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된 사회의 목표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질 경우 사람들은 ‘인간적 가능성의 실현’이나 ‘풍요로운 삶’과 같은 답변을 듣게 된다. 그러한 질문이 불가피하다고 인정되면서도 부당하게 느껴진다면 그러한 의기양양한 대답이 역겹게 느껴지는 것 또한 불가피하다. 이러한 대답은 삶을 만끽하려 들었던 1890년대의 수염이 텁수룩한 자연주의자들 같은 사회주의자의 이상형을 연상시킨다. ‘아무도 더 이상 굶주려서는 안된다’는 가장 소박한 답변만이 부드럽게 들린다.


다른 답변들은 모두 인간의 욕구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는 상태나 스스로의 목표를 향해 굴러가는 ‘생산’ 모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인간 행태를 상정하고 있다. 자유분방하고, 역동적이며, 창조적인 인간과 같은 소망상에마저 상품의 물신적 성격이 배어 있는데, 시민사회에서 이러한 물신주의에는 제약과 무기력, 항상 똑같은 것이 만드는 불모성 같은 것이 감초처럼 따라다닌다.


시민사회의 ‘무역사성’의 일부이지만 그를 보완해주는 개념인 역동성이라는 개념은 절대적인 위치로 부상되었지만, 이 개념은 생산법칙에 대한 인류학적 반사로서 해방된 사회에서는 그 자체가 욕구와는 비판적으로 대치해야 할 무엇인 것이다. 구속받지 않는 행동, 중단없는 생산, 포만감을 모르는 빵빵한 배, 신명나는 일거리인 자유 같은 관념은 시민사회의 자연 개념을 먹고사는데, 이 자연 개념은 예로부터 항상 오직 사회적인 폭력을 변경 불가능한 것, 건강한 영원성의 일부로 선전하는 데 이용되었던 것이다.


사회주의에 대한 긍정적인 청사진 - 마르크스는 이에 저항했지만 - 이 야만 상태에 머물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 소위 말하는 하향 평준화에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 이다. 두려워해야 할 사태는 인류가 유복한 생활 속에서 축 늘어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자연이라는 가면을 쓴 사회성, 즉 만듦이라는 맹목적 분노로서의 집합성이 살벌하게 확장되는 것이다. 발전 경향을 오직 생산의 증대라는 한 방향으로만 헷갈림 없이 물꼬를 트는 것은 그 자체가 저 시민적 전망, 즉 총체성으로 응축된 발전이, 질적 차이에 대해 적대적인 양화에 의해 지배되기 때문에 발전이라는 것을 한 방향으로만 허락하는 시민적 전망의 일환인 것이다.


해방된 사회라는 것을 그러한 총체성에서 해방되는 것이라고 구상할 경우 소실점이 시야에 포착되는데, 그러한 소실점은 생산의 증대나 그러한 증대가 인간에게 투영된 모습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을 것이다. 아무런 눌림도 없는 사람들이 결코 가장 안락한 자도 가장 자유로운 자도 아니라면, 족쇄가 떨어져 나간 사회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마도 인간의 궁극적 토대인 생산력보다는 상품 생산에 맞게 역사적으로 재단된 인간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내놓는 것일 것이다.


아마 진실된 사회는 발전을 식상해하면서 무언가에 쫓기듯이 낯선 별을 정복하러 돌진하기보다, 가능성들을 다 쓰지 않은 채 남겨둘 것이다. 더 이상 곤경을 모르는 인류는,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류가 지금까지 만들어왔던 장치, 그렇지만 풍요로움과 함께 곤경을 확대재생산해왔던 그 모든 장치가 미친 짓이었으며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사실에 희미하게나마 생각이 미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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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김 자체도 이러한 정황에 따라 바뀔 것이다. 그것은 현재 존재하는 즐김의 도식이 바쁘게 쫓아다니기, 계획 만들기, 의지를 세우는 것, 정복하기에서 떼어내어 생각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짐승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물 위에 누워 평화롭게 하늘을 바라보는 것, ‘그저 존재하는 것, 그 밖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더 어떤 규정할 것이나 실현할 것도 없이......’ 이런 상태가 과정이나 행위나 실현의 자리에 들어서게 되고 본래의 원천으로 돌아간다는 변증법적 논리의 약속을 진실로 이행하게 될지 모른다. 추상 개념 가운데 ‘영원한 평화’라는 개념만큼 실현된 유토피아에 가까운 것은 없다. 진보라는 경마장의 울타리 너머 구경꾼인 모파상이나 슈테른하임은 이러한 의도에 표현을 빌려준다. 그러한 의도가 갖는 부서지기 쉬운 연약성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수줍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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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 아도르노, <미니마 모랄리아> (길, 2005),  p. 208-210.  


나는 냥이 녀석(내가 지어준 이름은 '아가'이다)이 소위 '식빵굽는' 자세로  베란다에 편안히 엎드려 창밖을 무심히 내다보는 것을 
부러워하며 쳐다보곤 한다. 가끔은 심술이 나서 몰래 뒤로 다가가 복실복실한 털이 한없이 말랑한 살집을 숨기고 있는 옆구리를
검지로 콕 찌르거나 물에 젖으면 조금 덩치 큰 어른의 한주먹도 안될만한 머리통의 뒤통수에 가벼운 꿀밤을 매기곤 한다. 물이 아
니라 다른 어딘가라도 활짝 누워서 아무 생각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던 때가 마지막으로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다.

아도르노의 감탄스러운점은 그와 시대를 같이한 다른 모든 거장들의 감탄스러운 점을 넘어선다. 그는 열정, 냉혹함, 비관주의, 세
밀함, 도식성, 고고함, 상냥함, 선구적 통찰 - 이 모든 것을 동시에 갖고 있는 20세기의 유일한 거장이다. 그에 비하면, 아마도 벤야
민 정도를 제외하면, 그와 시대를 같이 한 나머지 모든 이들은 어느 정도든 '사이비'로 느껴진다. 더 진작부터 아도르노를 집중적으
로 읽었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오는데, 공부의 경우는 후회가 깊다면 그 때가 제일 좋을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