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에 있는 엠프공장은 공장형 아파트 꼭대기층에 있는데 요즘 오디오기기들이 인기를 얻어 아주 잘 나가고 있는 회사입니다.
사장 말에 의하면 특히 최근 출시된 프리엠프가 미국에서 관심을 끌어 그쪽에 수출물량 대느라고 국내수요는 미쳐 신경 못쓴다는
것입니다. 아마 오디오에 웬만큼만 관심있는 분이라면 이정도 설명만으로 벌써 이 회사 이름을 눈치챘을듯 합니다.

 오디오 개발자들 이야기를 듣다보면 한가지 흥미있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건 뛰어난 오디오 개발자는 공대나 공학도출신 보다
차라리 문과 출신이 더 많고 질적으로 출중하다는 점입니다.처음에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이런저런 이치를 따져보고 차츰
수긍이 깄습니다. 한마디로 오디오는 음악적 소리를 창출하는 기기이고 그것 자체가 예술적 감수성과 깊이 관련된 작업이란 것이죠.
이날 만난 사장님도 불문학도 출신이어서 음악에 관한 조예는 물론이고 프랑스문학에 관해서도 많은 얘깃거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손님으로 간 K와 나는 사장실 겸 미니 시청실에 자리잡고 앉았습니다. 파워 프리 엠프는 이 회사 제품으로 연결이 되어있고 스피
커는 최근 외부 인사가 최근 이 회사와 손잡고 새로 개발한 시제품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신제품 스피커도 중형 이상이고
뿜어내는 소리의 질도 만만치 않더군요.
 "어떤 곡을 들을까요?" 사장이 나를 쳐다봅니다. 나는 또 K를 보고 물었지요.
"자네 듣고 싶은 곡 있어?"  그러자 K가 "아까 선배님 오면서 얘기하신 그 곡 있어요? 그 곡 듣고 싶은데요." 라고 말합니다.
"아, 쇼팽 바카롤" 내 입에서 이 말이 떨어지자 기다렸다는듯 사장이 LP 음반 한장을 진열장에서 꺼내왔습니다. 그리고 아주
자랑스러운듯 의기양양하게 말합니다.
 '선생님 말씀 듣자말자, 이 판을 수배해서 즉시 구했습니다. 페를뮤터, 역시 좋던데요."
당장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사장은 음반구입의 특수 루트를 갖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긴 남보다 고가를 지불하면 다소 희귀음반
일지라도 뜻밖에 쉽게 구해지기는 한다.
 
 "적어도 8분 52초 동안만은 행복감을 느끼게 될 거야. 이 사람 연주가 딱 그 시간이 걸려."
사장이 오디오 작동준비하는 동안 내가 K에게 말했다.K는 소리없이 시니컬하게 웃었다. 첨 보는 사람이 봤다면 누굴 비웃는듯한
우울하고 기분나쁜 웃음이었다. 그건 병고와 싸워온 오랜 이력에서 빚어진 웃음이란 걸 나는 안다. 블라도 페를뮤터의 매혹적인
쇼팽곡 연주가 딱 8분52초만에 끝나버리고 곧 조용해졌다. 음악은 언제나 끝나면 흔적도 없다. 다만 마음 속에 잔상이 남는다. 여
운이라고 할까? 나는 K의 감상담을 듣고 싶었다. 내가 그다지도 K에게 입술이 닳도록 이 짧은 곡의 매혹과 미덕에 관해 장광설을
늘어놓았으니 K가 그걸 인정하고 확인해주길 기대한 것이다. 그런데 K 가 아픈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전화가 온 모양이에요."
이렇게 말하고 그가 일어서서 손짓으로 잠시 밖에 나가 전화를 받고 온다는 시늉을 했다. 그는 시청실에서 복도로 나갔다. 나는 벨
소릴 듣지 못해서 실제 전화가 온 건지, 그냥 그가 갑자기 급하게 전화 걸 일이 떠올라 그런 핑게를 댄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사장
과 나는 멍하니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그러는 사이 벌써 8분52초의 잔상은 마음에서 모두 지워져버리고 웬지 불안감이 앞섰다. 경험
상 K의 행동을 예측하기가 힘들다.
 아니나 다를까, 시청실로 돌아온 K가 여전히 아픈 표정으로
 "선배님. 지금 가봐야겠네요. 약속이 있었던 걸 깜박 했어요." 라고 말하고 문을 밀치고 밖으로 나갔다.
너무 당황해서 나는 잘 가란 말도 못했다. 그는 가버렸다. 사장도 무척 당황한 듯 보였다.
방에는 우리 둘만 남았다. 음악을 두어시간 느긋하게 듣고 뭐 엠프를 구입하는 거야 말이 서로 맞으면 하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사장이랑 셋이서 저녁이나 먹는 순서였는데 K는 8분여동안만 머무르고 가버렸다.
 "초면이지만 아주 불안해 보이네요. 저 분."
"그렇죠? 조증이 있을 때는 아주 기분이 그만이고 표정도 밝은데 울증으로 바뀌면 금방 딴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여기서 음악 듣고 그렇게 된 걸까요?"
"이 음악이 어때서요? 그게 아니고 하루에도 몇차례나 바뀌어요. 나도 모르겠네요. 워낙 예민한 친구라 이 시청실 분위기, 그리고
음악의 영향을 받았는지도."

 사장과 헤어져 귀가한 나는 며칠동안 기분이 찜찜했다. K가 나와 사장에게 너무 무례했단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전에도 많은 사람 앞에서 갑자기 소리도 없이 자리를 떠버린 경우가 몇번 있다. 그래도 K와 내가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란 건
변함이 없다. 며칠 지나면 그는 또 전화를 걸어올 것이다. 그리고 자기 신작소설을 내게 메일로 보내올 것이다. 나는 이렇게 자위하고
한동안 K를 잊고 지냈다. 다른 바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 나를 한가롭게 놓아주지 않았다.

  12월이 되었고 날씨가 점점 추워졌다. 지난 겨울은 정말 추웠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겨울이 점점 추워지는 것 같다. 지난 겨울 동안
내 입에서 자주 흘러나온 말은 '산다는 게 참 가혹하구나."였다. 지방에 사는 가난뱅이 누이의 사망소식을 겨울 초입에 들었다.그리고 12월
23일인가, 한밤에 K의 사망소식을 들었다. 문학반 후배라는 여성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는데 K가 전날밤 늦게 동료들과 술을 마시고
귀가길에 건널목을 건너다 차에 부딛혀 그만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틑날 오후 늦으막히 나는 대학병원으로 갔다. 대학시절 문학반 K의 동료들이 나를 맞았다. 소복 입은 그의 부인도 보고 대학에 갓
입학한 이쁘장한 딸도 봤다. 모두들 K와 나의 독특하고 특별한 관계를 잘 알고 있다. 그의 부인과 딸도 그걸 잘 안다.

  나는 한쪽 구석에서 후배가 부어주는 소주잔을 기울이며 K의 친구들이 나누는 K의 추억담을 듣기만 했다. 추억으로 말하면 비록
K보다 나이가 한참 위지만 K와 나의 추억과 기억이 훨씬 풍부하고 극적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8분 52초의 기억으로 그것은 마
감이 된다. 그때 나는 그 곡에 대한 소감을 K에게서 듣고 싶었는데 그걸 듣지 못했다. 나는 8분여의 그 시간이 그의 고통스럽고 절
망적인 삶에서 반짝 빛나는 섬광이 되어주기를 은근히 바랬지만 그렇지는 못한 것 같다..
 
* 흥미를 보여주신 "바람계곡"님 특별히 감사하고요. 내용에서 아시겠지만 이건 소설이 아니고 실화 그대로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