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썼던 <가면의 정치학>에 바오밥님이 단 댓글에 대한 답변으로 글을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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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밥
karma/ "융은 우리의 얼굴 뒤에 숨겨진 인격을 말하는 것에 반해, 라캉은 우리의 얼굴이 바로 인격이라고 말합니다. 얼굴 뒤에 숨겨진 인격이란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라고 말씀하셨는데, 융과 라캉이 말하는 '얼굴/가면'과 '인격'의 개념이 동일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융과 라캉이 서로 대립되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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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융과 라캉은 서로 대립되는 주장을 합니다.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면, 라캉은 <<에크리>>에서 융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거명하지 않는 체로, "페르소나(persona)는 가면이다"라는 융의 주장을 검토하며, 비트는 것이죠. 즉, 융에게 페르소나는 가면일 뿐이고, 이 가면은 타인에게 자신을 내보이면서 동시에, 인간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숨기는 어떤 무엇이라고 말하는 융을 비트는 것입니다. ("The persona is a complicated system of relations between individual consciousness and society, fittingly enough a kind of mask, designed on the one hand to make a definite impression upon others, and, on the other, to conceal the true nature of the individual."라고 융은 말합니다.)

여기서 페르소나(persona)를 좀 더 설명해야 할텐데, 페르소나는 어원학적으로 "가면"을 의미합니다. 위키피디아에 보면,  어떤 행위자의 사회적 역할 혹은 성격을 말합니다. 문학에서라면, 작가가 자신의 작품 속에 창조해내는 "두 번 째 자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시 속에 등장하는 화자(narrator)를 "시적 화자 (poetic persona)"라고도 부릅니다. 자신의 두 번 째 자아로 무대에 오르는 배우와 같이, 작가 혹은 배우는 매 번 다른 페르소나, 즉 가면을 쓰는 것입니다. 이 가면쓰기를 잘해야 훌륭한 배우, 작가가 될 수 있죠. 물론, 가면을 벗는 것도 중요하겠네요. 베트멘의 조커를 연기했던 배우처럼 그 가면을 벗지 못하고, 영화에서처럼 비극적인 결말을 맞지 않으려면 말이죠(영화는 안 봐서 잘은 모름). 혹은 자신이 창조한 소설 속의 페르소나와 자신을 동일시해서 소설 속의 삶을 살지 않으려면 말이죠. 우리도 마찬가지로 일상에서 매번 다른 얼굴로, 다른 장소에서, 다른 사람들을 마주하죠. 즉, 매번 다른 가면, 즉 얼굴을 하는 것이죠.

라캉이 융을 비트는 지점이 바로 이곳입니다. 라캉은 "오로지 얼굴 만이 존재한다면, 페르소나는 어떠한가?"라고 묻습니다. 혹은, 얼굴 만이 존재한다면, 가면(假面), 즉 가짜 얼굴은 어떠한가?라고도 물을 수 있겠네요. 이것은 역으로, 가짜 얼굴, 진짜 얼굴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즉, 얼굴과 페르소나(가면)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짓는 그 모든 얼굴들이 우리의 얼굴들이라는 것,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가면들이 바로 우리 자신들이라는 것.

인터넷에서의 인격이라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혹은, 가상 공간에서의 아바타라는, 페르소나라는 우리의 얼굴.

당신은 지금, 어떤 가면을 쓰고 있습니까? 과연 어떤 얼굴을 짓고 있습니까?

가상 공간에 대해서는 예전에 썼던 글로 대신하겠습니다. 아래 글은 몇 년 전에,  virtual reality 와 virtuality라는 제목으로 쓰인 글이구요, 진중권과 조정환의 인터넷 토론을 바라보는 논쟁에 대해 쓴 글입니다. 사실 그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쓴 글이 아니라, 제 생각을 보여주기 위해 쓴 글입니다. 철학 개념이 많이 들어가긴 하지만, 비교적 풀어서 쓴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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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게시판에서의 "빠른" 답변과 "느린" 답변에 대한, 진중권과 조정환의 논쟁이 있습니다. 조는 눈팅과 논쟁 당사자들의 조급증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빠른 속도의 시대에, 잃어가는 사유의 공간을 아쉬워합니다. 뭐, 진은 반대로 말하겠죠?

역시나 네그리주의자인 조는 "다중"이니, "자율"이니, "잠재력"과 같은 네그리의 어휘를 써가면서, 그의 철학을 설파하더군요. 뭐, 맑스의 어휘도 종종 섞어가면서요...

근데 말입니다. 조의 실패는 바로 그곳에 있습니다. 앞에서 계속, "딱 네그리주의자"라고 불러 왔는데, 네그리가 지닌 한계들을 조 또한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는 걸 말하고 싶어함이죠...

네그리의 "잠재력 (virtuality)" 개념이 지닌 한계를 말하고 싶군요. 이 개념 이거 잡탕 개념입니다. 네그리는 잘 알지도 못하는 듯하구요. 네그리가 들뢰즈로부터 빌려오는 개념이죠. 근데, 네그리에 오면서 변질이 되버립니다. 들뢰즈는 저 개념을 스피노자로부터 뽑아오거든요. 물론, 라이프니쯔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 빚을 <<주름: 라이프니쯔와 바로크>>라는 책을 통해, 탕감하려고 하지만, 우째 제대로 변제하지는 못합니다.

암튼, 다시 스피노자로 가서... 그는 능력(potentia, puissance, 역능으로 알려져 있지만, 역량이라고도 번역되는 단어)과 변용능력(potestas, 맥락에 따라서는, 지배력, 권력으로 번역됨. 맥락은 스피노자가 정치에 대해 말하느냐 아니냐로 구분됨. 따라서, <<윤리학>>에서는 주로 변용능력이라고 번역을 해야겠고, <<신학정치론>>, <<정치론>>에서는 맥락에 따라, 지배력, 권력, 변용능력이라고 번역을 해야겠죠)을 구분합니다.

이 두가지 힘, 즉 포텐시아와 포테스타스는 모두 잠재력입니다. (potentia라는 단어를 보면, 영어의 잠재적인이란 의미를 지닌 potential이란 단어가 떠오르죠?). 근데 이 잠재력을 들뢰즈는, 그리고 스피노자는 "현실적 (real)"이고, "필연적" (necessity)이라고 말합니다. 어째서, 잠재력이 "현실적"이냐라는 의문이 드시죠? 즉, 잠재되어 있는 것이고, 상황에 따라, 현실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안 나타나기도 하는 것 아니냐? 라고 묻고 싶으시죠? 예, 저렇게 생각하는 이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죠. 그는 <<형이상학>> 등등에서, 현실태(dynamis)와 잠재태(potentia)를 나눕니다. 현실태는 질료와 형상이 조화롭게 결합되어, 현실로 나타난 것을 말함이고, 잠재태는 아직 형상을 부여받지 못한 질료가 형상이 도래하기를 기다리는 상태죠. 이는 따라서, 형상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죠.

도토리와 상수리나무를 떠올리면 됩니다. 근데, 이런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지 무지 반동입니다. 왜? 씨앗을 발아하지 못하는 도토리의 비극적인 운명에 대해 그는 눈을 감아버리니까요. 플라스틱과 오염물질로 썩히는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땅에 떨어진 도토리를 생각해 보세요. 이거, 도토리가 싹을 틔울 수 있겠습니까? 근데, 건강한 땅에 떨어진 도토리를 부러워 하면서, 건강한 땅으로 이사 가기를 바라지 않겠어요? 근데, 또 생각해 보세요. 원래, 도토리가 싹이 트는 건강한 땅은 도토리에게 어떤 땅이겠습니까? 그 도토리를 썩히려던 땅 아니었습니까? 이러한 도토리의 현실적이고 필연적인 능력과 변용능력을 스피노자는 코나투스(conatus, 자기보존능력)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리하여, 존재하는 사물은 외부의 세력이 파괴시키지 않는 한, 자기 자신을 보존하겠죠.

예, 다시, 현실적이고 필연적인 잠재력에 대한 논의로 넘어가서요... 도토리의 코나투스는 어땠습니까? 싹을 틔우려는 그이의 잠재력은 현실적이고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것이, 오염된 땅에 떨어져서 싹을 틔우지 못하느냐, 건강한 땅에 떨어져서 싹을 틔우느냐는 별개의 문제로 말이지요... 이걸 운명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좀, 설명하기 어려우니, 다른 예를 들어야 겠네요. 한 철학백과사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태와 현실태, 혹은 잠재성과 가능성에 대해 "어떤 생물들은 그것들의 환경이 물을 잃더라도, 수영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을 여전히 가진다." 라고 말하네요. 저기서 어떤 생물들은 무엇일까요? 인간 만이 저 범주에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물고기가 자신의 환경인 물을 잃는데도, 자신의 잠재력을 계속 지닐 수 있을 까요? 아니죠? 왜 아닐까요? 당근,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는 잠시 퍼덕대다가, 죽어 버릴 테니 말이지요. 뭐, 물고기의 코나투스는 물을 없애려는 인간에게 강렬히 투쟁하겠지만...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잠재성이니, 가능성이니, 잠재태니, 현실태니 하는 것은 고작 허구에 불과할 뿐인거죠.

이제 다시, 조정환으로 돌아갑니다. 또, 네그리로 돌아가야 겠군요. 네그리는 <<제국>>에서 저 잠재력 개념을 정치와 접목하려는 실험을 하는 듯 합니다. 이 과정에서, 제가 위에선 논의한 스피노자의 잠재력 개념에 니체의 "가능성" 개념을 슬그머니, 끼워넙니다. (기억에, 니체를 직접 언급하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 저의 눈에, 그렇게 되어버린 잠재력 개념은, 위에서 길게 논의한 잠재력 개념에서 이미 떠나버린 것이 되죠. (이 부분 제가 오류일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주의자인 저는 니체주의를 아주 혐오하죠. 니체의 주사위 던지기로서의 가능성 개념도 싫어라 합니다. 허나, 니체를 다시 읽어야 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습죠.)

이제 조정환입니다. 그는 저와 같은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는 잠재력을 따를 터입니다. 따라서, 그는 어떠한 가능성을 지닌 가상공간이, 이러저러한 운동들을 통해, 이러저러한 형태로 되어야 한다고 주장을 하죠. 즉, 그는 현실적이고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잠재력으로서의 가상공간, virtual reality를 인정하려 하지 않죠. 즉, 정신 없이 오가는 빠른 답글들을 못 견뎌 하는 것입니다. 제가 보는 것은 이것입니다. 즉, 가상공간, 영어로 virtual reality를 저는 저와 같은 스피노자로부터 연유하는 들뢰즈의 잠재력 개념, 즉 virtuality로 보려는 것이지요. 이 잠재력으로서의 가상 공간에서 탄생하는 온라인 주체를 보려고 합니다. 이는, 또한 가면인 아바타의 잠재력을 볼 수도 있겠구요... 이렇게 되면 말이지요... 게시판에서 깽판치는 위악적인 유령들이 무엇을 욕망하는지 보이게 됩니다. 그런 그들의 욕망을 읽어내는 순간...

글을 이만 줄입니다.

(글 작성후에 덧붙여진 단상.
또 하나의 "작은 생각"이 떠오르는데, 조정환은 진중권의 보편상식론에 입각한 언어 사용에 대해 비판하면서, 모든 언어는 외국어이다 라고 주장을 합니다. 저는 이에 기반해, 어머니-말에 대해 외국인-되기, 어머니-대지와 어머니-말을 망각하기, 즉 고아-되기를 주장합니다.

기실, 원초적 언어(primodial language)로 돌아가자고 주장할 이가 바로 하이데거 일터인데, 그는 모든 외국어를 모국어로 만드는 폭력적인 기획을 하는 거죠. 이는 결국, 소수자 언어를 억압하는 결과 뿐이 파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의 영어권력처럼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