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근래에 기독교에 대한 토론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요

토론이 그다지 생산적이지 못한 느낌입니다.

그 이유는 교회사에 대한 상이한 이해

그리고 성경에 대한 해석학적 무지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사에 대한 이야기는 펙트의 문제인데 이 부분도 교회사학자들이 일부로 감추거나 왜곡한건 없습니다.

교회사학자들 중에는 하르낙 같은 거장도 있고 자유주의 신학자들 신앙이 없이 학문적으로만 연구하는 사람도 많기에 없는 사실이나 사실을 왜곡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니케아나 칼케돈등 공의회에서 결정된 사항들은 지금 천주교나 동방정통 교회 프로테스탄트 공히 인정합니다.

비록 해석이나 번역의 문제는 있을지언정 한그루님이나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황제가 강제로 교리를 정하는데 관여했다 뭐 이런건 근거가 없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이건 제 생각이 아니라 공식적으로 바티칸 도서관에 그와 관련된 문서들이 있고 기독교의 세 줄기인 가톨릭 정통교회 개신교회가 공히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두번째로 성경에 대한 이해의 문제인데요

여기에는 두가지 접근이 필요합니다.

기독교의 경전은 66권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교리나 성서의 해석은 이 66권의 조화와 통일성위 기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서의 어느 귀절을 달랑 가져와서 이런 말씀이 있으니 이건 이렇다라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집을 지을 때 대들보나 서까래 몇개로 그 집의 전체 얼개나 모습을 주장 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두번째로 성경은 45명의 저자와 2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구술과 전승 그리고 수집을 거쳐서 완성된 책입니다.

따라서 역사적 배경과 저자의 의도 목적등을 고려하여 해석해야 하며 시대적 환경적 배경이 있기에 그에 따른 해석을 해야 합니다.

따라서 성경은 끊임없이 재해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노예제도나 여자는 잠잠하라는 말씀 같은 경우가 그러한데 오늘날 그것을 문자적으로 적용하면 안됩니다.

재해석되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재해석 되면 이건 그때 그때 달라요가 되지 않나라고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재해석에도 원칙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적 관점에서 그리고 신약성서의 빛아래서라는 대 원칙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성경이 66권을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메시지를 근거로 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여자에 대하여 고린도서에 보면 여자는 잠잠하고 남자를 가르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럴때 이것은 당시의 문화와 풍습의 시대적 한계를 가진 말씀이지요

하지만 성경은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고 동등합니다.

성경은 남녀를 차별이 아닌 구별의 관점에서 보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차별의 관점으로 해석을 하였습니다.


또한 구약시대 드보라라는 여자 사사가 있었고 예수님 족보에 여자들이 많이 들어있습니다.

이방인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로 다윗왕의 족보나 예수님 족보에 라합이나 룻등 이방인 이야기가 들어있고 요나서에도 보면 그러한 이야기가 나오며 법궤를 운반할 때도 이방인인 오벳에돔의 집에 복을 주십니다.


따라서 성경의 정신은 여성차별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사도도 여자나 남자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합니다.


노예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당시의 시대환경상 바울이나 기독교인이 노예폐지를 주장하거나 혁명할 수 없기에 그러한 정치적 주장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신앙적으로 노예제도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주인과 노예가 같이 예배를 드리고 많은 경우 주인이 기독교를 믿을 경우 노예를 해방하기도하고 형제로 대우하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성경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재해석되어야 하는데 우리나라 개신교는 문자주의에 사로잡혀 재해석을 하지 않고 옷에다 몸을 맞추어 입는 일을 하기때문에 오늘날 자기모순에 빠지고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비판하는 자들 대표적으로 이덕하님처럼 성경의 한두구절을 그것도 아주 자의적으로 편벽되게 자기가 보고싶은 것만 보면서 해석하여 주장하고 비판하는 것 역시 잘못입니다.

성경은 재해석될 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재해석이 맞으면 하나님이 그 말씀이 실재로 이루어지도록 증거하신다는 것이 기독교인의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