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에 쫓기는 친구

 

두 친구가 곰에 쫓기고 있었다.

 

한 명이 말했다. 곰이 인간보다 훨씬 빠르게 뛸 수 있어. 그러니까 열심히 도망쳐 봐야 소용 없어.

 

그러다 다른 한 명이 답했다. 나는 너보다 빨리 달리기만 하면 돼.

 

 

 

 

 

수학과 물리학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은 「What the Tortoise Said to Achilles(거북이가 아킬레우스에게 한 말)」에서 수학에서도 결코 절대적 진리에 이를 수 없음을 우스꽝스럽게 보여주었다. 만약 누군가가 수학의 공리나 기본적인 추론 절차에 시비를 건다면 수학자는 할 말이 없다. 기본적인 추론 절차가 옳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http://www.ditext.com/carroll/tortoise.html (영어)

http://fair-use.org/mind/1895/04/what-the-tortoise-said-to-achilles (영어)

 

어쨌든 공리와 추론 절차가 옳다는 것을 가정한다면 수학 정리(theorem)는 완벽하게 증명된다.

 

반면 물리학 이론은 그런 식의 증명이 불가능하다. 이런 면에서 물리학의 검증은 수학의 증명보다 못하다. 하지만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물리학자는 자신의 이론을 수학의 정리만큼 완벽하게 증명할 필요가 없다. 물리학자는 다른 물리학자보다 더 잘하면 그만이다. 이것은 곰에 쫓기는 사람이 옆에 있는 사람보다 더 잘 달리기만 하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은 뉴턴의 중력 이론과 경쟁하는 것이지 피타고라스의 정리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다.

 

 

 

 

 

물리학과 진화 생물학

 

물리학 이론이 수학 정리처럼 완벽하게 증명되는 것은 아니지만 고도로 정밀한 정량 분석을 통해 환상적으로 검증되는 경우가 많다. 물리학 이론의 예측력은 놀라울 정도로 정밀하다. 화학 이론도 만만치 않게 정밀하게 예측한다.

 

반면 진화 생물학의 경우에는 그런 환상적인 정량 분석이 가능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진화 생물학자의 경쟁자는 물리학자나 화학자가 아니다. 생물 현상은 물리 현상이나 화학 현상에 비해 훨씬 더 지저분하다. 이런 지저분한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이 정밀한 정량 분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는 없다. 진화 생물학자는 생명 현상을 설명하려고 하는 다른 생물학자들과 경쟁해서 이기기만 하면 된다.

 

 

 

 

 

동물학과 인간 진화 심리학

 

인간에 대한 연구가 동물에 대한 연구에 비해 유리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반대인 측면이 더 많아 보인다.

 

첫째,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더 복잡하다. 인간의 뇌가 우주에서 가장 복잡한 구조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일리가 있는 말이다.

 

둘째, 인간이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에 대해 항상 정직하게 말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특히 성 생활이나 도덕성 문제와 관련하여 인간은 곧잘 거짓말을 한다. 나름대로 정직하게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말을 완전히 믿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자기 기만에 빠지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동물이 연구자를 속이는 경우는 훨씬 드물다. 또한 동물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인간보다 머리가 나쁘기 때문에 인간에 비해 연구자를 잘 속이지도 못한다.

 

셋째, 인간을 대상으로 잔인한 실험을 하는 것은 도덕적인 이유로 금지된다. 많은 경우 동물 실험도 규제되지만 여전히 인간에게는 감히 하지 못할 실험을 동물에게는 한다.

 

넷째, 인간의 경우 과거 환경과 현재 환경은 극적으로 다르다. 반면 많은 종의 동물의 경우 인간 근처에 살지 않는다면 과거와 비슷한 환경에서 산다. 따라서 인간의 경우 그만큼 진화론적으로 연구하기 힘들다. 예컨대 자식 수를 세는 것은 동물의 적응(adaptation) 또는 적응성(adaptiveness) 연구에서는 상당히 유용하다. 반면 콘돔이 있는 인간 사회에서 자식 수를 세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을 때가 많다.

 

다섯째, 인간은 오래 산다. 따라서 여러 세대를 연구하기가 힘들다. 초파리나 쥐처럼 금방 번식하는 종과 비교해 보라.

 

여섯째, 우리는 인간이다. 어떤 면에서는 인간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직시하기 힘들다. 항상 공기 속에 살면 공기의 의미를 잘 알 수 없듯이 항상 인간적인 것들을 접하기 때문에 그 의미를 모르고 살 때가 많다. 또한 인간 종의 치부를 밝히는 연구가 어떤 동물 종의 치부를 밝히는 연구에 비해 심리적 저항을 받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런 여러 가지 점들을 생각해 볼 때 인간에 대한 연구가 동물에 대한 연구에 비해 덜 검증된다고 하더라도 그리 놀랄 일도 좌절할 일도 아니다. 인간학자는 동물학자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학자는 다른 인간학자와 벌이는 경쟁에서 이기기만 하면 된다.

 

 

 

 

 

진화 심리학자는 물리학자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곰보다 더 빠르게 뛸 수 있는지 여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있다. 만약 인간이 곰보다 더 빨리 뛸 수 있다면 두 명 모두 살아 남을 수 있다.

 

하지만 두 인간 중 누가 더 빨리 뛸 수 있는지를 따지는 것도 의미가 있다. 그 답에 따라 곰에 잡혀 먹는 사람이 달라진다.

 

진화 심리학 이론이 물리학 이론에 비해 얼마나 부실하게 검증되는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있다. 우리는 검증된 만큼만 믿어야 한다. 따라서 만약 진화 심리학 이론이 물리학 이론에 비해 덜 검증되었다면 그만큼 덜 믿어야 한다. 또한 진화 심리학자들이 연구 방법론을 엉터리로 적용한다면 그것을 비판해야 한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진화 심리학 이론을 그것과 직접적으로 경쟁하는 이론과 비교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 그런 비교를 통해서 우리는 어떤 이론을 버려야 할지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 대한 두 이론이 경쟁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 두 이론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검증되었는지를 따져보고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이 때 물리학자는 이만큼이나 환상적으로 검증하는데라고 푸념해 봐야 소용이 없다.

 

그렇다면 진화 심리학자는 누구와 직접적으로 경쟁하는가? 수학자도, 물리학자도, 화학자도, 동물학자도 아니다. 그렇다면 누구인가?

 

 

 

 

 

인간 본성에 대한 가설

 

당연히 진화 심리학자는 다른 진화 심리학자와 경쟁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진화 심리학 자체의 과학적 지위이기 때문에 잠시 진화 심리학자들 사이의 경쟁은 무시하기로 하자.

 

진화 심리학에는 근접 원인(proximate cause)에 대한 가설도 있고 궁극 원인(ultimate cause, distal cause)에 대한 가설도 있다. 우선 근접 원인에 대해서만 살펴보자.

 

근접 원인에 대한 가설 중에는 인간 본성에 대한 가설이 있다. 질투는 인간 본성이다 또는 인간에게는 선천적 질투 기제가 있다와 같은 가설이 그 예다. 이런 가설은 상대성 이론과 경쟁하는 것도 아니고 피타고라스 정리와 경쟁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가설은 질투는 인간 본성이 아니라 문화적 산물이다라고 보는 문화 인류학자의 가설이나 질투는 인간 본성이 아니라 강화에 의한 학습의 산물이다라고 보는 행동주의 심리학자의 가설과 경쟁한다.

 

따라서 진화 심리학 가설이 수학에 비해, 물리학에 비해, 동물학에 비해 한심하게 검증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별로 의미가 없다. 진화 심리학 가설과 직접 경쟁하는 문화 인류학 가설이나 행동주의 심리학의 가설이 비해 더 한심하게 검증되었는지 여부를 따져야 한다.

 

이것은 창조론자가 물리학에 비해 한심한 수준으로 검증되고 있다고 진화론자를 비웃는 것이 웃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진화론자는 창조론자를 쏘아 보면서 적어도 너보다는 잘 하거든이라고 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궁극 원인에 대한 가설

 

궁극 원인에 대한 가설에는 적응 가설과 부산물 가설이 있다. 자연 선택에 의해 설계된 강간에 전문화된 심리 기제가 남자에게 진화했다라는 명제는 적응 가설이다. 반면 강간 행동을 조절하는 것에 전문화된 심리 기제가 남자에게 진화한 것은 아니다. 강간은 성 충동 기제와 같은 남자의 여러 심리 기제의 부산물이다라는 명제는 부산물 가설이다.

 

행동주의 심리학자도, 인지 심리학자도, 문화 인류학자도, 주류 사회학자도, 마르크스주의자도, 정신분석가도, 주류 페미니스트도 궁극 원인 즉 진화론적 원인에 관심이 거의 없다.

 

따라서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궁극 원인과 관련된 진화 심리학자의 가설은 다른 진화 심리학자의 가설과 경쟁할 뿐이다. 이 때 진화 심리학계 외부에서는 궁극 원인과 관련된 진화 심리학 가설이 상당히 한심하게 검증된다고 하더라도 어떤 면에서는 할 말이 없다. 억울하면 궁극 원인과 관련된 더 잘 검증된 가설을 내놓으면 된다.

 

 

 

 

 

2011-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