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정도 쟁점이 있다고 봅니다.

첫째, 영어가 그렇게 중요하냐?

이 대목에서도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저는 일단 영어의 중요성은 인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공계도 마찬가지겠죠. 일본의 노벨상 수상 과학자들의 사례를 들어 영어 못해도 전공 연구를 잘하면 되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는 것 같던데,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보기에 그 과학자들이 수상식 등에서 한 영어 연설의 발음이 나빴을지는 몰라도 영어 실력 자체가 그렇게 뒤지는 사람들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우선 영어 실력이 없으면 자기 분야의 중요한 연구 실적이나 트렌드를 따라가기도 어려울 겁니다.

전에 대기업 SI업체 인사 담당과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 양반이 심지어 이런 얘기까지 하더군요.

"엔지니어들 실력이요? 솔직히 걔들이 대학 전공에서 배워오는 것 아무 소용없고, 전혀 도움도 안 되요. 차라리 영어 실력 좋은 친구가 훨씬 도움이 됩니다. 프로그래밍도 마찬가지에요. 프로그래밍 언어나 기타 매뉴얼 등등이 모두 영어로 만들어져 있는데, 영어 실력이 부족하면 곤란하죠. 프로그래밍 잘 몰라도 영어 실력이 있는 친구들이 훨씬 잘 따라옵니다."

우리나라에서 리눅스나 오픈소스 쪽으로 상당히 선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을 알고 있는데, 이 사람도 우리나라 리눅스나 오픈소스가 잘 정착되기 어려운 이유의 하나로 영어 실력을 들더군요. 물론 마이크로소프트나 IBM, 오라클 등 메이저들이 오픈소스를 소외시키고 고객들의 인식이 부족한 점도 있지만 보다 본질적으로는 우리나라 리눅스 엔지니어들이 계속 업데이트되는 리눅스 관련 정보나 트렌드를 실시간으로 소화해서 고객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기에는 영어 실력이 너무 부족하다는 얘기였습니다.

이 대목에서 결론은 분명하다고 봅니다. 영어는 중요합니다. 그것도 매우매우 중요하죠. 영어의 뒷받침없이도 자기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낸 몇몇 예외적인 사례가 있을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예외일뿐 그런 사례를 일반화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게다가 앞으로는 그런 예외를 만들기도 더욱 어려워지지 않을까요? 학문적 기술적 발전 속도가 갈수록 빨라지고 정보의 생산속도도 그렇게 빨라지는데, 그리고 그 모든 정보가 영어로 구성돼 있는데 그런 정보의 도움없이 혼자 힘으로 가치있는 업적을 쌓는다? 공자가 한 얘기 "혼자서 사흘밤 사흘낮을 고민해봤지만 그 시간에 옛사람의 책을 한 권 더 읽는 것만 못했다"는 지적은 이런 경우에도 유용하다고 봅니다.

둘째, 영어가 중요한데 그 실력을 쌓는 방식이 꼭 영어(만을 사용한) 수업이어야 하느냐?

1060년대 이후 우리나라 각 분야의 발전은 무작정 자원 투입의 양적 확대를 통해 성과를 올리는, 일종의 돌관 작업 방식이었습니다. 즉, 자원 투입의 효과성과 효율성(Effectiveness & Efficiency) 따위는 상대적으로 또는 거의 절대적으로 무시돼왔다는 겁니다. 가령 다른 나라의 자원 투입 성과(ROI)가 50% 정도라고 하면 우리나라는 20~30% 정도나 됐을까? 하지만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투입할 자원을 동원하는 방식에서 결과적으로 탁월한 성과를 올렸기 때문에 이런 비경제성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런 돌관작업 방식이 통하기 어려울 것으로 봅니다. 자원 투입의 효과/효율을 따지지 않으면 100% 실패한다는 얘기입니다.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고, 제품과 서비스의 라이프사이클이 짧아지고, 단위 프로젝트 당 투입 요구 자원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영어수업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과연 지금 카이스트 같은 영어수업이 효과적일까요? 저는 영어수업을 경험해본 적도 없고 다른 사람의 경험담을 다양하게 접한 것도 아니지만, 아무리 봐도 현재의 수업 방식이 효율적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 대목에서 또하나 떠오르는 IT분야의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혹시 국산 주전산기 타이컴을 아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80~90년대에 이 문제는 국내 IT업계의 뜨거운 당근 가운데 하나였죠. 과연 국산 주전산기를 개발하는 게 맞느냐, 개발한다면 어떤 방식이어야 하느냐... 이 문제를 놓고 당시 날고긴다는 초창기 IT분야 오피니언 리더들이 정말 피튀기는 논쟁을 벌였습니다. 나중에 당시 주역 가운데 한 분, 이 분은 실은 '국산 주전산기 개발 불가론의 대표주자' 정도로 알려진 분이었는데, 나를 만났을 때는 일반의 인식과는 약간 다른 얘기를 해주더군요.

"내가 국산 주전산기의 개발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다. 다만, 국산 주전산기 개발론자의 논리인 '국산 주전산기를 개발해서 그 기계로 국가기간전산망(행정, 교육, 연구개발, 국방, 금융 등 5가지 국가망을 구축하는 사업을 말합니다)을 구축해야 한다'는 논리를 반대한 것이다. 국산 주전산기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국가기간전산망 구축 사업이다. 이렇게 중요한 사업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시스템, 가장 다양한 레퍼런스에서 검증된 시스템으로 구축해야 한다.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사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산 주전산기는 아무리 잘 개발한다 해도 검증도 안되고 여러가지 에러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런 국산 주전산기로 국가기간전산망을 개발할 경우 국가기간전산망 사업도 망치고, 결과적으로 국산 주전산기 사업도 신뢰를 잃고 망할 수밖에 없다. 내가 주장한 논리는 그것이었다."

저로서는 무척 공감이 가는 발언이더군요. 저 역시 누구 못지앟게 국산 주전산기 사업의 당위성에 동조하는 입장이었지만, 또 국산 주전산기가 여러 정부 기관이나 공사 등에 들어가서 불러일으키는 문제도 듣고 있었기 때문에 반박하기 어려웠습니다.

영어수업도 비슷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영어실력도 물론 중요합니다. 아주아주 중요하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도구'입니다. 마치 위의 에피소드에서 국산 주전산기 같은 위상이라는 겁니다(하필이면 영어를 국산 주전산기와 비유하게 되는 것이 아이러니 같기도 합니다만, 그래서 비유는 비유일뿐이죠 ^^). 그런데 실제 교수들이 가르치는 수업 내용은 수단 또는 도구가 아니라 목적이라고 봅니다. 위의 사례에서 '국가기간전산망' 같은 위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현재의 영어수업 논란에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영어 실력 함양의 중요성과 그 방식으로서 영어수업의 밀착 관계를 차단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것은 서로 등치시킬 사안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영어 실력은 중요하지만 그것을 키우는 방식은 영어수업 말고도 많다고 봅니다. 선택지가 많다는 겁니다. 그런데, 전공 등 수업 내용은 그런 선택지가 없습니다. 절대적이라는 거에요. 물론 영어수업이 전공 수업에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는 교수가 판단해서 수업 방식을 결정해야 합니다. 막무가내로 총장이나 학교가 강요할 사안은 아니라는 겁니다.

음... 써놓고 보니 너무 뻔한 얘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은 느낌이긴 하네요. 얼마 전 김동렬 글에 대해 "저렇게 지루한 얘기를 저렇게 열성적으로 하는 친구도 드물 것"이라고 제가 비웃었는데, 이번 저의 글에 대해서 그렇게 지적하신다 해도 할 말이 없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