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을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여 옷자락을 만져보겠다고 했고 그런 제자에게 자신의 옷자락을 만지게 허용했던 예수의 행위는 종교적인 상상력을 자극한다. 나는 이 장면을 반추할 때마다 '맑스는 예수의 환생이 아닐까?'라는 종교적 관점에서 '신성모독도 이만저만이 아닌 상상'을 해본다.



그리고 그런 상상의 끝에 우연이라고 치기에는 이해가 안가는 유태인 족보가 떠올려지고... 떠올려진 유태인 족보는 '세상종말'과 관련있는 사람들이다. 구체적으로 거론해볼까?




맑스... 아담 스미스..... 노스트라다무스...... 아이쉬타인...... 그리고 핵무기를 소련에 넘긴 어떤 스파이....는 모두 유태인이다. 그리고 이런 안배는 어쩌면.... 정말로 '신의 섭리'일지도 모른다. 물론, 당장,  '하하하님'께 '음모론에 쪄들은 한그루'라고 비야냥 당하겠구나... 생각이 들지만 말이다.




내가 과문해서 예수가 옷자락을 만지도록 허용한 행위에 대한 종교적 논쟁은 보지 못했지만, 이 예수의 행위는 '기독교 반대론자들'이 포장하기에 따라 기독교를 '교리적으로' 무력화 시킬 수 있는 아주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내 관심사는 예수가 옷자락을 만지라고 허용한 행위로 발생하는 종교 교리적 논점이 아니다. 내 관심사는 다음과 같다.



"기독교에서 맑시즘적 구원은 불가능한가?"



논의를 진행하기 전에 흐강님께 자수하고 시작하자. 내가 자수할 내용은 예전에 한번 거론되었던 'Extra ecclesiam nulla salus'에 대한 나의 실수이다. 나는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라는 해석에 있어서 '로마 교황청의 공식적인 입장'은 배제한 채 천주교 내의 진보적인 입장이 '천주교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착각하는 실수를 했다는 것이다.



뭐, 그렇다고 흐강님은 희희낙락하실 수는 없을 것이다. 흐강님은 천주교의 입장은 제대로 기술하셨는지 모르겠지만 개신교의 입장은 나와 같은 실수를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물론, 흐강님이 개신교를 대표하지는 않겠지만 흐강님의 해방신학에 대한 택도 없는(?) 비방에서 개신교의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교리논쟁에 대한 결론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흐강님과 아침112님이 한편을 먹고 내가 상대적 입장에서, '교리논쟁'을 한다면 내가 이 두 분을 이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아니, 흐강님을 판단해 본다면 이길 확률보다는 질 확률이 크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그 교리를 가지고 '이단논쟁'을 해서 상대방에게 '이단 낙인찍기'를 한다면 그래서 백번을 한다면 7~80번은 내가 이길 자신이 있다. 내가 그렇게 자신있어 하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두 분은 '선량순수한 반면' 나는 '꽤나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는가? 기독교 교리논쟁은 결국 상대방에게 '이단 딱지 붙이기' 게임이고 '당신, 이단이야'라고 선언한 다음 공감대를 얻으면 해당 교리의 진실 여부는 안드로메다로 출장가고 상대방에게 '이단 딱지를 붙이는데 성공한 쪽'만의 교리가 진실로 자리매김한다는 것이다.



흐강님과 아침112님께서 신념처럼 가지고 있는 'majority=진실'이라는 것이 잘못된 공식임을 어떻게 하면 납득시킬 수 있을까? 히틀러 시대에는 히틀러가 majority였다. 그러나 지금은 히틀러가 majority가 아니다. 현재 사람들이 인식을 가지고 1030년대로 돌아간다면 히틀러의 광기는 발휘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현재 사람들의 인식을 가지고 초기 기독교로 돌아간다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 교리는 교리책의 껍대기부터 바뀌어 있을 것이다.



교리논쟁에서 majority=진실이라는 등식을 고집하는 한, 수많은 논거들은 의미없는 타이프질에 불과할 것이다. 워찌카나두~



예수가 옷자락을 만지게 한 행위는 예수가 '유물론자'라는 주장을 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옷자락을 만지도록 허용한 예수는 숭배의 대상이 되는 반면 옷자락을 만진 예수의 제자는 유물론자로 몰려 그의 복음서조차 일반인이 보지 못하도록 했다.



삼위일체에 대한 이단논쟁은 믿음 vs. 앎이지만 결국 기독교 내에서의 유물론자들의 배척의 역사이다. 아침112님께서 섹쉬하게 다비치코드로 환치시킨 그노시스 학파는 그렇게 간단하게 정의될 것이 아니다.



진보 경향의 신학자들에게 바울이 그렇게 거세게 비난의 도마 위에 오르는 근본 원인은 바로 그노시스 학파에 대항하기 위하여 바울이 예수를 절대 신성시했기 때문이다. 비극은 거기서 시작된다. 바로 삼위일체의 아우그스티누스의 천재성으로 인한 교만함이다.



아우그스티누스는 현대적 표현으로 거론하자면 소문난 오입쟁이(womanizer)였다. 그런 그에게 마니교는 참으로 매혹적인 종교였고 그의 육체적 타락을 구원할 지적 유희를 누리기에 충분했다. 마니교... 위그루에서는 국교로 인정하였고 징기스칸에 의하여 탄압을 받으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 마니교에 아우그스티누스는 귀의한다.



마니교는 조로아스터교를 접점으로 아침112님께서 섹쉬하게 다비치 코드로 환치시킨 그노시스 교와 같다. 물론, 마니교는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적 목적 때문에 조로아스터교에게 탄압을 받지만 말이다. 어쨌든, 당시에는 이 두 종교의 세상이었다. 바울이 예수의 신성성을 극대화하고 또한 천주교에서 선포의 이유로 오늘날에도 논쟁의 대상인 '마리아'를 도입한 이유이다.



마니교에 심취한 아우그스티누스는 그의 천재성을 발휘한다. 불행히도, 만일 그의 천재성을 만족시킬만한 사람이 마니교에 있었다면.... 오늘날 삼위일체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우그스티누스의 종교적 탐구 및 호기심을 만족시킬만한 사람이 당시에 마니교에는 없었다.



지적탐구를 만족할 길이 없었던 아우그스티누스는 종교계의 special one이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마니교의 주사상인 영지주의... 영지주의 신봉자가 기독교로 귀의해서는 삼위일체를 들고 나와 영지주의를 탄압한다. 그의 수필인..... '나의 라이벌들은 전부 어디 갔는가?'라는 서술은.... 삼국지에서 주유를 죽인 제갈량이 주유 빈소에 가서 주유의 넋을 희롱한 것과 같다.



과연,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불가능할까? 그리고 맑시즘적 구원은 언제까지 배척을 받아야 할까?



어쩌면 기독교는 사람들이 맑시즘적 구원을 받기를 꺼려할 것이다. 그런 심리는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민도가 높아질수록 박정희에 대한 평가 점수가 낮아지는 것과 같다. 이미 이승에서 충분히 행복한데....저승에 재물을 쌓을 필요가 있느냐 말이다.



예수는 옷자락을 만지게 했지만 2천년 넘게................ 예수의 옷자락을 만진 제자는 아직도 '이단의 낙인'이 찍혀 어둠 속에 묻혀 있다.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