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가벼운 기분으로, 오래 묵혀뒀던 숙제를 후딱 처리한다는 기분으로 글을 올렸는데 기대보다 너무 뜨거운 반응을 보여주셔서 놀랐습니다.

의도하지 않게 사기를 쳤다는 게 이런 경우 아닌가 싶은 생각까지 들 정도입니다. 사실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해도 정보나 글의 무게감 부여가 냉철하지 못하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나도 모르게 프롤로그가 너무 거창해진 느낌입니다.

특히 쏘련의 고위층이라도 만나고 온 것 같은 느낌을 준 것은 실수였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쨌든 내 책임입니다.

차라리 적당히 시간 끌다가 흐지부지 잊혀지게 만드는 게 최선의 방식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 그동안 이 글을 쓰지 못하고 미뤄둔 부담에 약속 위반이라는 부담까지 더하게 될 것이 명확해서, 그런 방식은 포기했습니다.

지금 가능한 방식은 일단 오해의 여지가 없도록 최대한 사실을 객관적으로 쓰는 수밖에 없겠다... 본의 아니게 내 실수나 생각이 짧아서 생기는 문제는 그때그때 해명하는 수밖에 없겠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또한, 오래 끌지 말고 최대한 빨리 글을 마무리짓자... 이 정도로 정리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쓰고싶었던 내용을 대충 생략하고 덮고가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별로 흥미있는 정보나 대단한 경험을 담은 글은 아니라는 것, 극히 개인적인 경험의 차원으로만 받아들여주셨으면 합니다.

아울러, 글의 서술을 애초에 평어체로 잡아서 그대로 유지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도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쏘련기행 (2)
우리나라에서 쏘련이라는 나라는 남북분단의 원흉이자 한국전쟁을 일으키도록 북한 괴뢰집단을 배후 조정한 나라 정도로 알려져왔다. 좀더 추가한다면 해방 당시 북한 땅에 진주해서 민간인들의 손목시계를 몇 개씩 뺏어서 팔 전체에 빈 틈이 없게 빼곡이 차고 다녔다는 '로스케' 군인의 이미지, 그리고 무지막지한 독재자 스탈린의 이미지 정도가 대표적이었다.

이런 공식 이미지가 최초의 균열을 일으키고 그게 대중적인 충격을 줬던 사건이 바로 88 서울올림픽이었던 것 같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미국이 보이콧한 데 대한 보복으로 1984년 LA올림픽을 쏘련 등 공산권 국가들이 보이콧했기 때문에 사실 올림픽 무대에 쏘련이 등장한 것은 거의 8년만의 일이었다. 정부는 서울올림픽을 성공시키기 위해 당시만 해도 적성국가였던 쏘련 선수단에 대한 응원단을 조직했다. 서울 시내 여고생들이 쏘련 선수단의 시합을 관람하면서 '씨씨씨피(CCCP)'를 외쳤던 기억이 새롭다. 일부 보수층은 그 모습을 TV에서 보고 "우리나라 여고생들이 적성국인 쏘련을 공개적으로 응원하는 게 말이 되느냐?"며 불만을 토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당시 여고생들이 외쳤던 CCCP는 쏘련 선수단의 유니폼에 새겨져 있던 쏘련의 국가 명칭이었다. 영어로는 USSR(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이라는 의미였다. 즉, 쏘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의미하는 것이다. CCCP는 사실 영어식 알파벳으로 표기하면 SSSR이라는 의미이다. 즉, 소유스 소베츠키흐 소치알리스티체스키흐 레스푸블리크(에스에스에스에르, Soyuz Sovietskikh Sotsialisticheskikh Respublik)인 것이다. 러시아 알파벳에 대한 짧은 지식에 의하면 C=S, P=R의 표기이다.

'에스에스에스에르'로 외치며 응원해야 했는데, 그걸 영어식 '씨씨씨피'로 소리쳤으니 쏘련선수단이 과연 그 함성이 자신들을 향한 응원이라는 것을 이해했는지는 의문이다. 아무튼 올림픽이라는 사건 하나로 쏘련이라는 나라에 대한 이미지가 그렇게 쉽사리 바뀔 수 있는 것인지 의아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의 고정관념보다 이념적 거부감이 심각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다.

88올림픽에 이어 노태우 정부가 고르바초프 정부와 본격적인 화해 무드를 조성하면서 국내의 정치인 기업가들이 쏘련을 찾는 사례가 늘어났다. 내가 쏘련으로 간 것은 그러한 쏘련 진출이 한참 늘어나는 움직임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나는 IT분야의 전문 월간지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경력은 3년차였지만 중간에 1년 반 가량 외도를 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1년 반 정도의 경력 기자였다. 일간지 같으면 신입기자 딱지를 떼기도 어려울 정도로 박박 기어야 할 짬밥이었지만 조직이나 규모가 영세한 월간지에서는 나름 경력기자로 인정해주었다. 게다가 회사 안에서 기사를 잘 쓴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고, 좁은 IT(당시는 IT란 말이 등장하기 전이었고 그냥 컴퓨터 산업 또는 정보산업이라고 불렀다. 전산화란 말이 가장 대중적으로 쓰이는 용어였다) 업계에서는 꽤 파문을 일으킨 기사를 연달아 쓰기도 했었다. 기껏해야 취재기자 10여명 정도인 잡지사였지만 아무튼 그 안에서 나는 나름 에이스 취급을 받고 있었다.

불과 2,3년 뒤에는 컴퓨터 분야의 전문기자들이 미처 업계의 요청에 응하기 어려울 정도로 해외취재 케이스가 많아졌지만, 당시에는 해외취재 사례가 그다지 흔하지 않았다. 나보다 경험이 많은 선배기자들도 해외취재를 다녀온 사례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날 데스크가 나를 불러 "쏘련 취재를 하지 않을래?" 이렇게 물어왔다.

내가 나름 에이스 대접을 받고는 있었지만 쏘련 취재 같은 큰 아이템을 달라고 요구하기에는 경력이 많이 일천했다. 그런데도 데스크가 나를 불러 쏘련 취재를 맡기려고 한 것에는 실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당시 그 잡지사의 데스크가 70년대 말 그 유명한 남민전 사건의 잔당이었던 것이다.

80년대에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이른바 학생운동권 출신들은 1987년 직선제 개헌 수용과 노태우 정부의 등장으로 방향감각 상실과 post SM(post Student Movement, 학생운동 이후)의 진로 설정 즉, 학생운동 인자들의 배출경로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대기업의 문을 두드리기에는 운동으로서의 명분도 약했고, 실제 입사 시험 준비라는 점에서도 부실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만만한 일자리가 출판사와 잡지사 등이었다. 작심하고 정치권으로 진출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당시만 해도 제도정치권 진출은 운동의 포기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특히 보수야당 입당은 더욱 평가절하되는 분위기였다.

당시 내 데스크도 그런 사례였고, 그런 영향 탓인지 그 잡지사에는 이런저런 운동권 출신들, 빨갱이 물이 든 먹물들이 꽤 많았다. 지금은 잡지사는 말할 것도 없고, IT업계에서도 보기 드물어진 SKY 출신들이 잡지사에 발에 치일 정도로 흔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아무튼 데스크가 보기에는 성향으로 봤을 때 '쏘련'에 가기에 가장 적합했던 후배가 나였던 것 같다. 그 잡지사 기자 중에도 운동권은 꽤 있었지만 소위 NL들이 많았고, PD계는 나 혼자였다. 사실 성향으로 따지면 데스크도 남민전 출신이기 때문에 NL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내 손을 들어주었다. 물론 그런 선택에는 굵직한 기사를 연달아 터뜨려준 것에 대한 포상의 성격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쏘련 취재를 주선했던 사람은 데스크와 가까웠던 IT업체의 사장이었다. 그다지 큰 업체는 아니었지만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업체였고, 그 업체의 A사장은 서울대 공대 출신으로 근성과 기백이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 딱 봐도 성깔깨나 있어보이는, 그런 인물이었다.

A사장은 당시 이미 쏘련에 10여 차례 다녀오면서 협력 사업을 모색하고 있었다. 다만 회사의 규모가 작아 쏘련의 빅어카운트(big account)와 직접 거래를 트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당시 선경그룹(지금의 SK)의 한 계열사를 설득해서 공동으로 쏘련 시장에 진출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왕 대기업 관계자와 함께 쏘련 시장을 둘러보고 협력을 모색하는 판에 기왕이면 기자도 한 사람 대동해서 기사까지 출시하면 사업 추진에 더 효과가 있지 않을까... 그런 판단을 했던 것 같다. 그런 기사를 만들어줄 인물로 내가 선택된 셈이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당시 해외여행은 둘째 치고 비행기조차 타본 적이 없었다. 결혼은 했지만 내 고집 때문에 신혼여행도 생략했기 때문에, 최초로 비행기를 타볼 기회를 날려버린 처지였던 것이다. 내 앞 세대는 신혼여행이라야 제주도 코스가 많았고 해외코스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내 세대 이후 즉 386부터 해외 신혼여행이 본격화됐는데, 나로서는 이런저런 기회를 다 날린 셈이었다.

공식적으로 나는 쏘련의 국영 소프트웨어 업체인 디알로그(Dialogue)사의 초청을 받아서 취재 여행을 떠나는 경우였다. 비행기 운임은 A사장이 부담하고 모스크바 현지 체재비는 디알로그 사가 부담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디알로그라는 회사는 우리나라에 별로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당시 쏘련에서는 가장 규모가 컸던 소프트웨어 업체의 하나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테트리스 개발자로 잘 알려진 알렉세이 파지노프가 디알로그 소속이었다. 다만, 내가 갔을 때는 미국 IT업계로 파견 근무를 나간 상태라고 해서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당시에는 해외여행 자체도 적지 않은 부담, 큰 행사였는데 다른 나라도 아닌 쏘련으로 취재 여행을 떠난다니 집안에서는 적지않게 긴장하는 눈치였다. 마치 사지로 떠나 보내듯이 별의별 준비를 다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도 이미 쏘련 사회에 부패가 무척 심하다는 소문이 퍼져 있어서 당시 한국에서도 합법화되기 전이었던 말보로 담배를 다섯 보루인가 준비했고, 기타 좀더 높은 사람에게 쥐어줄 뇌물로 스푼 세트 등을 다수 준비했다. 무슨 물건이었는지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무튼 적지 않은 비용을 들였던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떠나기 전날에는 거의 1천달러에 가까운 달러화를 마련해서 봉투에 넣어주었다. 당시에 이 정도 현찰을 해외로 들고 나갈 수 있었는지는 기억이 분명치 않은데 아무튼 출국할 때 이 달러가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당시 내 월급보다 많은 현찰을 달러로 들고 나가면서 나 역시 갑자기 긴장을 느꼈다. 아, 정말 쏘련이라는 나라에 가는구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