혹 순리라는 것은 세상의 이치에 녹아있는 질서의 이치를 말한다.
 
그런데 왜 그는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면서 말하였을까? 그 이유는 남자는 말씀의 씨를 뿌리는 위치에 있는 자이고 여자는 그 씨를 받아 새 생명을 잉태하고 해산하는 수고를 거쳐 남자로 변해야 할 자이기 때문이다. 즉, 여자는 이런 수고를 거쳐야 남자가 된다는 영적 상징의 의미를 지닌 단어일 뿐이지 육적인 여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래서 고대의 언어에 대한 상징적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고대문서의 해석이 물 흐르듯 모순이 없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아들을 원한다고 말하지만 딸을 원한다고 말하는 법이 없다. 장자를 언급하지만 장녀를 언급하지 않고 아들을 바치라고 아브라함에 명령하고 또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한다. 아들을 낳으면 할례를 하라고 율법을 정하지만 딸에 대한 할례는 언급하지 않는다. 아들과 딸을 낳는 경우에 대하여 산모가 치뤄야 할 정결례 규례가 다르다.
 
이 모든 것들이 이런 이치로 인해서 나타나는 표현들이다. 신이 어찌 성차별을 하겠는가?
 
바울은 이런 이치대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구약뿐 아니라 전통적 표현 방법대로 상징적인 단어를 사용하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26절 이후에 남자라고 표현된 단어는 교회에 영적으로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고 여인이라고 표현된 사람들은 그런 지도자 밑에서 가르침을 배우고 있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즉, 지도자들은 제대로 된 복음의 이치를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바르지 못한 가르침을 가르치고 있고 이런 가르침을 배우고 있는 자들도 그들이 배운 바 대로 바르지 못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27절은 남자에 대하여 언급을 하는 것이다. 27절은 '이와 같이'라고 시작한다. 즉 26절에서 여자들이 질서를 깨뜨리는 잘못된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남자들도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교회 내의 세개의 그룹을 나누어 지적하고 있다. 지도자와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여자들과 여자의 단계를 넘어선 남자들이 바로 그 세 그룹이다.
 
27절에서 음욕이 불일듯 일어난다는 표현은 성적인 음욕이 아니라 자신의 종교적 지식과 명예에 대한 욕망이 강하게 나타나서 자신의 가르침을 주장하며 동급인 다른 남자들에게도 가르쳐 들려는 어리석음과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다. 영적인 남자는 씨를 뿌리는 자이지 씨를 받는 자가 아니다. 즉, 가르침을 주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지 가르침을 받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남자들끼리 서로가 더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자기가 옳다고 가르치려 드는 것이 음욕이 일어나는 것이고 그것은 질서를 깨뜨리는 일이 되기 때문에 이런 것을 역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런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 하나님의 진리는 사라지고 인간의 철학과 지식이 그 자리를 대치하게 되므로 바울은 이런 현상을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를 바울은 29절부터 말하고 있다.
 
29절부터 31절까지 자세히 보자. 만일 바울이 동성애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면 29절 이후에 나타나는 것이 동성애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까?
 
불의와 추악과 탐욕까지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 다음에 나타나는 죄악은 동성애 때문에 나타나는 죄악은 아니다. 더군다나 30절의 '자랑하는 자요'라는 표현은 극명하게 이런 죄를 짓는 자의 속성을 보여준다. 동성애자가 자신을 자랑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럼 누가 자랑하겠는가? 자신의 종교적 지식과 주장을 다른 이에게 강요하는 사람들이 바로 자신의 지식과 학식과 종교적 열심을 주장하고 자랑하는 자이다.
 
지금까지 신약에서 로마서 1장과 2장을 가지고 바울이 정말로 동성애에 관하여 언급을 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
 
오해하기 쉬운 표현들과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있지만 고대의 문서들에 대한 약간의 사전 지식과 기독교 초기 역사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논리적으로 분석하면 그 내용이 어떤 내용인지 최소한 대의는 짐작할 수 있다.
 
근본주의자들이 왜 이런 식으로 성경을 오해하고 있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이런 오해를 하게 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목사들이 설교를 하면서 성경의 구절 몇 개만 가지고 자신의 그릇된 생각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교인들은 그런 설교를 들으면서 조각난 성경 구절만 가지고 목사의 주장을 진실된 성경의 내용이라고 오해하고 있고 또 그런 버릇이 들고 나면 성경을 제대로 분석하며 보는 눈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교회에서는 성경을 많이 읽으라고만 주문하면서 제대로 성경을 보는 눈을 가르치지 못하기 때문에 목사들도 그렇지만 교인들의 눈은 눈 뜬 장님의 눈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일년에 성경을 몇번 읽었느냐가 중요한 신앙의 지표가 되지만 얼마나 충분히 그 내용을 이해하고 전체의 논리와 각각 문장과 문맥들의 논리 및 각각의 연게계성에 대한 이해는 관심이 없다. 물론 그런 것이 필요한지도 모르고 있다.
 
동성애는 절대로 죄가 아니다. 물론 육적인 탐욕에 의해 변태적 성욕이 동성애로 번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런 후천적인 경우가 아닌 선천적인 경우는 죄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다른 사람과 다를 뿐이다.
 
인간이 이성애적 성적 본능을 자연스럽게 느끼는 이유는 다수가 그런 경향을 보이는 동질성 때문이다. 만일 동성애가 보편적이었다면 이성애를 지닌 사람이 지금 동성애자들이 받고 있는 어려움을 그대로 받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구약의 사건을 가지고 동성애의 문제를 조명해 보자.
 
근본주의자들이 동성애 문제에 관한 주장을 가지고 창세기 19장의 소돔성의 멸망을 자주 인용한다고 앞에서 말했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떻게 이 사건을 기술하고 있는지 살펴 보자.
 
근본주의자들이 19장을 통해 소돔성의 멸망은 당시 그 곳에 만연한 성적 타락, 특히 동성애적인 성문화 때문이라고 말한다.
 
창세기 19장의 사건은 매우 난해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정확하게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본 의도에 근접하게 이해하려면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 19장 뿐만 아니라 창세기 전체가 그리고 구약 전체가 그렇다.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고대인들은 언어를 상징적 의미를 전달하는 매체로 사용하였다는 것을 이해하여야 한다. 그리고 창세기는 로마서보다 최소한 1500년 정도 먼저 쓰인 책이다. 따라서 그 당시의 창세기 저자가 가지고 있던 언어의 상징성이란 로마서를 쓸 때의 사람들이 지닌 그것 보다 훨씬 더 강하다. 다시 말해 창세기는 상징의 정도가 로마서보다 훨씬 강하게 녹아있기 때문에 해석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성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책이라고 알고 있는 욥기의 경우는 상징적 표현의 극치이다.
 
따라서 창세기 19장의 문장을 하나 하나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므로 여기서는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볼까 한다. 즉, 19장의 내용 전체를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대신에 근본주의자들이 문자주의에 따라 해석하는 것에 어떤 논리적인 모순과 상식을 벗어난 문제가 나타는지를 살펴보고 상징적인 해석이 쉬운 몇몇 문장만 가지고 19장의 소돔성 멸망의 사건을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살펴보자.
 
19장의 소돔성 사건은 18장에서 이어지는 사건이므로 18장의 내용을 먼저 이해하여야 한다.
 
18장에서 아브라함은 이상한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천사라고도 볼 수 있는 사람들과의 대면이고 여호와와의 대화가 동시에 나타난다. 이 사건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우선 천사나 신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가 나타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기술적 문제는 한글 성경에는 주어가 생략된 경우가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말을 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영문 성경을 보더라도 주어가 He 라는 대명서로 나타나기도 하고 the Lord 라는 고유명사로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아브라함과 천사로 보이는 세 사람 가운데 누구인지를 가리는 작업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어떤 사건을 기술할 때에 그 상황 설명을 먼저 기술하는데 이 상황 설명을 단순하게 생각하면 안된다. 그 상황 설명이 가지고 있는 상징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해가 질 때에' 라든지 '동이 트기 전'이라든지, 시간적 상황은 시대적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 또 한 인물이 등장할 때에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까지 나열하게 되는 경우가 자주있다. 성경 학자들은 이런 상황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족보를 중요시 하였기 때문에 그 인물이 어떤 가계에서 태어난 인물인가를 나타내기 위하여 이런 식으로 설명한다고 하지만 이것은 주객이 전도된 설명이다. 유대인은 구약을 가지고 자신들의 민족 문화를 형성하였다. 그들의 문화적 배경은 완전히 구약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이 하루의 시작을 아침이 아닌 저녁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그들의 민족 형성 초기부터 그들만의 특이한 방법을 만든 것이 아니라 창세기 1장에서 하루의 시작이 마치 저녁인 것처럼 기술하였기 때문에 성경의 문자적인 해석 원리를 그대로 따라서 그렇게 형성된 것이다.
 
족보를 나열하는 것도 그들의 문화가 초기부터 그런 관례를 따른 것이 아니라 성경이 그런 식으로 한 인물에 대한 기술을 하는 관례를 따른 것이다. 즉 유대의 전통이 성경을 기술하는 방법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성경의 기술 방법에 따라 그들의 문화적 전통이 형성된 것이다.
 
18장의 사건을 대략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고 아브라함은 자기가 거하고 있는 장막 근처에서 세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들을 자기의 처소로 모시고 와서 대접을 한다. 그러는 도중에 여호와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아들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고 사라는 자신이 이미 늙어서 임신을 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여호와의 말을 비웃는다. 그러나 여호와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말한 후에 여호와는 지금 소돔성에서 죄악이 심하여 그 성을 멸하려 한다고 아브라함에게 말한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처소에 있었던 세 사람은 소돔성을 향하여 떠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배웅하러 가는 도중에 여호와에게 소돔성에 의인이 남아 있어도 악인과 함께 모두를 멸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을 여호와에게 전한다. 그리고는 여호와도 돌아가고 아브라함도 자기의 처소로 돌아간다.
 
문자 그대로 보면 위에서 정리한 그대로 사건은 이어진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으로 문장이 쓰여져 있다.
 
18장 1절에 보면 여호와가 마므리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다고 적혀있다. 여기서 마므리가 어디인가? 팔레스타인 부근의 한 지역이다. 이 장소가 이 사건을 기술하는데 중요한가? 물론 보편적으로 사건을 기술할 때에는 장소와 시간등을 나타내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지만 성경에서는 앞에서 말한대로 그 단어가 지니는 의미에 중요성이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마므리의 원어적 의미는 무엇인가? 유감스럽게도 마므리의 정확한 어원과 의미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학자들의 추측에 의하면 마므리 (מַמְרֵא‎‎)의 어원은 '므르'라는 말이고 이 단어의 의미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제물로 준비된 살찐 송아지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본 사건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정확하게 어떤 의미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어도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도 없다. 아브라함이 100세라는 나이에 이르러 이삭이라는 아들을 얻고 또 그 아들을 제물로 바쳐 제사를 드리려 하는 이후의 사건을 연관한다면 비록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지만 어렴풋하게 두 사건을 잇는 끄나풀 같은 것을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사건의 시작의 때는 정오경이다. 정오는 해가 하늘 위에 높게 떠 있을 때이다. 성경에서 해는 여호와의 의가 세상에 충만할 때를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로 쓰이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 항상 종교적 부패는 어두울 때에 일어나고 그 부패를 척결하는 사건은 동이 트면서 일어난다. 어두움을 물리치는 햇살이 아침에 다시 나타나기 때문이다.
 
결국 아브라함이 이 사건을 맞게되는 시기는 아브라함에게 여호와의 의가 크게 드러나는 때라는 것을 암시하는 내용으로 정오라는 표현이 여기에 나탄난 것 같다.
 
물론 이런 모든 것이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추측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보기에는 성경의 많은 내용이 이런 방식으로 기술되고 또 이런 방식의 패턴을 추출해 다른 문장에도 적용해 보면 일관성을 가지고 논리적으로 맞아 들어간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에 단순히 주관적인 추측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제 2절을 보자. 2절에서는 천사라고 생각할 수 있는 세 사람이 나타난다. 그런데 참 기이한 것은 1절에서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다고 말하고는 2절에서는 갑자기 세 사람이 등장한다. 여호와가 아브라함에 나타난 것은 대단한 사건인데 아브라함은 세 사람을 영접하고 그들을 대접하며 그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대화의 화자가 갑자기 아브라함과 여호와에게로 옮겨 간다. 이것은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의 서술이다. 이상한 장면이 하나 둘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세 사람에게 준비한 음식을 대접하고 그 음식을 먹다가 그들은 갑자기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가 어디 있냐고 묻는다.
 
그들은 갑자기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 그리고 그들은 아브라함의 아내의 이름이 사라인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사라는 장막 안에서 음식을 준비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음식을 어떻게 장만하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이름을 듣고 알았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사라가 어디 있냐고 물었는가? 결국 그들이 사라가 어디 있냐고 물은 것은 몰라서가 아니라 어떤 의미를 지닌 질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지금으로서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단순한 질문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이 일 전에도 이상한 내용이 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하인에게 송아지를 잡으라고 하는 장면이다. 아브라함은 장막에 들어가서 아내인 사라에게 떡을 만들라고 하고 자신의 가축이 있는 곳으로 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그 송아지로 요리하라고 명한다.
 
그런데 살아있는 송아지를 죽여서 가죽을 벗기고 좋은 부위를 잘라내어 요리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다. 분명히 아므라함은 이 세 사람이 어딘가를 가는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잠깐 쉬면서 음식을 먹고 가던 길을 가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가 왜 이렇게 산 송아지를 잡아서 요리를 하면서 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요리를 택했을까? 단지 좋은 음식을 대접하려고?
 
세 사람을 대접하려고 산 송아지를 잡는다는 것도 상식에 벗어나는 일이지만 얼마나 머무를 수 있는지도 모른채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몇가지 사실을 하나로 묶어서 생각해 보자. 우선 마므리라는 단어의 의미이다. 이 단어의 의미는 제사에 쓰일 살진 송아지라고 학자들이 추측한다고 말했다. 또 구약의 제사는 기름지고 살진 소를 잡아서 드리는 것이다. 한가지 더 -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에게 단지 손님 세 명이 드실만한 떡을 구우라고 말하지 않고 정확하게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고 했다. 구약에 보면 고운 가루와 스아를 사용하여 떡을 만드는 장면이 여러번 나온다. 그리고 '스아'라는 도량형의 단위가 여러번 나온다. 이런 표현은 제사와 관계된 문장에서 자주 볼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사건을 기술하고 있는 사람은 이 짧은 사건의 기술을 통해 어떤 개념을 공통적으로 머리에 두고 있는 것일까?
 
바로 제사이다. 제사라는 개념을 가지고 이 사건을 기술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저자가 제사를 어떤 식으로 설명하고 이 사건에 투영되는지는 정확하게 알기는 힘들지만 제사라는 개념이 이 사건 안에 녹아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그리고 뒤에 이어지는 소돔성의 사건도 제사와 무관한 성적 타락이 아니라는 것은 19장에 녹아있는 제사의 암시적 개념을 이해하면 드러나게 된다.
 
18장에서 나타나는 대화를 보면 이해하기 힘든 것이 게속 나타난다. 후반부의 내용은 더 이상 다루지 않고 한 가지만 더 언급하고자 한다.
 
21절에 보면 여호와는 지금까지 소돔성에서 나타난 죄악에 때문에 불의에 대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그에게 많이 들렸는데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직접 확인하기 위하여 소돔성으로 간다고 말한다.
 
근본주의 기독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보수적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은 전능자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예정을 믿는 사람들은 미래까지도 하나님은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 여호와는 확인 작업을 하기 위해 몸소 현장에 간다고 말한다. 전지자이자 전능자가 사실을 확인할 일이 왜 필요한가? 그 자리에 앉아서도 천리를 볼 수 있고 미래를 아는 자가 전능자이며 전지자가 아닌가?
 
이 문제는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생각해 볼 기회를 갖기 바라며 다음 19장의 문제로 넘어가자.

19장의 문제는 내가 전에 다른 곳에 기고한 내용 가운데 동성애에 대하여 쓴 글을 먼저 인용하고 좀 더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 기사에서 몇몇 논객들은 19장에서 '상관하리라'는 단어의 해석에 대하여 성경주석에 나타난 설명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소돔성의 멸망은 성적 문란함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특히 한국의 신학계에서 존경받는 박윤선 박사의 주석을 인용하면서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점을 참고 하면서 아래의 인용문을 통해 드러난 논리를 생각하며 근본주의의 모순을 살핀다면 무엇이 문제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그들이 인용한 성경주석이 설명하는 내용부터 보자.
 
- 그랜드 종합 주석 (성서 아카데미간행)
"상관하리라< 히브리어로 야다>, 원래적 의미는 '직접보고 확인하다'는 뜻의 체험적 인식 상태를 가리킨다. 성경 문학적 표현으로 이는 흔히 성관계를 갖는 것에 대한 완곡(婉曲)한 표현으로 자주 사용된다. 결국 소돔 사람들의 요구는 추악하고 가증스런 남색 (男色, sodomy)을 원한 것이었다 남색자라는 뜻의 영어 단어가 소돔 사람을 가리키는 '소도마이트'(Sodomite)인 사실 하나만 보아도 당시 소돔인들의 동성애로 인한 성적 타락이 얼마나 심각했는가 하는 것를 짐작할 수 있다"
 
- 박윤선 박사의 주석
"<상관한다> 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야다'니, 성적(性的)으로 상관함을 뜻한다. 그들은 극도로 문란한 자들이었다. (유 7, 레 18: 22, 20: 23), 삿 19: 22-29, 참조, 남색(男色)은 고대 가나안 땅에 많이 유행하였던 악독한 죄악이었다."

제가 다른 곳에 실었던 반론을 그대로 적어보죠.

"지금 논쟁이 되는 동성애의 문제와 관련된 근본주의자들의 주장과 그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되는 몇몇 성경 구절을 가지고 성경과 기독교에 대하여 좀 더 거시적인 시각에서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알고 계시리라 믿지만 혹시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과 이 문제에 대하여 더 깊은 지식을 얻기를 원하는 독자가 있다면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으로 썼습니다.
 
동성애를 죄라고 주장하면서 주로 인용한 성경 구절은 로마서 1장과 창세기 19장입니다. 그리고 유다서 1장 7절과 레위기의 규례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이 내용들을 논리적으로 연결하면 근본주의자들의 문제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먼저 한 가지 논리적 연계성의 문제를 제시하겠습니다.
 
창세기의 소돔성의 성적 문란을 지지하는 구절을 유다서 1장 7절로 제시하곤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정당한 논리성을 지닌 것인지 살펴 보겠습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성경무오설과 영감설 그리고 문자주의 해석을 주장하기 때문에 그들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논리적으로 접근하겠습니다.
 
소돔성의 문제에 대한 답은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1) (육체적인) 성적 문란으로 인해 멸망했다.
2) 그렇지 않다.
 
유다서에서 소돔성의 사건을 언급하는 내용도 두 가지 경우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가) 유다서 기자는 창세기의 소돔성 사건을 바로 이해하고 글을 썼다.
나) 그렇지 않다.
 
근본주의자의 입장에서는 나) 그렇지 않다 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나) 항은 제외시키겠습니다.
 
따라서 소돔성의 문제와 그 사건을 인용한 유다서의 내용을 연결했을 경우에 두 가지 경우만 남습니다.
 
1) 소돔성은 (육체적인) 성적 문란으로 인해 멸망했으며 유다서는 이런 사실을 바로 이해하고 이 사건을 인용했다.
 
2) 소돔성은 (육체적인) 성적 문란으로 인해 멸망한 것이 아니며 유다서는 이런 사실을 바로 이해하고 이 사건을 인용했다.
 
그런데 창세기 19장 5절의 '상관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야다(וְנֵדְעָה)'는 근본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성경에서 간음, 강간, 남색, 동성애, 성적 타락 혹은 성관계의 의미를 내포하는 뜻으로 쓰인 경우는 단 한 건도 없습니다. 이것은 주관적 의견이 아니라 단순한 사실입니다.
 
이성이 있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자라면 당연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19장의 내용을 원문을 가지고 보면 그 사건이 시작되는 18장부터 매우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전개되고 있고 각 단어들의 원문적 의미를 살려서 살펴보면 육적인 성관계와는 하나도 상관없는 내용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19장 4절에서 소돔성에서 롯의 집으로 온 자들은 남자들 뿐이라고 주장할 아무 근거도 없습니다. 영어 성경에서 'men'이라고 번역이 되어있기 때문에 남자라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원문은 남자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을 운명을 지닌 존재 - the mortals'라는 의미의 단어를 쓰고 있다는 것은 창세기 기자가 이 사건을 최소한 성적인 타락의 시각에서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5절에서는 소돔성에서 온 자들(the mortals)이 롯의 집에 있는 'messengers'를 상관하리라고 할 때에 'the mortals' 를 상관하리라고 쓰여있습니다.
 
이런 단어들이 선별되어 쓰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개인의 해석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최소한 성적인 타락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그 뒤에 나타나는 롯이 두 딸을 내어주는 장면을 천사 대신 자신의 두 딸을 강간하라고 내어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상적인 인간의 이성을 지닌 자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상황 또한 히브리어 원문의 단어들과 이 소돔성 사건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 그리고 성경 전체에 나타나는 영적 교훈의 전달 방법등을 이해하면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됩니다.
 
성경은 매우 논리적으로 쓰여있기 때문에 그 논리를 풀어나가는 방법만 터득하게 되면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많은 내용이 술술 풀리게 되어있습니다.
 
다시 유다서의 문제로 돌아가 두 가지 가능성 1) 과 2)를 생각해 보면 당연히 1)은 인위적인든 실수이든 단어 몇개의 오역으로 인한 바르지 못한 결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2)의 경우가 논리적으로 타당한 결론입니다.
 
즉, 소돔성의 사건은 육체적 성적 타락으로 인한 멸망이 아니고 이런 사실을 유다서 기자는 바로 이해하고 인용했다는 결론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렇다면 유다서 기자가 말하는 간음이란 무슨 의미에서 쓰였는가 입니다.
 
간음이라는 단어가 육적인 간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 단어는 영적 간음을 의미하는 단어로 쓰였다는 결론뿐입니다.
 
그렇다면 간음이라는 단어가 유다서에서만 영적 간음을 의미하는 단어로 쓰였을까요? 만일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간음과 유다서 기자가 말하는 간음은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고 신약은 혼란을 초래합니다.
 
이런 혼란을 보면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최소한의 논리적 결론은 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문자주의적 해석은 혼란만 초래하고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결론입니다.
 
신약을 처음부터 다시 해석해야 하고 구약 또한 각 사건을 다시 조명해야 합니다. 구약의 사건을 다시 조명하여 그 의미를 재구성한다는 것은 신약에서 예수나 다른 사도들이 구약을 인용할 때에 새로운 의미에 따라 새로운 해석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를 완전히 뒤집어서 다시 보는 작업을 필요로 합니다.
 
거꾸로 말하면 기독교의 교리와 신학적 기초를 완전히 재구성하는 것이죠. 아니, 기독교라는 종교에 신학이 필요한지 아닌지 혹 이것이 가능한지 아닌지 조차 재고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유럽에서는 이 작업을 300년 전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일반인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을 뿐입니다.
 
만일 이런 사실을 근본주의자나 기독교에 대하여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설명을 하면 쉽게 접할 수 있는 반응은 '그렇다면 제대로 된 해석은 무엇이냐?'라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가깝게 접근하기 위해서 필요한 여러가지 것들을 제시하고 그것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수는 있습니다.
 
여기에 필요한 지식은 광범위합니다.
 
이에 필요한 기초적인 지식만 습득하더라도 한국의 근본주의 기독교에 대한 이해 및 그들이 주장하는 교리와 성경 해석의 오류의 역사적 논리적 근거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걸림돌이 되는 것은 이런 것들에 대한 책 중 다수가 근본주의자들이 왜곡하거나 편향된 시각에서 적은 책들이기 때문에 중립적이고 바른 시각에서 기술된 사실을 접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 역사에 관하여 대표로 꼽는 책으로는 Philip Schaff의 책이 있지만 유니온 신학 대학 교수였던 그의 책도 정통 기독교의 범주내에서 적은 것이기 때문에 많은 진실들이 그대로 드러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국 내에서도 유럽의 학자나 미국의 동북부 지역의 학자들의 책이 번역되어 출판되는 경향이 늘고 있는 추세라 앞으로는 이런 지식의 공유 및 공감대의 형성이 쉬워지리라 생각됩니다.
 
이런 이해가 세워지고 나면 '그렇다면 제대로 된 해석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질문자가 조금씩 열어가게 됩니다.
 
제 스스로의 경험이기도 하고 제가 다른 사람을 가르쳐 본 경험이기도 합니다.
 
몇 가지 예를 제가 적겠습니다.
 
동성애의 문제는 고대인의 시각과 현대인의 시각이 매우 큰 차이가 있음을 이해하면서 고대문화에 대한 기초적 이해를 필요로 합니다.
 
현대인은 동성애 문제를 윤리적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대인은 이 문제가 남성 우월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합니다. 고대인은 성관계를 통해 남성우월주의를 상징적으로 형성하게 됩니다. 즉 성관계시에 남자가 여자에게 침투한다는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이해가 되는 이유는 고대인은 인간의 몸의 각 부분에 상징성을 부여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은 한자권의 동양 문화에서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한자에서 인간의 장기를 표현할 때에는 달 월(月)자를 사용합니다. 음양의 조화를 인체의 해부학에 적용합니다. 동양적인 상징성이죠. 마찬가지로 중근동의 고대에서도 유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남자의 성기는 여자의 성기내로 침투(penetrate)하여 정복하는 권위를 지니고 있다는 상징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즉 남자의 성기를 침투하여 정복하는 공격적 상징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처녀성이 중요하게 됩니다. 일단 정복 당하여 굴복한 여자를 또 다시 정복한다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에 한번도 침투 당한 적이 없어서 굴복하지 않은 대상을 처녀로 생각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자는 정복의 대상이고 남자는 정복의 권위를 지닌 존재로 여기게 되어 고대인들은 남자는 완전한 인간으로 그리고 여자는 불완전한 인간으로 생각합니다.
 
고대인들의 입장에서 동성애가 문제가 되는 경우는 남자들 끼리의 동성애, 즉 동일한 권위에 대한 충돌이 나타날 때입니다. 여자들끼리의 동성애는 정복이라는 개념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남색이라는 개념만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남색이라는 표현을 통해 질서의 문제에 대하여 상징적 표현이 나타나지만 여성들간의 동성애를 보여주는 상징적 표현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육적 동성애가 정말로 질서의 파괴라는 개념으로 죄라고 인정하고 있다면 남자들 간의 남색과 여자들 간의 여색도 동일하게 다루었어야 되는 것입니다.
 
고대에는 미동(美童)을 성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 때에 미동은 남자 아이이지 여자 아이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정복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는 그 대상이 동일한 권위를 지닌 남자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적 만족을 위해서 그들을 성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정복자로서의 권위에 대한 확인과 과시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를 데리고 무슨 성적 만족을 느끼겠습니까?
 
이런 사고는 중세까지도 이어집니다. 루터가 여자에 대하여 어떤 발언을 했는지 찾아보시면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남녀의 평등이란 말이 사회에 나타난 것은 백년도 되지 않은 일입니다. 고대의 사상이 초기 로마 사회에 이어지고 그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인 가운데 성경을 해석하여 기독교의 교리가 세워지고 그런 교리 아래 서구 문화가 성립이 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이런 경향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고대 문화의 특징을 제대로 이해해야 왜 성경에 성적인 표현이 빈번하게 등장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구약에서 왜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여 규례를 세우고 신약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교회 내에서 차별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지도 이해하실 것입니다.
 
이 모두가 완전한 인간으로 상징되는 남자와 불완전한 인간으로 상징되던 여자를 이용한 상징적 표현일 뿐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신은 당연히 성별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는 아들, 아들, 아들만을 부르며 아들을 원한다고 말하고 예수도 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면 자신을 신의 아들로 표현합니다. 딸은 신의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완전한 존재로서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남자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상징적인 존재로서의 남자와 여자가 구분이 된다는 이해를 지니고 성경을 보면 남녀의 구분이 되는 수 많은 사건이 매우 논리적인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아래 내용 가운데 남자가 여자와 동침하듯 같은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는 레위기의 규례를 인용한 경우를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또한 영적 가르침일 뿐입니다.
 
례의기의 규례를 보면 여자가 사내 아이를 출산한 경우와 여자 아이를 출산한 경우에 정결법이 다릅니다. 이런 구분을 명한 것은 육적인 구분으로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의 차이를 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의 탄생을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규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서 하지 않겠지만 이 규례도 매우 논리적인 이해가 충분히 가능합니다.
 
근본주의자들은 레위기의 규례를 가지고 정말로 육적인 규레라고 설명을 하려고 애를 쓰지만 도저히 말도 안되는 것처럼 보이는 규레에 대하여는 설명을 하지 못합니다.
 
한 가지 예로 먹을 수 있는 곤충에 관한 규례입니다. 날개가 달리고 네 발로 땅을 기는 곤충에 대한 규례가 있습니다. 안티 기독교인은 세상에 네발 달린 곤충은 없다고 말하면서 성경은 오류 투성이라고 주장하지만 근본주의 기독교에서는 이에 대하여 변변한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안티 기독교인이 이런 오해를 하게 된 근본 원인도 근본주의자들의 문자주의적 해석 때문입니다.
 
날개가 달리고 네발 달린 곤충을 정말로 곤충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날개가 달리고 네발 달린 곤충은 곤충이 아니라 인간의 종류 중의 하나입니다. 율법에서 말하는 모든 짐승과 곤충은 다 인간의 종류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을 정말로 짐승으로 혹은 곤충으로 또는 물고기로 해석하였기 때문에 말도 되지 않는 규례로 안티 기독교인들이 오해하면서 성경을 한심한 책으로 비난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면서 동물들을 창조합니다. 그런데 그 종류를 보면 땅에 기는 짐승과 하늘을 나는 새와 바다에 사는 물고기 입니다. 이는 모두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종류입니다.
 
바다에 사는 물고기는 신에 대한 개념도 없이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입니다. 물고기와 같이 본능만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성경에서 바다는 인간이 사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갈릴리 바다 근처에서 활동을 많이 합니다. 그리고 갈릴리는 호수이지 바다가 아닙니다. 예수 당시의 사람들은 분명히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복음서에서는 갈릴리를 바다라고 말합니다. 이 또한 구약의 상징적 표현에 익숙한 당시의 사람들이 바다라는 단어가 이 세상을 뜻하고 있다는 상징성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적으로는 호수이지만 바다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암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창세기로 돌아가서 이렇게 인간의 종류는 기본적으로 세 종류입니다. 하늘을 나는 새와 땅을 기는 짐승과 바다에 사는 물고기 입니다. 바다에 살던 물고기가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신을 찾게 되면 땅으로 올라와 땅에 기는 짐승이 되고 그런 짐승으로 살다가 이 땅에서 완전히 마음을 떼어 버리면 하늘을 나는 새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은 공중을 나는 새도 먹이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이 세상에서 마음을 떼고 살아간다고 해도 육신을 살리기 위한 먹을 거리를 하나님은 제공하시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11장에 나타나는 곤충도 이런 의미로 인간의 한 종류를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날개가 있다는 것은 땅에서 떨어져 새처럼 하늘을 날으려는 의지가 있다는 것이고 네발로 땅을 긴다는 것은 아직은 이 세상에 발을 디디고 사는 부정한 인간이란 의미입니다. 그래서 먹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 뛰는 다리가 있는 것은 먹어도 된다고 하는 이유는 땅에서 벗어나 하늘로 날으려고 하는 의지가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이런 인간은 정결하여 거룩함을 입은 자들 가운데 들여도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자들이 구약에서 말하는 선민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선민이 아니라 이런 영적 이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선민이라고 고대 사람들은 구약에 적어 놓은 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육적인 규례라고 생각하고 육적으로만 지켰기 때문에 당연히 이스라엘은 멸망 당하고 그들의 종교는 부패하게 되어 예수가 그들이 지니고 있던 율법의 근본적 이치를 본래의 의미대로 드러내면서 율법을 폐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려고 왔다고 말한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아담은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줍니다. 이 장면은 정말로 호랑이, 사자, 코끼리와 같은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사건입니다. 이 장면에서 이해해야 할 것은 이름을 지어주는 행위가 무엇을 말하는가 입니다. 물론 아담은 인류의 최초의 인간이 아닙니다. 누구나가 창조주의 뜻대로 살면 아담이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이 나타나는 이야기를 썼기 때문에 창세기라고 부른 것입니다. 아담과 같은 자의 인도에 따라 누구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과정을 거치면 그 피조물은 아담과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부터 이름을 부여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 모두 상징적인 이야기를 구성하면서 이치를 나타내는 것이죠.
 
고대 사람들의 상상력과 그들의 상징적 연계를 통한 논리성은 정말로 대단합니다. 세상을 이해하면서 그 이치를 이렇게 완벽한 논리를 상징을 통하여 나타낼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로 경이롭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수천년간 인류가 지녀왔나 봅니다. 물론 썩어 빠진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강압도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지만요.
 
구약을 보면 여호와가 이름을 부르는 인간은 대부분 선택된 자들입니다. 선지자들을 부를 때에도 '인자야'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아무리 선지자라고 해도 아직은 완전히 여호와가 말하는 구원의 안식에 들어간 자가 아니라 아직도 쓰임 받는 정도의 인간이기 때문에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에도 이름이 쓰여있는 책에 관하여 말합니다. 흰 돌에 이름이 쓰여지는 것지요. 구원을 받은 자는 이 책에 이름이 적혀지게 되고 이 이름이 있어야 하나님은 '인자야'라고 부르는 대신에 이름을 부르는 이치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짐승들에게 이름을 지어줍니다. 즉, 아담을 통해 구원의 대상이 되는 자들이 선별이 되고 그래서 여호와는 아담이 이름을 지어주는 광경을 보면서 제대로 하고 있나 아닌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아담이 이름을 지어주는 생물 가운데 물고기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당연합니다. 그들은 신을 알지 못하고 동물적인 본능만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름을 부여 받을 수 없는 대상이기 때문에 제외되는 것입니다.
 
신약은 구약의 이런 상징적 표현을 깨달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 쓰여졌기 때문에 구약을 바로 이해하고 있다면 신약에서 나타나는 예수의 비유적 표현과 그 표현들에 나타난 이치를 근거로 말하고 있는 사도들의 글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론이나 예수의 신인론 또한 기독교 초기 형성 당시의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런 이론이 출현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이해가 갑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일반 기독교인이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는 예수와 열두 제자가 유대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신약 성경이 쓰여질 당시에는 신약이라는 성경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고서 읽는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삼위일체라는 개념도 없었고 예수가 인간인지 신인지 아니면 인간이자 동시에 신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합니다.
 
또 한가지 일반 기독교인이 모르고 있는 사실은 유일신에 대한 고대 유대인의 개념입니다. 고대의 유대인은 유일신이라는 개념을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여호와는 언약을 통해 맺어진 유대인의 신입니다. 즉, 유대민족은 여호와라는 신과의 계약을 통해서 여호와라는 신만을 섬기기로 약속했고 여호와라는 신은 유대민족을 보호하기로 약속했다는 계약 관계를 그들은 지니고 있었을 뿐입니다. 즉, 유대인은 여호와라는 신을 그리고 이방 족속은 그들의 신을 섬긴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에게 내려준 십계명은 나 외의 신을 섬기지 말라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또 구약에서 바알 신과 겨루는 장면이 나오는 이유도 유대의 신과 이방민족의 겨룸을 통해 가장 위대한 신으로 만들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유대인에게는 신들 중에 가장 위대한 신이 여호와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고대의 유대인들은 지금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일신 사상 같은 것은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초기 기독교 형성과정의 문제를 볼 때에, 열두 제자는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은 것처럼 나타나지만 바울은 이런 점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만의 복음관을 형성하면서 정통주의자들의 입맛에 맞는 기독론을 펼쳐 나갑니다. 물론 정통주의자들의 변개가 많이 개입되기는 했습니다.
 
초기의 기독교는 에비오나이트, 마르시오나이트, 영지주의 및 초기 정통주의자들의 각축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정통주의자들의 문제는 다른 모든 분파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논리적인 모순을 극복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예수가 단지 신이라는 주장을 반대하려면 예수가 인간이라고 주장해야 하지만 다른 분파에서 예수는 단지 인간일 뿐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과 맞서기 위해서는 다시 예수는 단지 신이라고 주장해야 하는 모순이 가장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고안한 것이 예수는 완전한 인간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완전한 신이라는 주장입니다. 양날의 칼을 가지게 된 셈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또 구약의 여호와라는 유일신 외에 예수라는 또 다른 신의 등장을 초래하므로 유일신 사상에 모순을 가져옵니다. 이 문제는 예수 사후에 거의 300년 가까이 풀지 못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었던 아타나시우스가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변화는 급물살을 타게됩니다. 즉 구약의 여호와가 성부가 되고 그의 영이 성령이며 그의 아들인 성자는 세개의 위로 구성된 하나의 신이라는 개념을 창안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가 탄생한 배경입니다. 신약 성경도 없이 그들만의 병증법적 방법만 가지고 만들어진 것이죠. 이렇게 해서 종교적 적(敵)의 제거 작업에 들어가고 그 뒤를 이어 신약 성경의 정경화 작업에 들어갑니다.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교리에 따라 구미에 맞는 문서들을 고르고 때로는 그 문서에서 필요 없는 부분은 자르고 부족한 부분은 채워넣는 방식을 통해 신약 성경 27권을 만들어 발표합니다.
 
예수의 신인성과 삼위일체는 양날의 검과 방패가 된 셈입니다.
 
그 당시에 여러 지역의 교회에서 성문서로 받아들여지던 문서들 가운데 정경에 들지 못한 문서는 폐기하라는 명령이 내려지고 그것을 거부하면서 이런 가치있는 성문서들을 보존하기를 원하던 사람들은 폐기처분의 위기에 놓인 문서들을 모아서 땅속에 파묻어 보관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영지주의 문서라고 불리는 도마복음이 포함된 나그 함마디 문서들입니다. 이 나그 함마디 문서들은 영지주의 문서 뿐만 아니라 정경에 포함된 문서들의 사본들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즉,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현재 신약에 포함된 문서뿐만 아니라 영지주의 문서라고 일컫는 문서도 중요한 기독교적 진리를 담고 있는 성문서라고 여겼다는 사실을 나그 함마디 문서의 발견은 보여줍니다. 더군다나 나그 함마디 문서가 발견된 곳은 최초로 삼위일체를 말하였던 아타나시우가 관할하던 알렉산드리아의 수도원에서 가까운 곳입니다.
 
기독교에서 주장을 제시할 때에 요세푸스를 인용하는 내용이 있는데 이런 고대의 교부나 역사가의 글을 대할 때에는 몇가지 사실을 인식하면서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로 지금 기독교에서 자주 인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고대 교부와 역사가들은 당시 정통주의자들의 입맛에 맞는 기록을 남긴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역사적 기록은 왜곡된 것이 많고 신뢰도가 떨어진다고 사가들은 말합니다. 심지어 그들의 기록 가운데는 기독교의 역사에 대하여 비판적 시각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내용이 있음에도 근본주의 기독교에서는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교부들의 주장은 대부분의 경우 변증법적 논술을 통해 당시의 다른 기독교 분파의 이단성을 조명하는데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반대를 위한 반대를 주장하기 위해서 논리를 펼쳐 나간 것일 뿐입니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기술되듯이 기독교의 역사는 이렇게 승자의 자리를 차지한 정통주의자의 편에서 기록되었고 진실을 기록한 많은 자료들은 태워지거나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의 고고학적 발굴 작업이 몇몇 자료들이 빛을 보게 되었고 그것이 단서가 되어서 지금은 초기 기독교 역사에 대하여 지금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사실들에 다가서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구약학의 전문가로 알려진 박윤선 박사의 주석을 봅시다. 주석을 만드는 작업이 어떤 작업인지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단지 유명한 신학자가 남긴 주석이라서 덥석 믿어버리는 실수를 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전에는 컴퓨터가 없었기 때문에 성경 내에 어떤 단어가 어디에서 어떻게 쓰였는가를 분석하는 작업은 매우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당시의 히브리어나 헬라어에 대한 이해의 부족과 고고학적 자료의 미비함 그리고 불충분한 언어학적인 원어의 분석 때문에 주석가들은 대부분 자신이 배운 내용에 자신이 지닌 새로운 지식과 개인의 생각을 더하여 새로운 주석을 만드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박윤선 박사도 구약 전체의 문장을 하나하나 점검하는 수고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주석을 만들었습니다. '야다'라는 단어가 성경 전체에서 몇번이나 나타나고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를 스스로 검증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전의 주석가들이 남긴 내용을 거의 변화 없이 옮긴 것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경 전체가 컴퓨터에 데이터 베이스로 저장되어 있어서 단어 하나만 검색하면 그 자리에서 그 단어가 나오는 문장을 순식간에 찾아줍니다. 저도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히브리어 성경을 검색하였습니다. 2-3초도 걸리지 않습니다.
 
주석 얘기가 나왔으니 웃지 못할 얘기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요즈음 킹 제임스 버전의 한글판 번역본을 광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킹 제임스 버전이 얼마나 열악한 상태에서 허겁지겁 출판한 성경이라는 것을 사본학을 공부하신 분은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경악한 것은 이 한글판 킹 제임스 버전을 광고하면서 여기에 주석을 대한 스코필드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광고는 마치 스코필드가 하나님의 영감이 강하게 임한 대단한 성경 해석가이며 주석가인 것처럼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스코필드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고 나면 이런 광고는 못 할 것입니다. 19세기 말 미국에서 태어난 이 사람은 술 주정뱅이에다가 고위직에 오르면서 횡령과 배임 및 문서위조 죄를 저지르고, 상습 간통범이고 아내와 딸이 있음에도 그들을 부양하지 않아서 아내에게 이혼소송 당하여 이혼 당한 사람이 스코필드입니다. 20세기 초까지 주석은 있었지만 주석 성경이라는 것은 있지 않았는데 이 사람이 처음으로 미국에서 주석 성경이라는 것을 출판해서 천만부 이상을 팔아 엄청나게 유명해지자 미국의 보수 기독교에서 삯군 목사짓을 하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신학교 근처에 가 보지도 못했는데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주석에서 특이한 것은 계시록의 해석인데 현재 한국의 보수주의 교단에서 말하는 종말론의 효시가 되는 주장을 펼친 사람입니다. 휴거니 천년설 같은 내용이 신학적 종말론의 내용을 부각하는데 일조를 담당한 사람이죠. 물론 이런 것도 그의 독창적인 내용이 아닙니다. 19세기의 영국의 존 다빈이라는 멍청한 목사가 스코틀랜드의 어떤 소녀가 예수가 재림하는 환상적 체험을 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후에 계시록을 가지고 종말의 날짜를 계산하여 시한부 종말론을 만들었습니다. 스코필드는 다빈 목사의 계시록 연구에 영향을 받아 휴거라는 개념을 집어넣고 천년설 같은 내용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런 내용이 그의 주석에 들어가서 기독교인들은 새로운 종말론을 가지고 법석을 떨기 시작하고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은 더 신이 나게 된 것입니다. 한가지 더 재미있는 사실은 스코필드는 한국과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에서 존경하는 무디의 절친한 친구였다는 사실입니다. 무디의 장례식에 집례를 했을 정도이니까요.
 
이런 자가 쓴 주석을 가지고 공부한 목사나 신학자들이 미국의 근본주의 신학을 수입하고 그것의 변종인 복음주의 신학을 수입하여 한국의 기독교의 토대를 다져온 것입니다.
 
그가 죽은 지 100년이 지난 뒤 스코필드의 망령이 한국에서 부활하는 것을 보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알고 그런 광고를 하겠습니까? 모르니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한국의 신학은 바로 배우지 못한 자들이 세워 나간 신학의 기초 위에 또 다른 엉뚱한 기독교의 교리들이 더하여져서 더 이상은 기대할 것이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소나 개나 아무나 써 놓은 책들이 마치 성경의 진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인식하면서 선령한 사람들의 머리만 쓰레기로 가득하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제가 자주하는 말이지만 근본주의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에 그 안에 머무르는 한 절대로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그 곳에서 빠져 나오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 안에 머무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힘이 든 이유는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부인하고 새로 시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주 말하지만 목사는 권위와 명예 그리고 먹고 사는 문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목사라는 직업을 버려야 하고, 장로는 그 동안 자기가 공을 들여 쌓아 놓은 종교적 명예를 다 버려야 하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부인하고자 하는 본능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지금까지 자신은 구원을 받았다고 굳게 믿고서 죽으면 천국 간다고 생각했는데 만일 이것이 아니라면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해도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모르는 상황이 닥치게 되므로 차라리 귀를 막고 이성적 눈을 가리고서라도 옛것이 옳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악다구니를 쓰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조금이라도 '혹시 저들의 말이 옳을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들면 그것은 사탄이 주는 유혹이라고 생각하면서 단칼에 잘라버리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죠. 이것이 서구가 길고 긴 중세의 암흑기를 지나온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이것이 근본주의자들이 이성적으로 무뇌아가 되는 이유입니다. 인류 전체가 이런 무뇌아적인 상태를 겪었던 기간이 몇 백년도 아니라 이천 년 가까이 됩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이제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것이 19세기 유럽에서는 현대신학과 자유신학으로 나타나고 과학의 발전은 기독교가 주장하던 세계관의 모순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따라서 유럽에서는 당연히 교회가 죽어갈 수 밖에 없습니다. 유럽, 특히 북구 유럽의 기독교인 가운데 예수가 실제적인 인물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모두 신화적 인물이라고 생각하죠.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한국의 기독교인은 얼마 없을 것입니다. 매우 충격적인 사실이죠. 제가 외국 생활을 오래해서 외국인에 대하여 많이 압니다. 세상은 정말로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에디오피아 같은 경우에는 구약에서 아무 언급도 없이 사라진 법궤가 모셔진 곳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평생 지키는 기독교의 에디오피아 정교가 있습니다. 몇십평 되지 않는 장소에 그들의 전승에 따라 법궤가 있다고 믿고 그 곳을 평생 떠나지 않으며 죽을 때까지 지키는 기독교인이 있습니다. 담장도 넘어서지 못합니다. 먹을 것도 다른 사람들이 문 밖에서 전해줍니다. 한국의 근본주의 기독교인이 이런 모습을 보면 한심하다고 말하겠지만 독일의 기독교인이 한국의 교회에서 헌금 바구니에 십일조를 넣는 것을 보면 한심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들은 십일조가 뭔지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십일조에 대한 설명을 먼저 해주어야 합니다.
 
밖에 나와서 보아야 자기가 있던 곳의 문제가 보입니다. 세상도 마찬가지이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물안에서는 하늘이 동그랗게만 보일 뿐입니다.
 
절대로 한 샘물에서 단물과 쓴 물을 동시에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적은 양의 쓴 물이 전체를 쓰게 만들기 떄문입니다. 이것이 시간이 지나 전체가 쓴물이 된 것입니다.
 
긴 설명을 드렸지만 의문도 많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전체적 논리를 말하기에는 공간이 협소하기 때문에 의문점이 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의 개인적인 해석일 수도 있지만 고대인이 지니고 있던 언어의 상징적인 표현 기법을 이해해야만 최소한 그 의미에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은 동의하시리라 봅니다.
 
근본주의 기독교는 물론 이렇게 해석하면 이단이라고 하지요. 기독교가 왜 그토록 이단 논쟁을 즐기는 지도 초기 기독교의 형성사를 공부하면 쉽게 이해가 갑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토양속에서 형성된 것이 기독교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잘못된 종교이고 예수는 가짜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저는 다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는 인간들에 의해 부패된지 이천 년이나 된 껍데기뿐인 종교라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가 역사적 인물인지 아닌지 혹은 그가 신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도대체 그가 말한 진실이 무엇이었냐를 바로 찾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원래의 것을 복원해야 그것이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내린 결론은 예수가 말한 것에는 상당한 가치가 들어있는 소중한 것들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말한 것을 따라 사는 것이 인간이 지니고 잇는 가치를 바로 보고 또 발휘하는 것이며 그것이 인간 사회를 밝히는 빛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이 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불교와 같은 타종교는 틀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성경에 대한 지식과 깨달음이 다른 종교의 경전에 관한 것 보다 더 많고 깊기 때문에 성경에 관심을 가지고 많이 볼 뿐입니다.

창세기 19장 5절의 '상관하다'라는 헬리어 원어는 'shall know' 라는 뜻의 '야다'가 맞습니다. 그런데 그 단어가 구약 가운데 그랜드 종합 주석에서 주장한 것처럼 '성관계를 갖는 것에 대한 완곡(婉曲)한 표현으로 사용된' 경우는 한번도 없습니다. 이 단어가 나타나는 구약의 구절을 모두 검색하여 알려 드리니 찾아 보십시요.
 
그리고 영어의 sodomite는 소돔성에 대한 잘못된 번역과 해석이 생기고 난 이후에 파생된 단어입니다. Anglo-Saxon 계통의 언어를 구사하는 국가는 기독교 발생 이후 한참 뒤에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은 아실 것입니다. 이런 단어가 영어에는 매우 많습니다. 성경의 잘못된 번역과 그에 따른 오역을 검증하지 않은채 기독교의 교리를 받아들인 결과일 뿐입니다. 님이 말하는 논리가 얼마나 한심한 논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가 서구 사회에는 매우 심각하게 번져있습니다. 지금 서구화된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19:5 (본문), 사사기 18:5, 사사기 19:22, 이사야 5:19, 이사야 41:22, 이사야 41:23, 이사야 41:26, 호세아 6:3, 요나 1:7"
 
이제까지 근본주의 기독교가 동성애에 대하여 주장하는 성경적 근거라는 것에 어떤 논리적 오류가 있는지를 몇몇 성경 구절을 가지고 살펴 보았습니다.
 
만일 이번 글에서 논리적으로 제시한 내용을 거부하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자신이 지니고 있는 논리를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십년 혹은 이 십년을 기다린 후에 이 사회에서 동성애에 대하여 어떤 윤리적 잣대를 제시하는지를 살펴 보고 또 그 때의 근본주의 기독교의 주장은 어떻게 변하는지를 비교하여 보아야 할 것이죠. 그때까지 근본주의 기독교의 목소리가 사회에에서 쉽게 들릴 정도로 세력이 남아있게 된다는 가정을 하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