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관계가 분명치 않은 일들의 정황적 증거들에 치우쳐 한 사건의 의미와 결론을 단정하는 것, 또 그것을 더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는 그 사건의 유일한 최종적 진실로 기정사실화 하는 것, 그리하여 매체를 이용해서 (아직 검증되지 않은)그 믿음을 일파만파로 퍼나르는 것..그런 수순으로 확대강화재생산의 과정을 거쳐 결집된 대중 여론을 한윤형은 음모론이라 부르는 셈인데..

우리가 매체를 통해 받아들이는 정보가 구체적인 사실관계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저 위와 같은 경로로 형성된 것이라면, 그런 정보를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것, 그런 정보를 fact와 동급으로 취급해서 자기 판단의 근거로 삼는 것, 그리하여 구체적인 사실관계의 확인 없이 그 사건에 대해 논평하려 드는 것.. 한윤형은 이런 짓을 하면 안된다..이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최근의 광우병 사태에서도 보았듯, 이런 식의 음모론에 휩쓸렸던 대중들이 나중에 광우병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됐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죠? 자신들이 받아들인 (그 당시에는)그럴듯 했던 정보가 과학적 fact와 동떨어진 허황된 믿음인 걸 알았을 때, 대중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요? 특히나 진보진영이 사실관계 확인에 주력하기 보다, 당장의 정파적 이익을 위해 그 여론을 주도했다가 어떤 꼴을 당하게 됐죠?

제가 알기로 아직도 인지부조화에 시달리는 소수의 사람들 빼고는 다들 속았다는 생각에, 그것을 주도한 정치세력에 회의감을 갖고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렇지 않은 상당수의 사람들도 정치에 혐오감을 드러내며 회의주의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반대 정파들로 부터는 무조건 선동정치만 일삼는 사기꾼 집단 쯤으로 몰리게 됐고(=옆동네 주인장의 비아냥을 보세요), 아마 이런 건수들은 두고두고 씹히는 소재가 되겠죠.

한윤형이 그래서 저런 소리를 하는 겁니다. 무슨 조선일보를 편들기 위한 논리를 급조해낸 것이 아니라, 쭉 저런 사태들을 지켜봐 오면서 그 대상이 조선일보라 하더라도 그런 식의 음모론에 편승해서 무턱대고 까기를 하면, 그게 결국 부메랑으로 돌아와 진보세력, 나아가 진보정치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제살파먹기식 자충수가 될 뿐이라는 겁니다. 그게 여론 생태계의 성숙은 물론이요, 한국 사회의 정치적 발전에도 하등 도움될 것이 없다라는 그의 오랜 숙고 끝에 내린 결론인 셈이죠.

물론 사람에 따라 저런 생각에 동의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문제이긴 합니다만, 저는 그의 말이 전적으로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위와 같은 소리를 "맞는 말"로 여기는 분들 중에는 저런 말을 저렇게 일반론으로 표현했을 때나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것이지, 막상 구체적인 맥락에서는 저 원칙대로 판단하는 분들을 좀처럼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쉽게 말해 정파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나뉘는 민감한 이슈들에서는, 사실관계가 우선이라는 그 원칙을 그대로 고수하지 못하고, 또다시 손쉽게 음모론에 휩쓸리고 만다는 것이지요.

자, 이번에 문제가 된 한윤형의 글에서, 장자연 사건 관련 아직 확증된 사실이 있습니까? 분명히 없습니다. 그러면 확증된 사실이 없기 때문에 그 사실관계가 밝혀질 때 까지 판단을 유보하자는 한윤형의 얘기는 전혀 이상한 게 아닌 겁니다. 심지어 조선일보 조차 음모론이 유포되지 않도록 경찰에 엄중한 수사를 촉구하는 마당에, 대중들은 여전히 확고한 사실관계 보다는 그럴듯한 정황증거에 더 눈이 멀어 있고, 그래서 경찰개새퀴야..하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곧 음모론에만 빠져 있다는 것이지요. 

조선일보의 손을 들어주겠다고 한 것은 그래서 나온 말인 겁니다. 조선일보가 (사실관계가 다 밝혀진 연후의 진짜)피해자라고 생각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한윤형은 글속에서 "그럴리야 없겠지만.."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관계가 불투명한 상태이니 아직은 무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조선일보는 이 사건의 피해자이고, 동시에 음모론을 배격하고 경찰에 엄중한 수사를 촉구하면서 "사실관계 자체에 더 관심을 갖자고 말하는" 조선일보의 그 사설이 더 정론이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직도 이해가 안되시는 지요? 

앞서 말했듯이 구체적인 사실관계가 더 중요한 거 모르는 사람이 누가있냐? 그거 부정하는 사람 아무도 없다(=피노키오님 이하 여러분들이 이런 소리를 하셨지요.) 네, 이게 말은 참 쉽습니다만, "역시나" 구체적인 맥락에서 까지 그렇게 근거중심주의로 판단하는 사람은 잘 찾아볼 수 없는 법이지요.(=피노키오님은 이 사건과 근거중심주의가 별개의 논점이라고 하셨지만 그걸 별개로 놓는 순간 음모론은 번성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한윤형의 글에 대한 아크로의 반응, 그리고 끝까지 이해를 못하겠다며 저를 게시글로 따로 소환한 흐르는 강물님, 아마 그 내심들에 또아리를 틀고 있을 사실관계 우선의 원칙보다 그 의견이 정파적 색깔에 맞는지에 더 관심하는 사고의 관성, 또 한 논객의 의견을 그렇게 정파적 색안경을 끼고서 줄세우기를 하려는 모습들을 보면서, 저는 진보진영의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럴수록 한윤형의 판단은 더 맞구나는 생각이 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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