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기억이 맞다면 아마 빈서판에서 한 말일 겁니다.
십대 때던가요, 무정부주의를 열렬히 신봉하던 핑커는 경찰이 파업을 일으키자마자 사람들이 쌈박질, 강도질, 절도 강간 등 오만가지 악행을 저지르는 꼴을 본 이후부터 무정부주의를 깨끗이 포기했다고 그러죠. 스스로 어리석은 생각을 했다고 자평하면서. 그 회상을 하면서 풍기는 뉘앙스가 꼭 이랬어요. 좀 뻐기듯이, 철없는 어릴 땐 멋도 모르고 인간의 선의를 믿었지만, 알만큼 아는 지금은 그런 단계에서 말끔히 벗어났다...식으로. 전 그때 그 얘기 보고, "이 인간 좀 단순한데다 싸가지도 없네"라며 내심 불쾌해 했습니다만...


그런데 그 핑커가 이번 지진 이후 일본의 모습를 보면서 뭐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어요.
이건 경찰이 파업을 일으킨 정도가 아니죠. 하늘에서 난데없는 불벼락이 떨어진 셈이나 다를 바 없는데도 이렇다할 소동이 없거든요. 
지켜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혀를 내두를 만큼. 신문보도를 어디 외국 일간지에선 이번에 일본시민들이 보여준 질서의식을 놓고 '인간 정신이 진화함을 증거하는 사례' 운운의 다소 흰소리까지 했다던데, 이것도 그냥 수사적으로 한 발언이라면, 그럭저럭 납득이 될 정도니까요.


스티븐 핑커도 분명 지금쯤 이 사실을 알텐데, 속으로 뭔 생각을 하고 있을지. 
평소 지론과는 달리 폭동, 절도, 강간이 안 일어나서 내심 '실망?'하고 있으려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