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에 대한 비난 중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87년 김영삼과의 후보 단일화문제이다. 우리사회는 87년 김대중-김영삼의 후보 단일화 문제에 있어 철저히 편파적이고 왜곡된 시각만을 반복유포시키고 확산시켜왔다. 87년 어린 학생이었던 나 역시 우리사회의 주류 언론과 주변 어른들의 관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김대중의 '대통령병'에 대해 막연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92년 대선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이 다시 맞붙었을때 3당야합의 지역패권주의적 속성을 간파하진 못했었지만, 초원복집 사건으로 불거진 영남의 '우리가 남이가'에 대한 거부감과 후보의 자질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무식한' 김영삼과 '정치적 비전'으로 꽉찬 김대중의 차이를 별로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고, 김대중에게 내 첫 표를 던질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김대중에 대한 막연한 의심, 거부감은 가지고 있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김대중-김영삼과의 후보 단일화와 관련해 짐짓 객관적인 척하지만,  철저히 김영삼의 입장을 옹호하고 시종일관 반김대중의 관점을 견지, 악의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 이 링크글들을 보자. 더구나 이 사람은 비판적 지지론과 야권의 분열(2) 중간에 박정희에 대해, "이런 면에서 거의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본 한국의 공업화에 매진한 박정희씨야말로 이상주의자이고 진보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고 평하고 있으니, 이 사람의 성향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프레시안의 키워드가이드. 6월 민주항쟁ㅣ 13대 대선 이윤섭... 

2009년 11월 경부터 시작해, 가장 최근 글인 2011년 4월5일 '여소야대구조의 고착' 까지... 참으로 방대한 작업을 진행중에 있다. 

비판적 지지론과 야권의 분열(1)

비판적 지지론과 야권의 분열(2)

비판적 지지론과 야권의 분열(3)

87년 대선에 대한 김대중의 회고


비판적 지지론과 야권의 분열(2)에서 이윤섭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야권에서 단일후보를 내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우선 김영삼과 김대중이 새로 만든 통일민주당이 두 세력간에 50대 50지분으로 철저히 양분돼 있는데다가 중재세력이 없어 당내 경선을 통한 단일화가 어려운 구조적 요인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단일화가 불가능했던 이유는 '4파전 필승론'과 '비판적 지지론' 때문이었다.... (중략) 비판적 지지론은 참으로 가정한 몇 가지 전제에서 나온 주장이다. 그 전제는 대략 다음과 같다. 

1. 김대중은 기성 정치인 가운데 가장 진보적, 개혁적이다 
2. 김대중의 당선 가능성은 높다
3. 당장 운동권이 정당을 만들어 선거에서 의미있는 수의 당선자를 내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러한 전제하에서 대략 다음과 같은 '진보세력'의 행동방침이 나온다. 
1. 김대중을 언제나 후보로 밀어야 한다. 다른 후보로 교체를 생각해서는 안된다.
2. 다른 후보를 내거나 독자정당을 세우는 것은 이적행위다.
3. 김대중에 대한 비판은 삼가야 한다. 

1987년 위의 전제들이 참인지 거짓인지에 대한 제대로 된 토론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었다...(하략)"


이와 관련해 최근 프레시안의 다른 기획기사인 <김대중을 생각한다>의 이해찬의 당시 회고를 보자. 

내란 공범에서 평화적 정권교체 주역까지

[김대중을 생각한다]<17> 기적과도 같은 30년의 기쁨과 보람


고난의 정치 그리고 평화적 정권교체

김 대통령은 1985년 2월 귀국했지만 전두환 정권에 의해 2년여 동안 가택연금에 처해져서 다시 만날 기회는 없었다. 그때 나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1987년 4월 호헌조치 이후 정치권, 재야, 종교·시민단체들이 모두 참여한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가 만들어지면서 김 전 대통령이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고문으로 참여하고 내가 기획업무를 담당하면서 두 번째 만남이 시작되었다. 온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안고 발족한 국민운동본부는 6월항쟁을 이끌어냈고 결국 개헌과 함께 1987년 대통령 직선제를 실현시켰다.

그런데 대선준비과정에서 김대중, 김영삼 두 정치인의 후보 단일화가 중요 사안으로 떠올랐다. 당시 선거는 1971년 유신 이후 16년만에 국민들이 대통령을 직접 뽑는 선거였고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를 이기기 위해서는 후보 단일화가 첫째 조건이었다. 문제는 후보 단일화의 방법이었다.

결국 민통련에서는 두 분을 모시고 정책 토론을 거쳐 더 진보적인 후보에게 힘을 실어주자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두 분의 정책토론 결과, 예상과 달리 29대 2라는 압도적인 다수가 김대중 후보에 대한 지지를 결정했고 문익환 목사님이 중심이 되어 이른바 '비판적 지지'를 선언했다. 그러나 두 후보의 지역기반이 달랐던 상황에서 민통련의 지지만으로 팽팽했던 힘의 균형이 깨지기는 힘들었다. 결국 단일화에 실패하게 되었고 김 대통령은 노태우, 김영삼 후보에 이어 3등으로 낙선하고 정권교체 실패에 대한 비난까지 모두 받게 되었다.

대선 패배 다음해인 1988년 13대 총선이 다가오자 평화민주당 의원들이 대거 탈당하기 시작했다. 원내교섭단체를 유지하기조차 힘든 상황이 되자 김 대통령은 재야어른들을 만나 "재야 인사들이 평민당에 입당한다면, 나도 어렵지만 계속 정치를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더 이상 정치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만일 김 대통령이 선거를 포기하면 대구·경북에서는 여당인 민정당이, 부산·경남에서는 야당인 민주당이 압도적인 자리를 차지하여 영남이 여야를 완전히 지배하고 호남은 정치적 구심점을 잃고 공백상태에 빠져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5ㆍ18 광주항쟁 이후 엄청난 상처를 입었던 호남이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지지할 정당조차 없는 허무주의에 빠지거나 당시 상황을 단숨에 뒤엎자는 급진주의로 흘러갈 위험이 있었다.

결국 평민당을 살리자는 쪽으로 논의가 모아지게 되었고 문동환 박사를 중심으로 평화통일연구회(평민련)를 만들어 100명에 가까운 인사들이 입당하게 되었다. 이는 재야 인사들의 제도 정치권 첫 진입이라는 점에서 한국 정당정치사의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사건이었다.

그 결과 예상을 뒤엎고 평민당은 70석을 얻어서 제1야당으로 발돋움 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나도 예정에 없던 서울 관악구에서 출마하여 36세에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어렵게 제1야당이 된 기쁨도 잠시였다. 김 대통령에게는 이후 10년간 고난의 정치가 계속되었다. 1990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3당 합당에 전격적으로 참여하면서 국회 전체 의석 299석 중 219석을 차지한 초거대 여당인 민자당이 등장했다. 비록 그 다음 총선인 1992년 총선에서 민자당이 149석으로 줄어들고 노무현 대통령 등과 통합하여 새로 발족한 민주당이 97석의 제1야당이 되었으나 정주영 현대그룹회장이 창당한 국민당이 40석을 가져갔다. 다시 정치구도가 호남을 고립시키는 지역주의에 매몰되어 버렸다. 1992년 대선은 소수파로 전락한 민주당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김영삼 후보에게 맥없이 지는 결과로 끝났다. 결국 김 전 대통령은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소수파 정당으로 대선을 치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 가슴 아픈 기억이다.

1997년 대선은 더 어려운 상황이었다.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김 대통령이 1995년 지방자치 선거를 계기로 다시 국내로 복귀하고 새정치국민회의라는 정당을 만드니 잘 될 수 없었다. 당신의 출마를 말리기도 했지만 결국 정당에게 선거는 피해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당선이 되든, 안 되든 선거는 치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당의 대선 기획본부장을 맡아서 선거에 임했고 김 대통령은 DJP연합, IMF 외환위기, 이인제 후보의 독자 출마 등이 모두 겹친 상태에서도 39만표, 1.5%P라는 아주 작은 차이로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1987년 민주항쟁 이후 10년만에 정통 민주세력이 집권하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최초로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김 전 대통령과 함께 했던 야당 정치 10년을 돌이켜 보면 그분의 정당정치에 대한 강한 확신과 선비의 정신과 상인의 지혜를 조화시키는 탁월한 정치감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1990년에 노태우 정부의 중간평가를 지자체 선거와 맞바꿈 한 것은 엄청난 결단이었다.

당시 정치 야합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정당의 뿌리가 약한 한국 정치에서 국민들이 직접 대표를 뽑는 지방자치제도를 도입한 것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다. 더구나 몇 차례나 선거에서 졌음에도, 아니 1988년 총선처럼 선거에서 이겼더라도 3당 합당과 같이 호남을 끝없이 고립시키는 지역주의 정치구도 속에서도 새로운 인물을 찾고 '꼬마 민주당'과의 50:50 통합과 같이 정당을 통해, 선거를 통해 한국 정치의 틀을 바꾸고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려고 노력했던 김 대통령의 노력은 마땅히 기억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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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개혁과 진보'를 말하고 '망국적 지역주의'를 말하는 자들의 대부분은 철저히 편파적이고 왜곡된 시선으로 사실마저 왜곡하면서 반김대중, 반민주당, 반호남정서를 끊임없이 생산하고 확대유포하고 있다. 특히, 반한나라당을 말하며 범야권의 연대와 연합을 말하는 자칭 '민주개혁'세력임을 자부하는 우리사회의 김영삼의 자식들과 영남지역주의 영남패권주의 세력들은 헌법을 유린한 군사독재 쿠테타 수구세력과 결탁하여 끊임없이 반김대중, 반민주당, 반호남을 통해 호남을 고립시키려는 정치적 시도를  멈추지 않고 있다. 

지역주의를 말하며 그 원흉으로 김대중과 호남을 지목하며 집요하게 현대사를 왜곡하려고 시도하면서 '영남'개혁세력의 복원을 말하는 자들은 '개혁'과 '진보'를 논할 자격이 없다. '망국적 지역감정'을 해소하자는 김영삼의 자식들이 조선일보와 박지향과 같은 '망국적 지역주의' 양비론자들과 무엇이 다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우리사회의 첫번째 개혁과 진보는 이 추악한 김영삼의 자식들에 대한 반성을 요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