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작에 올렸을 거라 생각했는데 검색해도 나오지를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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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세계종교쯤 되면 적어도 그 본질면에서는 그 종교에 물들지 않은 평범한 일반인들 다수의 건전한 상식의 입장에서 '이건 너무 심해'라고 여길만한 행태를 부추킬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건전한 상식이라는 것도 사회의 발전 수준에 따라 그 기준이 달라지지만 세계종교는 그 기준의 달라짐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다면적으로 풍부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테면 적잖은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지 않은 이슬람교 나라들에서 벌어지는 종파간 학살이나 비이성애자 탄압이나 테러, 특히 자살폭탄 테러나 극심한 여성 차별같은 것은 이슬람교에 대한 일면적인 이해에 근거하고 있거나 이슬람교보다는 이슬람교 이전부터 그 지역에 뿌리 내려있던 습속과 더 관계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일면적 이해는 일부는 권력욕에 의한 맹목의 결과이고 일부는 본질적으로 종교라는 것은, 세계종교쯤 되면 더더욱, 어려운 것이도 하다는 사실의 결과입니다. 기독교는 그런 류의 악습 중 상당수와 이미 절연한 상태인데, 그것은 기독교가 더민주적으로 개방되고 교육 기회가 확대되는 쪽으로의 사회발전에 힘입어 자신의 세계종교적 본질을 더 자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계종교는 형성당시 그때까지 인류가 이뤄낸 그 어떤 사상과 감성보다도 더 풍부하고 심오한 사상과 감성을 담고 있는 상징적 형식이었을 뿐 아니라 그후 2,000년 이상 동안도 그것들을 대체할 만한 상징적 형식은 나오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 풍부함과 심오함이 얼마나 올바르게 인식되고 얼마나 올바르게 사회적으로 제도화되느냐는 그때그때의 사회의 총체적 발전상태에의해 한정됩니다. 우리는 셰익스피어 동시대인들보다 더 잘 셰익스피어 작품을 이해할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 불경, 코란을 '옛날' 사람들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모든 이해의 역사라는 어깨 위에 선채 과거에 대한 더 정확하고 더 풍부한 지식에 기반해서 그 작품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자기반성을 가능하게 하고 더 고뇌하는 사회상태가 경전들에 더 절실하고 덜 독단적인 마음가짐으로 접근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세계종교가 지배권력의 일부이자윤리/도덕과 하나인 사회에 살았던 이들보다, 그래서 세계종교에 어느 정도라도 거리를 두고 학문적으로 자유롭게 접근하는 것이 어려웠던 이들보다 세속화되고 학문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세계종교를 더 온전하고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예를 들자면, 한국에서는 최근 10년전부터야 팔리어 원전으로 부터 직접 번역된 불경들이 출간되고 있습니다! 이슬람 사회들도 현재의 서구 사회들만큼 민주주의적이 된다면 알라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던 온갖 악습과 악행에 대해 부끄러워 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에 서구 사회들에서 카톨릭과 개신교가 지금보다 성경을 덜 축어적으로 해석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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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아무리 학업을 게을리 한 이들이라도 종교는 매우 보편적 현상이었던 반면 과학은 매우 국지적 현상이었고 특히 과학다운 과학은 서구에서 17세기나 되서 출현했다는 사실과 자본주의 경제도 그 무렵 서구에서만 탄생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현재 우리 모두의 삶을 틀지우는 강력한 실천과 제도가 공교롭게도 서구에서 비슷한 시기에 출현한 것입니다. 이 둘은, 과학은 종교와 마찬가지로 총체적 사회상태의수준과 무관하게 순수한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는 점, 특히 점점 더 자본 및 국가의 노예가 되어 가고 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는 전근대 사회의 신분차별을 능가하는 불평등과 정신없는 황금만능주의를 퍼뜨리고 환경/생태 위기를 심화시킨다는 면에서, 꽤나 문제적인 것들이기도 하지만 그 문제성의 해결/극복을 통해서만 인류가 다음 단계의 사회로 진보할 수 있으며 그것들이 미약했거나 없었던 때가 더 좋았던 옛날은 아니라는 의미에서 기계적으로 부정해서도 안되는 것들, 좋은 가능성을 안고 있는 것들로 껴안아야할 것들입니다.

 

과학혁명이 발생하고 자본주의 경제가 탄생한 서구는 기독교라는 독특한 종교가 1,000년 이상 동안 삶의 질서 전반을, 적어도 공식적 문화 전반을 틀지웠던 지역입니다. 당연히 기독교와 그 둘의 발생/탄생 사이의 관계는 지적 상상력과 학문적 탐구심을 자극하게 됩니다. 막스 베버같은 걸출학 사회학자가 프로테스탄트 정신을 자본주의 경제가서구에 뿌리내릴 수 있게 된 배경중 하나로 꼽는다는 점은,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여러분도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과학혁명의 경우는 어떨까요? 상식은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등 근대과학의 문을 열었던 이들이나 진화론이 기독교에 의해 당했던 억압과 비난을 떠올리면서 기독교는 과학혁명을 지체시켰다는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최근 20여년동안 그 문제에 천착한 과학사가들 다수는 오히려 그 정반대를 주장합니다. 물론 의견이 정반대인 과학사가들이 없는 것은 아니고 기독교라는 배경이 없었더라도 조금 늦게나마 과학혁명이 발생했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아래는 과학혁명의 발생에 기독교가 긍정적 배경 역할을 했다는 주장을 소개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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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amazon.com/Religion-Science-Gifford-Lectures-Barbour/dp/0060609389

 

IV. 종교와 과학의 발흥: 갈등인가 조화인가?    

 

우리는 17세기에서의 종교와 과학의 상호작용에 관해 어떤 일반화를 할 수 있을까? 갈릴레오의 경우와 같은 어떤 지점들에서, 과학의 성장이 종교적 신념들이나 제도권 교회에 의해 방해받았던 것은 분명하다. 과학과 종교 사이의 그러한 충돌 사례들은 다윈논쟁의 여파로 저술된 두 개의 영향력 있는 역사적 설명들인 드래퍼(J. W. Draper)의 <종교와 과학 사이의 갈등의 역사>와 화이트(A. D. White)의 <기독교 왕국들에서의 신학과 과학의 전쟁의 역사>의 테마들이었다. 그 두 책 모두 신학적 독단의 보수세력이 과학적 합리성의 진보세력에 대항하다 계속되는 교전들에서 패배당한 장기간의“전쟁”을 묘사했다. 양 연구 모두  갈릴레오 사태를 가장 중요한 예로 들었다.29

 

최근 십여 년 동안 이 갈등 테제는 선별적이고 과도하게 단순화된 역사적 설명이라고 전면적인 비판을 받았다. 과학과 종교는 전장의 군대들처럼 서로 대립하고 있는 통일되어 있는 세력이 아니었다. 뉴턴의 경우가 그랬던 것처럼, 종종 과학적 관념들과 종교적 관념들은 동일 인물의 삶 안에서 복잡한 방식으로 상호작용했다. 양 공동체에서의 다윈에 대한 다양한 반응에서 다시 보게 될 것처럼, 논란의 다수는 과학자들 사이와 신학자들 사이에서 일어났지, 그 두 집단 사이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개별적인 민족 문화들 - 예를 들면, 영국, 프랑스, 그리고 독일에서 - 안에서 그 쟁점들이 접근되었던 방식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30

 

반대 극단에는 과학적 관념들과 종교적 관념들 사이의 본래적 조화를 묘사하는 설명들이 있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 청교도주의가 과학 혁명에 대단히 기여했다는 주장이 있다. 청교도들은 국가의 지지를 받는 성공회에 맞서 지역적 모임들과 결합들의 권위를 방어했다. 기성 권위에 반하는 그러한 태도는 새로운 관념들에로의 더 큰 개방성을고무할 수 있었을 것이다.  1640-1660 사이에 일어났던 청교도 혁명에서, 의회 정부가왕정을 대체하였고 성공회는 해체되었다. 1660년에 창립된 왕립 학술원에서, 열 명의회원 중 일곱 명이 성직자가 다수인 청교도였는데, 이 숫자는 전체 인구에서 청교도가점하는 비율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청교도 학교들은 교과 과정에 과학 강좌들을 넣었다. 특히, 장로교인들과 조합교회주의자들은 칼빈주의 신학을 받아들였는데, 그것은 과학 연구에 강한 동기를 제공했다고 한다.

 

때때로 “개신교 윤리”라고 불리는 칼빈주의자들 사이에서의 일단의 태도들은 일상적노동에 대한 독특한 관점이었다. 루터와 마찬가지로 칼빈은 “종교적” 소명이 “세속적” 소명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거부했다. 사람들은 세속을 떠나 수도승적인 생활을하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실함과 근면함으로 어떤 직업이든 정직하고 유용한 직업을 수행하는 것에 의해 신을 섬겨야 한다. 우리는 인간적 작업의 소산들이 아니라 신적인 은총에 의해 신 앞에서 정당화되어야 하지만 세계 속에서의 우리의 삶으로 신의 사랑에 응답할 수 있다. 합리적이고 질서정연한 방법으로 수행된 노동이 일반적 복지를  증진시키고 신의 호감을 얻는다고 주장하면서, 칼빈주의는 세속적인 기획을 고무함에 있어 루터주의보다 더 활동주의적이었다. 기독교인들은 정직과 절제와 검소의 태도로 노동함으로써 신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사회학자인 로버트 머튼(Robert Merton)은 청교도주의에서의 이러한 가치 배치는 과학연구에 강력한 지지를 제공했다고 논평했다. 자연의 연구는 단번에 본래적으로 매혹적이고 인류에 이득을 주고, 신의 솜씨를 드러낼 것이자 합리적이고 질서정연한 활동을 예시할 것이기에 종교적으로 승인할 만한 것이라고 주장되었다.31 버나드 바버(Bernard Barber)는 과학에 대한 청교도적 신념들의 적합성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청교도들은 신은 자연의 작동 속에서 그 자신을 나타내 보였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을 이해하는 것을 통해 신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견해를 지녔다. 그러므로 과학은 종교에 적대적이지 않았고 차라리 신앙을 위한 단단한 토대였다. 그들은 “성공적인 작업good works”이 구원받기로 선정되었다는 신호인 이상, 그리고 인간이 사회적 공리주의를 통해 신에게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이상, 과학은 성공적인 작업과 사회적 개선의 효율적인 수단이기 때문에 과학은 좋은 것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그들은 신이 인간만이 이성을 가지도록 선택했고 이성이 게으름과 우상숭배를 제한했기 때문에 이성을 높이 평가했다.32               

 

머튼 테제는 수십 년 동안 광범위한 논쟁의 주제이었다. 일부 비판자들은 머튼이 청교도적인 것으로 확인한 가치들은 영국 국교회 교도들을 포함한 다른 집단들에 의해 폭넓게 공유되었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청교도주의는 분열해 있었고 정치적인 충성심들과 신학적 믿음들 양자 모두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었다.33 그러나 찰스 웹스터에 의한상세한 연구는 주의깊게 해석된 머튼 테제를 지지했다: 청교도주의는 영국에서 과학의발전을 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청교도적 관념들과 정치 혁명 그 자체는 과학 연구를 강하게 고무했다.34 코헨(I. B. Cohen)은 그 논쟁을 다룬 최근 저서의 서론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학구적인 비판자들에 의해 도입된 수정들 및 한정들에 의해 풍부해지기는 했지만, 본질적인 머튼 테제는 근대 역사에서 가장 의미깊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과학 혁명에 대한 모든 해설들의 하나의 두드러진 면모가 되었다.”35

 

다른 학자들은 신의 주권에 대한 칼빈주의의 강조와 물질의 수동성에 대한 대가들의 믿음 사이에 연결관계가 있음을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중세 저자들에 따르면, 물질적 대상들은 능동적으로 그것들의 목적들을 성취한다. 르네상스 연금술사들은 비교(秘敎)적 기운(force)과 보이지 않는 역능(power)이 물질 속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다.그들 가운데 일부는 신은 자연과 동일하다는 범신론적 견해를 방어했다. 점성술사들은행성들과 인간의 운명들은 고차원의 영향이나 상응에 의해 연결되어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가들은 물질은 아무런 고유한 역능이나 활동적인 내적 원리도 갖고 있지않다고 강조했다. 그것은 활동력과 생기가 없으며 신의 의지에 순응한다. 외적인 법칙들이신에 의해 그것에 부과된다. 이렇게 볼 때, “기계론적 철학”은 종교적 확신들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라이벌들 일부에 맞서 칼빈주의적 관념들을 방어하는 한 방식이었다.36

 

그러나 청교도들의 역할을 인정하면서, 우리는 영국 국교회 교도들의 기여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를 조종했고 군주정과 영국 국교회가 권력을 회복한 해인 1660년에 설립된 왕립 학술원의 활동적 핵심을 대표했다. 다수의 국교회 과학자들은 종교적 관용을 옹호했지만 그들의 왕당파적인 정치적 견해들을 방어하기 위해 새로운 과학을 이용했다. 그들은 자연에서의 법칙의 지배는 사회에서의 법칙의 지배와 유사하다고 말했다. 이 유비는 더 급진적인 개혁가들과 분리주의자들이 사회적안정에 제기하는 위협에 맞서 군주정, 기성 교회, 시장 경제를 지지하는데 이용되었다.과학은 점차 그것의 기술적 적용들과 자연에 대한 지배력으로서 그리고 따라서 사회에서의 경제적 및 정치적 권력의 한 원천으로서 평가받았다. 종교적 확신들만이 아니라 정치적 및 이데올로기적 확신들 또한 복잡한 방식으로 과학적 관념들과 상호작용했다.37

 

요약하면, 과학과 종교에 관한 갈등 테제도 조화 테제도 모든 증거와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더 정확한 설명은 이 결정적 세기 동안의 상호작용의 다양성을 반영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최종적인 폭넓은 질문 - 너무 폭넓어서 사실 어떤 답변도 추정이며 역사적 증거의 지지를 받기 어려운 질문을 제기해 보자. 세계의 모든 문화들 가운데서 왜 서구문명에서만 근대적 형태의 과학이 발전했을까? 아랍의 과학은 13세기까지는, 특히천문학, 광학, 그리고 의학에서 서구과학보다 더 진보되어 있었지만 이후 세기부터는 뒤처졌다. 최근의 한 연구는 이슬람 세계에서 과학을 쇠퇴시킨 주요 요인은 종교 당국들에 의한 고등교육의 면밀한 통제였음을 시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리스 과학도 종교적 전통의 권위에 도전했기 때문에 고등교육 기관으로부터 금지되었다. 과학은 별도의 도서관이나 천문관측소들에서만 연구될 수 있었다. 대조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은,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서구의 대학들에서 필수 교과과정의 핵심이었으며 그것의 궁극적인 전복을 향한 길을 예비하면서 광범위하게 논쟁되었다. 토미즘에의한 종합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배제하기보다는 기독교화 하는 것을 추구했다. 서구는 인간 이성에 대한 더 큰 확신을 갖고 있었고 그것의 대학들은 기본적인 신학적 교리들이 거부되지 않는 한에서는 상당한 연구의 자유를 허용했다. 과학이 발전했을 수도 있는 세계의 또 다른 지역인 중국은 이론적 과학이 아니라 실질적 기술에서 상당히 앞서있었다. 고등교육은 국가 관료들에 의해 조종되었고 과학에 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았던 인문학 고전들의 권위에 토대하고 있었다.38

 

근대과학의 발흥은, 물론, 수 세기에 걸쳐있는 복잡한 사회적 현상이었으며 수많은 요인들에 의해 영향 받았다. 교역과 상업의 성장, 이용할 수 있는 부와 여가 등의 경제적 동력이 있었다. 기술적 관심은 야금술, 항해술, 무역들, 그리고 무기들에서의 실질적 문제들에 의해 고무되었다. 숙련 장인들이나 수공업자들은 연장들과 과학적 도구들을 제작하는 것을 학습했다. 왕립 학술원, 지역의 과학 협회들, 그리고 편지들과 잡지들의 유통은 새로운 기획들을 보조했다.39 우리의 관심은, 그러나, 과학의 발흥 근저에 있는 지적 전제들에 있다.

 

자연에 대한 순수한 관심은 부분적으로는 중세사상에 대한 하나의 반동이었다. 피안의세계를 거부하면서, 14세기 르네상스 학자들은 새로운 흥분으로 이 세계 속에서의 삶의 잠재태들을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 관심은 고대의 고전적 문화들에, 예술과 문학에,그리고 세속적이지만 과학적이지는 않은 학습을 향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창조적 천재성은, 예를 들어, 예술, 공학, 그리고 해부학 같은다양한 분야들에서 표현되었다. 지리상의 오지 탐험과 자연현상들은 모험가들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종교개혁을 통해 교회의 권위가 거부되면서, 대단히 다양한 사고들이 북유럽에서 꽃피었고 진리를 추구하는 개인들에게 더 중요한 역할이 주어졌다. 


그러나 중세의 유산은 또한 과학적 기획에 유리했던 자연에 관한 전제들을 포함했다. 첫째, 자연의 가지성에 대한 확신은 과학의 합리적 또는 이론적 구성요인에 기여했다.그리스 철학자들처럼 중세 스콜라 학자들은 인간합리성에 대해 커다란 확신을 갖고 있었다. 더욱이, 그들은 우주의 질서정연함과 규칙성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견해를 법칙을 주신 자로서의 신이라는 성서적 견해와 결합했다. 일신주의는 질서의 보편성과 일관성을 함축한다 (비록 전과학 시대에는 이것이 일차적으로 원인과 결과의 법칙들이라는 견지에서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둘째, 창조의 교리는 자연의 세부는 그것을 관찰하는 것에 의해서만 알려질 수 있다는것을 함축한다. 세계가 신의 자유로운 행위의 산물이라면, 그것은 그것이 만들어졌던 대로 만들어져야만 했던 것은 아니며, 우리는 실제 관찰에 의해서만 그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주는 제1원칙들의 필연적인 귀결이 아니라 신의 의지를 조건으로 한 것이다. 신이 합리적이자 자유롭기 때문에, 세계는 질서정연하면서도 우발적이다. 대조적으로, 그리스인들의 사유는 지배적으로 연역적인 접근을 채택했다.그것은 우리가 일반적인 원리로부터 시작해서 세계의 모든 세부들이 어떻게 질서정연하게 되었는지 추론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소크라테스는 우주의 모든 개별적 요소들은 신의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유출된다고 말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플라톤적 전통은 물질을 순수한 합리적 형상들의 열등한 구현으로 보았다. 영원한 형상들은 그것들을 불완전하게 예시하는 대상들을 검토하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직관적 이성에 의해 그 본질에 즉해 파악될 수 있다. 그리스 사유의 합리적 측면(예를 들어, 수학과 대수)이 그것의 실험적 측면보다 강했던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닐 것이다. 

 

셋째, 성서에서는 자연에 대한 긍정적 태도가 지배적이다. 세계의 선함은 창조의 교리의 필연적 귀결이다. 신의 목적들은 창조된 질서와 시간과 역사의 영역들을 포함한다.확실히, 중세사상에는 (부분적으로는 그리스와 헬레니즘 세계에서 들어온) 세계 부정적인 테마들이 있었지만 물질을 본래적으로 악하다고 보는 영지주의와 마니교주의의 극단은 거부되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자연 속의 악마에 대한 상당한 공포심이 민중의상상력에 계속해 출몰했으며 아마도 과학의 발흥을 방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 베네딕트(St. Benedict), 성 프란시스(St Francis), 그리고 성 토마스(St. Thomas)같은 인물들에서, 우리는 실제적, 영적, 지적 방식 등 여러 가지 방식들로 긍정되는 창조의 선함을 볼 수 있다. 단, 성서 종교는 결코 자연의 힘들이나 유기적 생명체의 활력을 신격화하지 않았다. 세계는 예배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연구대상이 될 수 있었다.

 

합리성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강조와 함께 성서의 창조관이 결국은 과학이 촉진되는데 도움이 되었다면, 왜 중세에서는 실제적 기술들은 인상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의발전은 상대적으로 빈약했을까? 아마도 답은 부분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의 무게와 스콜라학자들의 과도한 합리주의에, 부분적으로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반발했던 제도 교회의 지배에 -그리고 물론 부분적으로는 앞에서 언급된 사회적 및 경제적요인들에 있을 것이다. 과학혁명은 인류 역사에서 단 한번 일어났고, 우리는 왜 그것이 다른 시대나 지역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는지에 관해 추정 말고는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 많은 과학사가들은 과학적 기획에 적합한 자연에 관한 가정들이 틀지어지는데서구의 종교 전통이 수행한 역할의 중요성을 인정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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