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와 진보를 거칠게 정의하면, 현재의 시스템을 유지하는게 이득인 사람은 보수, 뭔가 바꾸고 변화가 있어야만 이득인 사람은 진보가 되기 쉽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이런 생각에 비추어보면, 부자일수록 보수적인 정치 지향을 가질 것이고 서민은 그 반대일거라고 예측할 수 있다. 실제 강남 지역 부촌의 한나라당 지지가 그렇지 않은 지역보다 더 높게 나오는 현상은, 그 예측이 일정 부분 타당성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하겠다.

그러나 그런 일반적 경향성이 항상 들어 맞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거꾸로 나타나는 역설적인 현상도 존재한다. 바로 강남 좌파 민주당이나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부자들과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광범위한 서민층이다. 특히 가난할수록 보다 진보적인 정책을 선호하리라는 상식적인 예측을 무너뜨리는 보수적인 서민층의 존재는 당혹스럽다. 때문에 그런 현상은 일부에서 주장하는 국민X새끼론의 근거가 되기도 하고, 고학력 중산층들에게서 더 많은 지지를 받는 진보정당들의 오랜 딜레마이기도 하다. 그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처방을 가지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가장 쉽게 눈에 뜨이는 것은 이른바 조중동 세뇌론인데, 아무래도 번짓수를 잘 못 짚은게 아닌가라는 생각이다.

글의 첫머리에서, 나는 현재의 시스템을 유지하는게 이득인 사람은 보수적이 되기 쉬울거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말은 왜 부자들에게만 적용되어야 할까? 오히려 가난한 사람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가령 현재의 시스템에서 손해를 보고 있지만, 뭔가 바뀌면 더 큰 손해를 볼거라 여기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현재는 월수 100만원의 최저임금에 쪽방에서 살고 있지만, 사회의 급격한 변화때문에 그나마 살던 쪽방에서 쫓겨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변화의 충격에 노출되는 정도는 부자보다 오히려 서민들이 훨씬 더 클 수 있다. 아무리 사회가 급변해도 부자의 전 재산을 날려버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서민들의 얼마 안되는 재산은 너무나 간단하게 지워버릴 수 있는 바람 앞의 촛불일 수 있다. 100만원에서 만원을 손해보면 1%의 손실이지만, 2만원에서 만원을 잃으면 50%가 없어지는 엄청난 손실이 되는 이치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이르면, 가스통 할배같은 서민들이 보수적인 정치 지향을 보이고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현상의 한 단면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일부의 부자들이 용감하게(?) 진보정당을 지지할 수 있는 이유 역시 쉽게 유추할 수 있다고 본다. 어떤 개인에게 사회의 변화란 늘 발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손해를 보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특히 급격한 변화가 자주 벌어지던 한국 사회에서 피해자의 대부분이 힘없고 빽없는 가난한 서민들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서민들이 정치 사회적 변화에 몸 사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다.

결국 어떤 정책이나 노선이 서민들의 지지를 받으려면, 단순히 진보적인 내용을 담거나 변화만을 주장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 아무리 화려한 진보적 정책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야기할 사회적 변화가 서민들의 안전에 불확실성을 증가시키는 거라면 쉽사리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즉 변화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민들이 안심할 수 있는 변화인지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급진적인 정책이라도 서민들이 안심을 확신할 수 있다면 지지를 받을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외면받기 십상일 것이다. 요즘 논의되고 있는 부유세 같은 정책에도 이런 부분에 대한 연구가 더 많이 반영이 되야 할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