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가에 따라 같은 곡도 시간차이가 나는 경우가 보통입니다. 심한 경우에는 두배? 가까이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거든요. 가령 요새 많이 알려진 바흐 첼로 무반주모음곡의 경우 피터 비스펠베이 같은 사람의 속도전과 전통연주 지향
의 미샤 마이스키 연주는 시간차가 너무 많이 나서 같은 곡이라고 말하기 무색할 지경입니다. 마이스키가 그만큼 느렸다는 거죠.

 쇼팽의 <바르카롤(barcarole)>은 대개 8~9 분 가량 걸리는 독립된 단일악곡입니다. 여기서 8분 52초를 내세운 것은 LP로 내가
즐겨듣는 블라도 페를뮤터의 연주시간을 그대로 내세운 것입니다. 이 음악을 듣게 된 계기에도 약간의 사연이 있습니다. 회현동
지하상가에 가면 <크림트>라는 음반 가게가 있어요. 크림트는 이탈리아 화가의 이름이라더군요. 이곳 주인은 내가 어쩌다가 들르
게 되면 내가 듣고싶어하던 음반을 찾아놓았다가 헤어질 때 슬쩍 내밀곤 합니다. 페를뮤터의 쇼팽 연주를 듣고 싶다고 전에 말했
는데 그걸 기억해두었다가 지난 가을 갔더니 그 음반을 선물한 겁니다.

페를뮤터의 음반에는 이곡 외에도 쇼팽의 다른 곡들, 발라드나 왈츠, 녹턴과 즉흥곡 등이 수록되어 있는데 내 귀를 사로잡은 것
은 유독 이 <바르카롤-뱃노래> 뿐입니다.
음악은 들을 때 그 사람의 심상, 주변환경, 이런 것이 그 음악을 받아들이는 데 많이 영향을 미친다고 봅니다. 전에도 분명 나는
비록 CD로나마 이 바르카롤을 몇차례 들었을텐데 그냥 무덤덤하게 지나친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페를뮤터의 연주로 이곡을
듣는 순간 나는 마치 이곡을 처음 듣기나 한 것처럼 깜짝 놀랐습니다.
-아,쇼팽에게도 이처럼 충만된 행복을 노래하는 음악이 있었던가?- 한마디로 말하면 이런 느낌입니다.
충만된 행복의 노래, 그야말로 따스하고 정겨운 봄날에 자그마한 보트에 연인을 태우고 조용한 물결 위를 미끄러져 가는 기분,
숨을 쉬고 살아있는 사람만이 느끼는 행복입니다. 보통 쇼팽 피아노곡 하면 대체로 보라빛의 다소 우울하고 서글픈 색채를 떠올
립니다. 협주곡의 2악장 같은 아주 비통한 선율도 있지요. 쇼팽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보라빛의 우울한 색조에 이끌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바르카롤은 지금까지 들어온 쇼팽곡과는 분명히 그 색조가 완연하게 다른, 무척 밝고 화사한 곡이며
선율의 변화와 대비가 빚어내는 아름다운 화음이 그야말로 특출난 그런 곡입니다.
 나는 이 곡을 듣고 새삼스런 말이지만 쇼팽은 천재가 틀림없구나, 이런 오묘한 악구를 창조해낸 인물은 분명 천재라고 할 수
밖에 없구나! F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서가에는 베르나르 가보띠가 쓴 쇼팽 전기가 꽂혀있는데 나는 오래동안 이 책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다가 이 짧은 한 곡
을 듣고난 순간 드디어 천재 쇼팽의 전기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8분52초 동안 맛본 귀의 호사, 그 즐거움이 그만큼 대단했다는
증거입니다. 나는 이 타이틀로 앞으로 서너차례 더 글을 계속할 예정입니다. 이미 이 곡을 잘 알고 계신분들도 있겠지만 만약
이 곡을 아직까지 미쳐 듣지 못했다거나 들었더라도 별무신통이었던 분들은 반드시 쇼팽의 <바르카롤>을 찾아 들으십시요.
이번에는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평상심 가운데 이 피아노곡에 귀를 기울여보십시요. 어떤 신호가 반드시 올겁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