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우리는 아직 김대중의 진가를 모르고 있다.

-프레시안 : 이런 비판도 있다. DJ의 남북화해가 이른바 보수세력을 포함한 '전 국민적 컨센서스'를 이루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추진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마뜩찮게 생각했던 보수를 등에 업고 들어선 이명박 정부가 완전히 대북정책을 거꾸로 돌리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는데?

-김성재 : 그런 주장이 아주 합리적이고 멋있는 것 같지만, 사실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현재와 같은 갈등의 정치상황에서 어떻게 여야가 남북관계에서 컨센서스를 이룰 수 있나? 또 컨센서스 없는 남북정상회담 때문에 남남 갈등이 더 불거졌다고 하는데, 그것은 책임 전가와 핑계일 뿐이다. 사실 김대중대통령은 정상회담 전에 야당대표와 대화하려고 했고, 정상회담하고 난 후에도 그 결과를 설명하려고 했지만 야당이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론조사에서 우리 국민들은 항상 햇볕정책을 지지했다. 지금도 그렇다. 이것은 국민적 컨센서스가 분명히 있는 것 아닌가?

노무현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을 특검 하면서 내세운 명분이 상호주의와 공개주의인데, 이것 때문에 남북관계가 더 발전하지 못했다. 후에 노무현정부도 상호주의와 공개주의는 잘못된 것이라고 인정했다. 또 '컨센서스'를 말하는 사람들이 독일의 예를 드는데, 독일의 경우 구서독 사회민주당 정부의 동방정책을 보수당인 기독교민주당이 보수당이지만 협력하고 자기들이 집권했을 때도 계속 추진한 것은 '하나의 독일' 정책을 국내 정치로 정략화하지 않는 정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독일은 동서독 간에 전쟁을 하지 않았고, 구서독의 사회민주주의 체제와 구동독의 사회민주주의 체제는 우리처럼 극과 극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이런 비판을 보수세력이 하면 모를까, 소위 진보적인 인사라는 사람들이 하는 것은 책임전가 또는 사이비 진보의 자위의식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직접적이라기보다, 포괄적으로 얘기하겠다. 대북 특검은 정치적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DJ정부를 딛고 일어서야 된다는 정치적 생각이 있었다고 본다. 내부에서도 그런 논의가 있었다는 것도 들었다. 처음에는 (대북송금 특검을) 안 할 것이라고 했다. 국무위원도 다 반대했고, 주변 참모들도 다 반대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느닷없이 특검 하겠다고 발표를 했다. 김대중대통령은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노대통령 최측근인 청와대 고위인사가 내게 특검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직접 말했다. 그래서 내가 김대통령께 보고했다. 대통령께서 안심했는데, 뒤집어진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자시절에 대통령께 찾아와서 대통령님의 정책을 계승할 것이라고 말했고, 대통령께서는 흡족해했다. 그러나 계승보다 판을 엎어 놓았다. 당시 한나라당은 대선 패배로 사분오열되고 분당으로 몰려가는 처지에 있었다. 그런데 대북특검을 하자 상황이 돌변했다. 한나라당은 얼씨구나 하고 뭉쳐서 공격했고, 민주당과 개혁세력은 분열됐다. 결국 이것이 분당으로까지 치달렸고, 대선에서 패배한 한나라당을 승자로 만들어 주었다..."


<2>DJ는 이미 1987년 강력한 노벨평화상 후보였다

"... 당시 내가 근무하던 스위스 제네바의 에큐메니컬 센터에는 루터교 세계연합체 사무총장이었던 노르웨이 출신 주교 구나 스탈셋 목사가 나와 함께 근무하면서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는 1983년 이미 노벨평화상 최종 심사위원회의 5명 중 한사람이었고 심사위원회 부의장으로 수고하고 있어서 그 책들은 자연히 그에게 전달되었고 우리는 본격적으로 이 일을 추진하게 되었다. 나는 작년 오슬로의 그의 자택에 초대받아 오랜 시간 당시를 회상하였다. 스탈셋 목사는 오슬로의 대주교를 마지막으로 은퇴해 지금은 동티모르의 민주화 정착에 기여하고 있다. 나 이외에도 많은 국내외 인사들도 김 대통령을 추천했음을 여기서 밝혀둔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의 결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87년 8월 최종 3인의 후보자 중 한 명으로 올라 수상자가 될 가능성 매우 커졌다. 그런데 노벨 평화상은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있다. 이에 따라 노벨상 심사위원회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는 설이 있는데 그렇다면 수상자로서는 안 된다'는 조건으로 그를 수상 후보(short list) 3인에 넣었고 나는 이 문제를 밝혀야 했었다.

한국에 출장을 왔다. 동교동 조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나에게 오랜 숙고 끝에 대통령에 더 뜻이 있어서 평화상은 뒤로 미룬다는 당신의 뜻을 전했고 나는 이를 서울에서 스탈셋 목사를 통해 최종 심사위원회에 통보하였다. 이날이 1987년 8월 14일이었다. 그래서 1987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는 남미 코스타리카의 정치가 아리아스 산체스가 수상하였다. 산체스는 2006년 대통령이 됐으며 오스카르 플랜을 제창하여 남미의 평화 민주주의에 공헌하였다.

이런 사실을 알리는 이유는 아직도 '김대중은 노벨상을 수상하기 위해 김정일을 만났으며, 금전이 영향을 주었다'는 억측이 남아 있어서다. 노벨상은 로비를 할수록 수상이 멀어지며 금전의 개입은 어불성설로 이러한 근거 없는 억측들은 우리의 얼굴에 스스로 먹칠을 하는 꼴이다. 다시 말하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미 1987년에 강력한 노벨 평화상 후보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꿈인 대통령이 되기 위해 이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그는 그 후 2000년의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민주주의와 인권에 관한 투철한 신념이다. 나아가 참된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은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는 신념이다. 이러한 신념과 행동은 인권이나 민주주의의 발전이 경제 발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몇몇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정면 승부를 마다하지 않은, 참으로 값지고 위대한 도전이었다. 미국의 권위 있는 외교 전문지 <포린어페어스> 1994년 3-4월호에 실린 인터뷰 기사에서(109~126쪽) 당시 싱가포르 수상이었던 리콴유 박사는 '서구에 뿌리를 둔 인권을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은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려 들지 말라. 왜냐하면 유교의 전통을 가진 아시아의 가치는 서구식 인권 민주주의를 적용할 수 없으며 그보다 더 뜻이 깊다'고 주장했다. 이는 그 이전에도 국제 사회에서는 늘 있어왔던 주장이었다. 특히 1993년 6월 유엔 인권이사회가 주최한 오스트리아 비엔나 세계 인권 특별 총회에서 당시레이시아 수상이었던 마하티르 박사가 리콴유 박사와 비슷한 연설을 하여 후진국과 권위주의 지도자들의 박수를 받은 바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포린어페어스> 1994년 11-12월호의 인터뷰에서 이러한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선생은 리콴유 박사 등이 유교의 가르침을 잘못 해석했음을 지적하면서 유교의 가르침을 오용하여 인권의 위대한 가치를 경제 발전과 대치시킬 수 있다는 착각을 교정하였다.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의 경제 발전모델의 한계를 지적하고 자유와 인권을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경제 발전이 정답임을 명확하게 밝힌 것이다. 이는 한국의 경제 발전이 웅변으로 말하고 있지 않는가! 김 전 대통령의 이런 주장으로 전 세계 민주 활동가와 인권운동가들의 찬사를 받게 되었고 그를 세계적인 지도자로 재도약 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


<3>정치인 김대중을 다시 보게 된 한 번의 연설

'... 나는 '시민운동이란 무엇인가? 첫째..' 이러는 순간 자연스레 귀를 열게 되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첫째..' 하는 순간, 시민운동에 대한 그의 견해가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정치인이 나름 자기의 논리적 생각을 펼쳐 보이는 순간이었고, 그 내용이 그저 그런 내용이라면 더 듣지 않으면 그만일 것이고, 혹 그리 올바르지 않은 것이라면 그나마 있던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기대를 접으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듣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듣게 되었다. 그의 축사는 내내 시민운동에 대한 그의 철학과 구체적 견해가 잘 정돈된 내용으로 이어졌다. 그의 말은 시민운동에 대한 내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처음으로 김대중이란 사람을 단순한 정치인으로 보지 않게 된 시작이었다. 전혀 기대치 않았던 말들이 그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왜 우리 사회에서 시민운동이 중요한가? 시민운동은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어떤 원칙을 지켜야 하는가?를 조목조목 첫째, 둘째 하면서 이야기 하고 있었다. 우리 사회를 공정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시민운동에 감사하다가 아니라 세계의 변화와 우리 사회의 발전에 비추어 보면 시민운동이라는 영역이 정부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거나 자발적인 시민들의 노력이 지금같이 복잡하고 다원화된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내가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에 대해 가졌던 생각은 그저 권력을 잡기 위해 대의나 명분으로만 대중경제론이나 남북관계에 대해 발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여느 정치인들에 비해 참 영악하게 진보진영의 목소리를 자기 것으로 잘 만들어 가는 정치인이라는 것이었다. 그만큼 그의 주장과 논리에 대해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날이기도 했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우리가 그와 같은 대통령을 가졌었다는 것은 나라의 축복이다. 단지 노벨평화상을 받아서가 아니고, 대통령을 지낸 인물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92년 대선에서 YS에게 패배하고 정계를 은퇴한다고 발표했을 때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진영의 신문들은 우리 정치의 거목이 정계를 은퇴했다며 추켜세웠다. 무엇보다 그로 하여금 다시 정치의 영역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확실히 못을 박아두고 싶은 마음들이 앞선 것이긴 하겠지만 그들의 평가가 틀린 것은 아니라 할 것이다.

우리 정치를 설명할 때 3김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 구분일 정도로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의 위치는 우리 사회에서 뚜렷하다. 그러나 그런 구분과 구분에 따른 공과에 대한 논란은 학자들의 몫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김대중이란 정치인은 권력을 놓고 다투는 전형적인 정치인들 속에서 뒤늦게 알게 된, 무엇보다 진심으로 자기의 정치에 대한 확신과 치열한 고뇌를 가진 정치인이었다는 사실이며, 그 사실 때문에 나는 시민단체들이 그의 장례식에서 마련한 추모집회의 사회를 기쁘게 본 이유기도 하다.

본래 정치를 하려고 했던 목표와 이유는 팽개쳐 놓은 채 권력만을 위해 이합집산하고 삼국지 전략 짜듯, 혹은 장사치 장사하듯 정치를 하고 있는 전형적인 정치인들 속에서 국민들이 바라는 진정성 있는 정치인, 국민들의 고통과 고뇌를 이해하고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 보려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정치인이 나오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김대중 이라는 정치인은 훌륭한 전범이 되는 사람이다. 그를 돌아보며 그를 넘어서는 정치인이 나오게 될 때 한국 사회는 한 걸음 더 전진하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김대중은 한국 정치의 새로운 목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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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김대중 광신도가 이 링크를 찾아들어가 읽을 가능성 10%
2.이런 글들을 읽고도 김대중 광신도가 유치킨과 김대중이 뭐가 다른지 모를 가능성 90%
3.어쨌든 김대중 광신도는 유치킨이란 말에 열받아서 김대중을 '김치킨'이라고 부르고 싶어 안달복달 할 가능성 99.9%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 한 가지. 유치킨 광신도는 지능이 낮아도 가능하지만, 김대중 광신도는 아무나 하는게 아니라는 사실... 


p.s. 김대중 광신도님, 김대중을 김치킨이라고 부르고 싶어서 환장하겠죠? 부르고 싶어서 미치지 말고 그냥 김치킨이라고 부르세요. 중요한건 김대중 광신도를 자청하는 자가 김대중을 김치킨이라고 부르는 자기모순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독자들에게 별 동의를 얻지 못하는 것이니까요. 김치킨을 김치킨이라고 못불러서 혼자서 미쳐 발작하지 마시고... 맘껏 부르세요. 다만, 다른 사람들의 동의를 얻을 생각은 하지 마시고, "이거 순 사이코 아냐!!"란 평가를 감수할 각오를 하시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