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을 읽느냐는 문제는 정말 중요합니다.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어떤 책을 읽으며, 어떤 생각을 하는가...라고 봅니다. (직접, 간접)경험의 환기, 이를테면 다른 텍스트와의 직조와 같은 것들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

  가령 저는 소설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요 며칠 박범신의 ‘은교’를 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재미있게’란 여러 가지 재정의가 가능한 말인데요. 뭐라 설명하더라도 순간적으로 또 고집스럽게 각자의 ‘재미’를 떠올리실 겁니다. 바로 그런 부분이요. 각 사람마다 다른 ‘재미’와 같은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대목이 있거든요. 조금만 적어볼게요.

...어떤 낱말에서 각자 떠올리는 이미지의 간격은 때로 저승과 이승만큼 멀거든. 가령 네게 연필은 연필이지만 마음 놓고 공부할 환경을 살지 못했던 내게 연필은 눈물이다. “할아부지. 제 연필 좀 깎아주세요”라고 네가 말하면 나에겐 그 말이 이렇게 들린다. “할아부지. 제 눈물 좀 닦아주세요.” 단언컨대, 너와 나 사이에서 이보다 큰 슬픔은 없다. 마찬가지로 너에게 처녀는 그냥 처녀일 뿐이겠지만, 나에게 그것은 처음이고 빛이고 정결이고 재단이다...

  소통을 위한 필연적 상징화와 그 상징화의 불완전함에 대해 우리말의 운을 살려 아름답게 그려낸 이 부분에서 저는 잠시 머물며, 한숨을 한 번 쉬고... 프리초프 카프라의 ‘현대 물리학과 동양 사상’의 한 대목을 기억해냈습니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아무리 명료하게 보이는 말이나 개념도 그 모두가 적용의 범위에 있어서는 꼭 어느 한계가 있는 법이다.’라는 말에서처럼, 특히 우리를 가르쳐 온 현대 물리학에서 그것은 더욱 분명하다.  이 개념적 지식의 한계나 상대성을 끊임없이 자각하는 일은 우리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실재에 대한 우리의 표상이 실재 그 자체보다 훨씬 파악하기 쉽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 개념들과 상징들을 실재 그 자체로 곧잘 혼동하기도 한다...

...직관적인 통찰은 그것이 일관성 있는 수학적 체계로 형성되고 일상 언어로 해석되어 보완되지 않는다면 물리학자들에게는 무용한 것이다. 이 기본 작업에 있어서 추상화가 가장 요긴한 특성이다. 그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실재의 지도를 그려 내는 개념들과 상징들의 체계로 짜여진다. 이 지도는 다만 실재의 어떤 특성만을 나타낼 따름이다. 우리들은 이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가를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릴 적부터 비관적인 분석 없이 우리의 지도를 조금씩 덧붙여 그려 온(편찬해 온)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일상 쓴ㄴ 언어의 말 하나하나들은 분명하게 규정된 것이 아니다. 말들이란 몇몇의 다른 의미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들의 대부분은 우리의 마음 속을 막연하게 지나갈 따름이고, 우리가 어떤 단어를 들을 때에는 대체로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은교’와 ‘현대 물리학과 동양 사상’은 동양과 서양이 다르고, 문학과 비문학이 다르고, 20세기와 21세기가 다르지만 같은 고민을 공유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이런 '결'을 느껴보는 것이 책 읽는 ‘재미’라 생각합니다.

  필독서를 지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아주아주아주 어릴 때부터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일단 용량이 좀 있어야 책 마다 뿜고 있는 숨을 느끼고, 결을 맞출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엔 필요에 따라 찾아가는 겁니다. 누구에게는 필독서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 밖일 수 있습니다. 관심 밖의 것을 억지로 읽을 때 그것은 매우 빠른 속도로 증발되어 버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