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24655s.jpg

그동안 철학계에서 '플라톤'에 묻혀 사장되다시피 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재조명되는 것처럼 영지주의는 기독교에서 이단에서 기독교의 폭력에 의한 진실을 호도한 것을 밝히기 위하여 재조명되어야 한다. 그 것만이 진정으로 주님의 뜻에 합치하는 것이다. 더 이상 기독교가 지배 이데올로기로 활용되어 예수의 뜻과는 다르게 민중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현실은 당연히 타파되어야 마땅하다. (한그루 주장)


영지주의의 세계관과 역사를 총망라한 최고의 소개서!


영지주의자Gnostic들은 정통 기독교에 의해 이단이라고 경멸과 박해를 받아 3, 4세기 이후 완전히 사라졌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과 의식儀式은 서양 문화사 곳곳에서 면면히 흘러왔다. 실제로 영지주의Gnosticism는 그 지지자들은 물론 볼테르, 윌리엄 블레이크, W.B. 예이츠, 헤르만 헤세, 칼 융과 같이 학식이 뛰어난 사람들까지 매료시켜 왔다. 철학에서도 실존주의는 영지주의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특히 1945년, 나그함마디 문서가 발견된 뒤 어둠에 묻혀 있던 영지주의가 일찍이 볼 수 없던 빠른 속도로 그 원래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21세기의 문턱을 넘어선 지금에 이르러서는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사람들이 영지주의자임을 자처하고 있다. 1,700여 년 만에 영지주의자들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숨겨진 복음서 영지주의》(원제는 The Gnostic Gospels)가 재번역되어 출간되고, 소설 《다빈치 코드》를 둘러싼 여러 해설서들이 잇따라 출간되며, 성경이 정착되는 과정이나 필사·전수되는 과정에 대한 연구서가 발행되는 현상은 물론, 불교와 힌두교, 수피즘, 나아가 기독교 내의 신비주의 영성 운동에 대한 관심이 증폭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됨 직하다. 그러나 미국과 비슷하게 근본주의적·복음주의적 성격이 강한 국내의 기독교 풍토에서 영지주의는 여전히 낯설고 위험한 용어이다. 영지주의에 대해 체계 있는 연구서는 아직까지 국내에서 저술은 물론 번역조차 되지 않고 있다. 이 책은 이 같은 상황에서 영지주의의 사상과 역사를 조목조목 파헤친 본격 연구서로서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책이요, 이 분야에 깊은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한 자세하고 친절한 입문서이다. 


“네 안에 있는 것이 너를 구원하리라.”

역사적으로 알려진 영지주의자들의 출현은 예수 사후부터이다. 그러나 이들이 살다간 정확한 연대와 지역은 대체로 불명확하며, 서로간에 사상적 편차와 변이도 적지 않다. 이 책에서는 영지주의 내의 이 같은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공히 보여주는 창조에 대한 관점, 여신 소피아의 숭배, 그리스도관, 악에 대한 관점, 예배 의식 등 주요 특징을 중심으로 앞부분에서 보여주고, 뒤이어 시몬 마구스, 발렌티누스, 마르시온, 마니교, 중세의 카타르 파, 현대의 블라바츠키, 융 등에 이르기까지 역사상의 영지주의자 및 영지주의적 사상가에 이르는 계보를 그들의 사상과 행적을 중심에 놓고 샅샅이 훑으며, 마지막으로 현대인들이 보여주는 영지주의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객관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특히 이 책에서는 초기 기독교 시대 영지주의자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탄생하고 지지되었으며 마침내 ‘이단시’되었는지를 초대 기독교의 정전화正典化 과정과의 맞물림 속에서 밝힘으로써 영지주의를 추상적 관념이 아닌 생생한 역사적 실체로서 선명히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특히 저자는, 고대 영지주의자들이 세계와 신에 대한 물음에 있어 오늘날의 우리보다도 훨씬 자유로운 상상을 펼쳤고, 아울러 영적 직관을 통해 신을 체험하고자 하는 열의와 깊이가 더했으며,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단시되고 탄압받았다는 사실들을 한갓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우리 자신이 직면하는 물음의 선례들로서 제시하면서 바로 그런 맥락에서 영지주의를 읽고 만나기를 바란다. 이 또한 이 책만이 보여주는 매력이자 큰 장점이다. 


한 예로서, 영지주의자들은 구약의 유일신 하느님을 조물주로, 더 나아가 우주의 관리자요 입법자, 법의 집행자로까지 그리며, 인류의 조상인 타락한 부부가 온갖 악과 고통을 세상에 들여왔다는 주장을 믿을 수 없었고, 마침내 세계는 타락한 것이 아니라 시작부터 불완전했다고 말하게 된다. 다시 말해 구약의 하느님은 열등하고 불완전한 하느님(그가 곧 데미우르고스이다)이며, 따라서 그가 창조한 이 세계도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진짜 하느님의 신성한 불꽃, 곧 영지gnosis를 깨닫고 영적인 각성을 이뤄낸다면 우리는 그 불완전한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우리의 불완전한 몸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이들은 가르친다. 예수는 이러한 영적 각성을 인도하기 위해 보내진 신의 사자, 빛의 사자라는 것이 이들의 관점이다. 빛의 사자들에 의해 영적인 잠에서 깨어난 사람은 참된 영지주의자가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세속에 얽매인 무지의 상태로 남는다. 


또 영지주의자들은, 〈창세기〉를 교훈을 지닌 역사로 읽지 않고 의미를 지닌 신화로 읽는다. 예컨대 아담이 인간의 혼적인 측면을 상징한다면, 이브는 그보다 초월적인 영적 측면을 상징한다. 그들은 사악한 뱀에게 속아 넘어가 아담을 꾀어 하느님께 불복종하도록 만든다는 전통적인 이브 상을 부정하고, 오히려 지혜로운 여성, 곧 천상의 지혜인 소피아의 참된 딸로 여기며, 잠자는 아담을 깨우는 존재로 부각시킨다.

영지주의는 우리가 믿고 따라온 것들에 대한 도전의 상징이다


저자는 이 책의 앞과 뒤에서 재미있는 비유를 든다. 지금 우리의 세계는 한낮의 밝음에 의해 밤하늘의 무수한 별빛이 가려진 세계와 같다는 것이다. 밤하늘 가득한 별빛의 세계는 영적으로 각성된 자들만이 볼 수 있는 세계다. 그는 “밤하늘을 볼 수 있는 능력을 부정하고 오직 햇빛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세상, 그런 현실을 상상해 보라”고 말한다. “우리는 밤하늘을 부정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신비로운 빛을 품고 있는 밤하늘을 볼 줄 아는 영지주의적 시력을 빼앗긴 상태에서는 경험의 비물질적인 측면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 우리는 중요한 조화와 귀결을 알아보지 못하는 영적 근시를 앓고 있으며, 그래서 마치 바로 눈앞에 보이는 시공간에 묶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낮뿐인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과의 소외를 극복한 영과 혼을 가진 영지주의자는 이방인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이들과 마주치는 것은 두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곤경에 갇혀 사는 삶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문이 열려도 우리cage를 떠나기를 거부하는 짐승과도 같다. 그노시스가 가져다주는 자유보다는 차라리 잠자며 혼수 상태에 빠져 있는 지금의 삶의 방식을 더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문화 안에서 합의된 세계관이나 종교적 도그마에 대해서는 거의 문제시하지 않고 오히려 영지주의적 통찰에서 나온 가르침을 문제삼는 것이다.” 저자의 이 마지막 말은 영지주의에 찬성하든 찬성하지 않든, 현재의 세계관과 신학관의 굳은 체계에 회의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새겨볼 만한 말이다. 또 이러한 관점은 불교의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정통 기독교 외의 관점에서는 서구의 영지주의와 무관하게 전해 내려온 또 하나의 전통에 가까이 다가서 있다. 



“하지만 삶을 비극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자신들의 무력함 속에서 의식의 절망과 소외를 느끼는 사람은 영지주의 메시지에 응답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현세적 삶에서 충분히 고통당하고, 다행히 그 고통으로 인해 의식을 최대한 일깨우며, 그 결과 올곧은 의지와 성실성을 지니게 된 자들이 고대의 낯선 목소리―현대의 새로워진 힘을 더한―로 자신들을 부르는 영지주의자에게 응답하기가 더 쉽다. 이런 자들의 영혼과 정신이 합리성과 외향성의 현란한 한낮으로부터 그노시스의 빛이 발견될 수 있는 밤하늘의 신비로운 발광체로 시선을 돌리기가 쉬운 것이다.”―이 책 281쪽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