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론과 일반 지능

 

뇌가 단 하나의 부품으로만 이루어졌다고 가정해 보자. 지능을 측정하고 싶으면 그 단 하나의 부품의 성능만 측정하면 된다. 이런 식으로 백지론은 일반 지능 이론과 연결될 수 있다.

 

뇌가 수백, 수천 개의 부품들로 이루어졌다고 가정해 보자. 지능을 제대로 측정하고 싶다면 그 수백, 수천 개의 부품들 각각의 성능을 다 측정해야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선천론은 다중 지능 이론과 연결될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백지론과 일반 지능 이론 사이에, 선천론과 다중 지능 사이에 연결점이 있다. 그렇다고 백지론이 필연적으로 일반 지능 이론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선천론자가 일반 지능 이론을 완전히 무시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백지론자도 다중 지능 이론을 주창할 수 있다. 뇌 속에는 단 하나의 학습 기제만 있지만 음악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은 음악 지능이 높고, 수학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은 수학 지능이 높고, 미술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은 미술 지능이 높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뇌가 수 많은 모듈(부품)들로 이루어졌다는 대량 모듈성(massive modularity) 테제를 받아들이는 선천론자가 일반 지능 이론을 옹호할 수도 있다. 만약 여러 지능들 사이에 상관 관계가 높다면 일반 지능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백지론/선천론 사이의 논쟁과 일반/다중 지능 이론 사이의 논쟁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좁은 의미의 지능과 넓은 의미의 지능

 

뇌에서는 온갖 종류의 정보 처리가 이루어진다. 넓은 의미의 지능은 뇌의 온갖 정보 처리 성능을 따진다. 표정 읽기 능력처럼 상식적으로는 지능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들도 지능에 포함된다.

 

정보 처리의 측면에서 인간이 다른 동물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점이 있다. 언어, 과학, 기술의 측면에서 다른 동물은 인간의 능력을 감히 넘볼 수도 없다. 또한 지능의 이런 측면은 학교 성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사람들이 흔히 머리가 좋다라고 표현할 때에도 이런 측면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이런 측면을 좁은 의미의 지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좁은 의미의 지능에 초점을 맞추어서 연구를 하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넓은 의미의 지능을 몽땅 연구하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일반 지능은 좁은 의미의 지능을 주로 연구하며 다중 지능은 넓은 의미의 지능을 연구한다. 연구의 초점이 다를 경우 누가 옳고 그르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상관 관계

 

IQ 검사가 학계에서 널리 인정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좁은 의미의 지능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측정할 때 상관 관계가 높기 때문이다. 검사 A로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은 대체로 검사 B로도 높은 점수를 받는다.

 

이런 현상은 대량 모듈성 테제와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까? 적어도 두 가지 모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매우 일반적인 기제(모듈, 부품)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대량 모듈성 테제와 매우 일반적인 기제의 존재가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인 학습 기제(General Learning Mechanism, GLM)가 있어서 온갖 종류의 학습에 사용되는지도 모른다. 예컨대, 수학 공부를 할 때에는 수학 분야에 전문화된 기제들과 GLM이 합동으로 작동하고, 음악 공부를 할 때에는 음악 분야에 전문화된 기제들과 GLM이 합동으로 작동하는 식이다. GLM의 성능이 온갖 지적인 영역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상관 관계가 생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둘째, 뇌의 부품에 골고루 투자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몸은 수 많은 모듈들로 이루어져 있다. 각 부품들 사이에는 상관 관계가 있다. 예컨대, 팔이 긴 사람은 다리도 길다. 키가 큰 사람은 대체로 각 부품들도 골고루 크며, 키가 작은 사람은 대체로 각 부품들도 골고루 작다.

 

최적 신체 비율이 있어서 그것에서 많이 벗어나면 번식에 해로운 것 같다. 예컨대, 키가 큰 사람의 발이 아주 작다면 제대로 걷거나 뛰기 힘들다. 반면 키가 작은 사람의 발이 크다면 자원 낭비다. 따라서 최적 신체 비율에 가깝게 각 부품들의 크기를 조절하도록 인간이 진화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실제로도 그런 것 같다.

 

뇌의 각 모듈들의 경우에도 사정이 비슷한 것은 않을까? 뇌의 각 부품에 골고루 투자하는 것이 한 부품에만 몰빵하는 것보다 번식에 유리할 것 같다. 극단적인 몰빵을 보여주는 백치 천재(idiot savant)들이 과거 사냥-채집 사회에서 잘 번식했을 것 같지 않다. 자연 선택은 백치 천재의 방식으로 뇌에 불균형 투자를 하도록 영향을 끼치는 유전자를 개체군 내에서 제거하는 경향이 있었을 것 같다. , 인간은 자연 선택에 의해 뇌의 각 부품에 골고루 투자하도록 진화한 것 같다. 그래서 온갖 방식의 지능 검사의 결과들 사이에 상관 관계가 높게 나타나는 것 같다.

 

 

 

 

 

상관 관계가 전부는 아니다

 

각 지능들 사이에 또는 각 부품의 성능들 사이에 상관 관계가 높다 하더라도 일반 지능 이론으로는 온전한 지능 이론이 될 수 없다. 팔 길이와 다리 길이 사이에 상관 관계가 높다 하더라도 한 사람의 팔 길이와 다리 길이를 따로 재는 것이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상관 계수가 1이 아니며 팔과 다리는 엄연히 서로 다른 부품이기 때문이다. 좁은 의미의 지능에만 초점을 맞춘다 하더라도 각 부품들의 성능을 따로 재야 한다.

 

뇌가 어떤 부품들로 이루어져 있는지 이미 잘 알고 있다면 각 부품들의 성능을 따로 재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그것을 잘 모른다. 이것이 생리학과 심리학의 차이다. 생리학의 경우에는 대단한 이론이 없다 하더라도 부품들을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팔과 다리는 그냥 옷만 벗겨 봐도 보이고, 심장과 허파는 배를 째 보면 뻔히 보인다. 하지만 뇌를 열어 본다고 뇌 속의 부품이 그냥 보이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진화 심리학이 개입할 여지가 있다. 진화 심리학은 인간의 뇌가 어떤 부품들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알아내려고 한다.

 

좁은 의미의 지능에 영향을 끼치는 부품들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다면 좁은 의미의 지능에 대한 연구가 일반 지능 이론을 뛰어 넘을 수 있을 것이다. 뇌의 모든 부품들을 다 구분해낼 수 있다면 다중 지능 연구는 지금의 애매한 상태를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2011-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