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입니다. 젊은 분들에게는 낯선 이름일지도 모르겠는데, 김남주 시인이라는 분이 계셨죠. 남민전 사건으로 13년 가까이 오랜 수감 생활을 했었고, 80년대를 대표하는 민중시인이었죠. 그런데 그 분이 석방되고 나서 얼마 후에, 뜻하지 않은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진보적 문인들이 주최했던 어떤 문학인 행사에서 벌어졌던 일 때문이었죠. 그 행사장에 예고 없이 DJ가 방문을 했는데, 김남주 시인과의 만남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때 다른 문인들은 모두 DJ와 뻣뻣한 자세로 악수만 교환하는데 비해서, 김남주 시인은 유별나게 90도 인사를 거듭 하면서 굽신대는 자세를 취했던 모양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DJ와 담소할 때 총재님 총재님하면서 두손 모아 공손하게 응대를 했다지요.

당시 DJ는 92년 대선 패배 후 영국으로 떠났다가 갓 귀국을 했을 때라 아직 야인의 신분이었고, 정계 은퇴를 번복하려 한다는 소문 때문에 세간의 시선이 곱지 않았을 때였죠. 아뭏든 당대 최고의 진보적 민중 시인이 호남지역주의의 화신이자 보수 야당의 제왕적 총재였던 DJ에게 굽신댔다는 이야기는 삽시간에 퍼졌고, 별의 별 이야기가 다 떠돌았던 모양입니다. 천하의 김남주도 별 거 아니었다는 둥, 금뱃지 달고 싶어 환장했냐는 둥, 심지어는 마누라 덕에 목동의 아파트에서 편하게 지내더니 정신까지 썩은 모양이라는 말도 있었다니 파장이 장난이 아니었던게죠.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이 시인의 귀에까지 들어갔던 모양인지 얼마 후에 해명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나는 보수 야당 총재 김대중에게 깍듯하게 대한 것이 아니라, 그 분이 품고 있던 민중들의 지지에 한없는 경의를 표한 것이었다. 노선의 잘 잘못을 떠나, 진보연하는 자가 어찌 민중의 지도자를 함부로 대할 수가 있는 것인가." 딱히 그 해명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당시 사건에 대한 논란은 더 이상 거론이 안되고 우야 무야 정리가 되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로부터 몇개월 후 김남주 시인은 한권인가 더 시집을 내고 이승을 떠나셨죠.

제가 굳이 이렇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옛날 이야기를 상세하게 거론하는 이유는, 현재의 진보정당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에게 어떤 근본적인 질문을 하나 던져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에게 민주당은 무엇인가, 당신들에게 민주당을 지지하는 민중들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라는 것이죠. 민주당은 언젠가는 타도해야 할, 호남 민중의 고혈을 빠는 정치자영업자들의 집단? 민주당 지지자들은 그저 지역주의 선동에 놀아나는 우매한 민중? 정말 그런건가요? 그래서 민주당 따위는 언제든 함부로 막 대해도 되고, 민주당을 지지하는 우매한 민중들은 참된 진보를 몰라서 헤매고 있는, 교육과 계몽이 필요한 대상인가요? 그 것이 진보주의자로써 올바른 자세인건가요?

물론 민중들의 지지라해서 그 지향을 곧이 곧대로 존중해서는 안되겠지요.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민중들은 그 선택이라는게 늘 반민주적 반인권적 반노동 반민족적인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진보주의자들에게 그들의 뜻까지 존중해야 한다 말하기는 어려울겁니다. 그렇다면 민주당을 지지하는 민중들도 그런 사람들이었던가요? 만약 그렇다면 한나라당 지지자들도 빼고, 민주당 지지자들도 빼고 나면 당신들이 몸담아야 할 민중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요? 어쩌면 당신들의 머리속에만 존재하는 가상의 그 무엇은 아닙니까? 혹시 당신들 머리 속에 든 가치관이나 사상에 맞게 뜯어 맟춰야야 할 로봇들인가요? 도대체 진보주의자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들인가요? 

또한 민중들의 선택이 늘 옳을 수는 없습니다. 이리 저리 흔들리는 그들의 뒤를 무작정 원칙도 없이 쫓아다녀서도 안되겠지요. 그러나 만약 30년 40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의 일관된 선택이라면, 마땅히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요? 민중들의 그런 선택 혹은 명령조차도 무시하고 외면하겠다면, 도대체 진보주의는 왜 하고 계시나요? 진보주의는 대체 뭘까요?

대부분의 경우에 민중들의 선택은 그리 우아하지도 아름답지도 고상하지도 멋지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걸죽한 호남사투리 속에서 배어나오는 홍어냄새 같을 수도 있고, 야밤에 희번득거리는 사기꾼의 눈빛 같기도 하고, 비열한 동네 양아치의 몸짓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생각하는 민중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실제하는 민중들의 선택을 존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민중들이 피비린내나는 삶의 현장속에서 마침내 진보의 이상을 움켜쥐고 마는 존재임을 믿지 않는다면, 당신들이 진보주의자로 살아야 할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어쩌면 하루 빨리 냉수마시고 속차려서 생업에 종사하는 것이 인생의 행복이 될 것 같지 않으신가요? 

아무래도 어느 변방 인터넷 사이트의 듣보잡 회원이 던지는 허투른 말이겠지만, 부디 민주당을 존중하십시오. 허접해보이는 그 당 지도부와 의원들을 향해서가 아니라, 그 당이 품고 있는 민중들의 간절한 지지에 경의를 표하십시오. 민중들을 향한 시건방은 절대로 진보주의자들의 사전에 있어서는 안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들이 몸 담아야 할 정치적 민중은 이미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곳에서 오래전부터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부디 그 곳을 찾아, 그 곳에서부터 출발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