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의 <barcarolle> 연주는 웬만큼 이름있는 연주가라면 누구나 녹음을 남기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짐머만이 최고다, 어떤 이는 또
호로비츠가 최고다 하고 저마다 취향을 뽐냅니다. 두 사람 모두 신 구 세대를 대표하는 인기스타들이지요. 내가 페를 뮤터 연주를 듣고
싶어했던건 아주 오래 전 월간음악 부록으로 나온 짜깁기 CD에서 짧은 쇼팽곡을 들은 게 계기입니다. 요즘에는 쇼팽곡 뿐 아니라 모짜
르트 소나타곡 전집판도 나와서-CD- 이미 고인이 된 이 연주가의 향기를 십분 만끽할 수가 있습니다.
 한편 현대의 인기스타인 짐머만 연주는 그의 용모만큼이나 매우 정갈하고 섬세해서 신세대들의 환영을 받고 있는데, 그러나 너무 깔끔
하고 곱게만 연주하는 것 같아서 음악의 신선한 생기라던가 활력 같은 것이 좀 아쉽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내 기억으로는 이미 언급된 블라도 페를뮤터 이외에 러시아여성 쉐바노바-정확한지 확신이 서지 않음-의 연주가 감응도 좋고 첯눈에도
호감을 느낀 충실한 연주였습니다.

 K 는 독일 유기농화장품 수입업을 하는 대학 후배입니다. 그는 소싯적부터 열심히 소설을 써왔고 작품집도 여러권 출간한 작가이기도
합니다. K와 나의 인연은 그가 대학생 때 나를 찾아온 걸로 시작되니까 거의 35년 가까이 되는 셈입니다. 그와 나의 좀 독특한 인연, 그
리고 그 동안 둘 사이에 있었던 역사를 여기 다 옮기는 건 불가능합니다. 구지 그럴 필요도 없을듯 합니다. 다만 한가지 에피소드로 둘
의 관계가 어떤지 암시만 하겠습니다.
 몇해 전 내가 어렵게 러시아 여행을 떠날 때  K는 내게 500유로를 내밀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난 유로가 뭔지도 몰랐지요.
"아니, 줄거면 달라나 주지 이게 뭐야?" 나는 유로를 휴지보듯 흘겨봤습니다.
"그냥 가지고 가셔서 담뱃값에나 보태세요." K가 웃으며 말했고 달라를 받지 못한 나는 아쉽지만 하는 수 없이 유로를 받았습니다.
근데 러시아에 가서 막상 환전을 해보니까 500유로가 7~8백 달러나 되는 겁니다. 3개월이나 머물러서 비용이 많이 부족했던 참에
그 돈을 그때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했는지....

 아니, 쇼팽의 <barcarolle>얘길 하다 말고 웬 대학후배 얘기야?
이쯤에서 이렇게 반문하시는 분은 조금만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K를 만날 때마다 나는 언제나 음악을 들으라고 권합니다. K가 극심한 조울증 환자이기 때문에 그 치유방법으로 음악 듣는 게 효과
가 있을 거라고 나는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믿는 분명한 근거 같은 건 없습니다. 다만 극도의 정서불안이나 스트레스에는 음악이
확실히 어느정도 도움이 된다는 걸 경험으로 나는 알고 있지요. K의 조울증은 아주 중증으로 주치의를 두고 매달 정기적인 치료를
받는데 본인 말에 의하면 차도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어떤 때 전화를 하면 그는 거의 죽어가는 사람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겨우 몇
마디 대꾸를 하고 전화가 끊어집니다. 그는 일주일은 죽어있고 이주 정도는 살아서 활동을 하는 반쪽 삶을 거의 수십년 동안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도 용케 사업을 해내고 게다가 작품까지 끊임없이 써내는 걸 보면 참 지독한 친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삶의 거
대한 욕망과 한치 앞도 안 보이는 깜깜한 절망 사이를 하루에도 수십번 왕래하는 셈이라고 할까요?

 K는 머리도 좋고 작가적 감수성도 누구 못지 않게 우수합니다. 그런 친구에게 이 무슨 저주일까? 그것이 너무 안타까와서 그 병
의 유래와 원인을 알고자 했으나 그는 거기에 대해 별다른 얘길 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는 막연하게나마 그가 어릴 때 가정에서
부모로부터, 혹은 다른 누구로부터 크나큰 상처를 받지 않았을까 상상해볼 뿐입니다. 나는 K를 볼 때마다 습관적으로 말합니다.
 "자네, 요즘도 음악 듣고 있어? 아무리 바빠도 열심히 찾아서 들어봐. 그게 자네에겐 젤 좋은 치료야."
K에게 용산 전자상가의 오디오샵을 소개해주고 스피커와 엠프를 골라준 것도 나였어요. 가끔 음반 가게에 함께 가면 음반도 몇가
지씩 골라주곤 했습니다. 그럴 때면 내 것까지 값은 늘 K가 지불합니다.

 '산다는 게 참 가혹하구나.' 지난 겨울은 유난히 추웠고 내 입에서 이 말이 여러차례 흘러나왔습니다.
작년11월엔가, 강남의 어느 호텔 커피숍에서 K와 마주 앉았습니다.며칠전 K가 자기 원고를 내게 메일로 보냈는데 내게 소감을
듣고 싶다고 해서 만난 겁니다. 대충 그 얘기가 끝나고 내가 최근 새로 들어본 프리엠프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시청평가를 위해
며칠 집에 들어온 것을 들었는데 너무나 맘에 들어서 돌려보낼 때 맘이 무척 허전했거든요. 그런데 가격이 무려 0이 일곱개 하고
도 기백이 더 첨가되는 고가품입니다. 내가 이런 얘길 했더니 K가 거침없이 대뜸 말합니다.
"저랑 지금 공장에 가서 들어보고 그깟 엠프 사버리죠 머. 공장이 가까와요?"
"성남이니 아주 가깝지. 근데 자네 것만 살건가?"
"봐서 선배님 건 제가 반값만 지불해드릴게요. 그럼 된거죠?"
"암튼 가서 들어나 보세."
우리는 커피숍을 나와 택시를 잡아 탔습니다.(계속)
  *얘기가 넘 길어져서 아무래도 한차례 더 써야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