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제이 굴드와 RNA (4)

미르 이야기 시즌 2 - 꿈의 분자 (6)

우재, 2009 04 03()

http://www.sciencetimes.co.kr/article.do?atidx=0000031009

 

 

 

굴드가 비판하는 ‘적응주의(adaptationism)’라는 말에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 굴드가 비판하는 것처럼 극단적인 ‘적응주의자(adaptationist)’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굴드가 적응주의라는 이름으로 비판했던 것은 진화의 역사 속에서 전체적인 결과를 분석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모든 표현형들을 적응이라는 하나의 편협한 관점으로 바라보는 데 안주하고 있던 학자들의 안이함이었을 뿐, 어떤 적응주의자 집단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우선 적응론(adaptationism)의 의미를 학자마다 다르게 쓴다는 점을 이야기해야겠다. 사회생물학자나 진화 심리학자는 보통 적응론을 적응에 초점을 둔 연구라는 의미로 쓴다. 반면 굴드는 적응론을 범적응론(pan-adaptationism) 모든 것이 적응이다라는 명제를 옹호한다는 의미로 쓴다. 혼란을 피하기 위해 굴드의 의미일 때에는 범적응론이라는 용어를 쓰겠다.

 

오해일 뿐이라고? 굴드는 사회생물학자나 진화 심리학자가 범적응론자라고 비판했다. 즉 사회생물학계나 진화 심리학계가 범적응론자들로 이루어진 집단이라고 이야기했다. 게다가 비슷한 이야기를 여러 곳에서 여러 번 했다. 사회생물학자들과 진화 심리학자들이 우리는 부산물이 아주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는 유전자 표류(genetic drift, 유전적 부동)를 부정하지 않는다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었다. 굴드는 사회생물학자와 진화 심리학자가 범적응론을 믿을 만큼 즉 모든 것이 적응이라고 생각할 만큼 바보라고 집요하게 이야기했다. 그래서 진화 심리학자들이 굴드를 보면 왕짜증을 내는 것이다.

 

 

 

굴드는 스팬드럴 논문을 통해 진화적 역사의 다양한 결과물들을 모조리 적응의 결과로 해석하는 진영에 비판을 가한다.

 

뭐 하자는 건가? 위에서는 모든 것이 오해일 뿐이고 굴드가 어떤 적응주의자 집단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고 썼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진화적 역사의 다양한 결과물들을 모조리 적응의 결과로 해석하는 진영을 비판했다고 한다. 집단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고 진영에 대한 이야기다? 말장난을 하자는 건가?

 

 

 

굴드는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가 보고 있는 많은 형질들이 실제로는 적응의 결과가 아니라 ‘진화적 부산물’에 불과하다는 급진적인 견해로 나간다. 이러한 굴드의 급진성이 그가 비판했던 진영의 심기를 건드린 측면이 강하지만, 굴드의 견해는 이제 널리 받아들여진다.

 

급진은 개뿔! 사회생물학자나 진화 심리학자들 중에 우리가 보고 있는 많은 형질들이 실제로는 적응의 결과가 아니라 ‘진화적 부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굴드와 르원틴의 1979년 논문이 나올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진화 생물학을 어느 정도 공부한 사람들 중에 누가 생물의 표현형이 부산물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부정한단 말인가?

 

당시에 이미 굴드가 범적응론자라고 비판했던 사람들이 부산물의 존재를 인정했기 때문에 이제 널리 받아들여진다는 이야기는 상황을 호도하는 것이다. 김우재의 글을 읽어 보면 마치 이전에는 사회생물학자들이 부산물의 존재를 잘 몰랐는데 굴드의 비판을 듣고 생각을 고쳐 먹기라도 한 것 같다.

 

 

 

적응주의자들이라 불리는 이들이라고 해서 항상 많은 진화적 형질들이 부산물일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적응주의자라 비판 받았던 것은 적응에 의한 결과들을 연구하는 것이 쉽고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다윈의 자연선택을 최고의 메커니즘으로 여기는 학문적 풍토에서 적응주의적 사고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다윈도 인지하고 있었듯이 생물의 많은 형질들은 적응으로만 설명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문제는 과학자들이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설명하기 쉬운 것들에 천착한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적응이 연구하기 쉽기 때문에 부산물에 대해 소홀했다고?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부산물은 항상 어떤 적응의 부산물이다. 예컨대 인간의 뼈의 색이 하얀 이유는 뼈를 구성하는 특정한 물질 때문이다. 뼈는 인체를 받쳐준다. 따라서 튼튼해야 한다. 아무 물질이나 튼튼한 뼈를 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인체를 받쳐주는 뼈의 기능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 즉 적응론적 연구가 있어야 뼈의 색이 왜 하얀지를 이해할 수 있다. 결국 부산물 가설도 어떤 적응 가설로 귀결된다. 적응론적 연구 없이 부산물 가설에 대해 떠드는 것은 공허하다. 왜냐하면 무엇의 부산물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적응론자는 바로 이런 질문까지 던지며 그것에 답하려고 한다. 쉬운 일만 하는 사람들이라면 아예 그런 질문도 던지지 않을 것이다.

 

 

 

특히 해밀턴의 이론 속에서 단백질을 코딩하고 있는 부위라고 명확히 규정되지 않았던 유전자 개념은 도킨스의 시대를 지배했던 중심도그마와 겹치면서 단백질을 중심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해밀턴의 모호한 유전자는 순식간에 단백질 중심으로 변질되었고, 유전자의 복제라는 이기성을 관념으로 삼은 도킨스에게 있어 단백질로 번역되지 않는 유전체의 나머지 부위는 유전자의 이기성에 의해 창출된 쓰레기로 보이기 시작한다.

 

포괄 적합도(inclusive fitness)에 대한 해밀턴의 논문에서 주된 관심은 이타성의 진화였다. 이타성은 물론 표현형이다. 따라서 해밀턴의 논지에서도 표현형에 영향을 끼치는 DNA가 주인공이었다. 표현형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DNA는 해밀턴의 입장에서도 당장은 관심 밖이었다. 쓰레기(junk)라는 명칭과 이기적 유전자(selfish gene)이라는 명칭이 적절한지 아닌지를 따질 수는 있겠다. 어쨌든 친족에 대한 이타성을 해명하기 위해 개체군 유전학(population genetics)에 대해 논할 때에는 표현형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DNA는 잠시 제쳐두어도 된다. 왜냐하면 자연 선택은 오직 표현형을 통해서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김우재는 위대한 해밀턴을 도킨스가 망쳤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 같은데 상황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해밀턴이든 도킨스든 표현형의 진화에 관심을 기울일 때에는 표현형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DNA를 무시하기도 한다. 이것은 엘리베이터를 설계하는 공학자가 엘리베이터에 타는 사람의 사상이나 인간성을 무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공학자의 입장에서는 몸무게가 중요하다. 그렇다고 그 공학자가 사상이나 인간성 자체를 항상 완전히 무시한다고 보면 안 된다. 단지 엘리베이터를 설계할 때 무시할 뿐이다.

 

 

 

이미 기무라와 킹 쥬크의 중립 가설로 인해 유전체 수준에서 자연선택은 포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도킨스를 비롯한 적응주의자들은 이러한 유전체학의 성과에 무감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립 가설 때문에 유전체 수준에서 자연선택이 포기되었다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누군가 이 구절의 의미를 설명해 주어야 비판을 하든 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컨대 중립 가설 때문에 개체군 유전학자들이 더 이상 진화를 유전자 풀(gene pool)에서 일어나는 유전자의 빈도 변화로 정의하기를 포기했다는 말인가? 우리 집에 있는 교과서에서는 포기하지 않았던데 아니면 무슨 뜻인가?

 

 

 

하지만 필자는 과학의 지속적인 발전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이를 종합해 나가려 했던 굴드에게서, 이기적인 유전자 이후의 과학의 발전에 무심했던 도킨스보다 더욱 과학자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이기적인 유전자가 출판된 1976년에서 도킨스의 과학자로서의 관심은 멈춰 있는 반면, 굴드의 과학자로서의 관심은 이보디보가 탄생하고, 유전체학의 결과들이 혁명적 결과들을 내어놓던 2000년까지 지속되었다.

 

어이가 없다. 굴드와는 달리 도킨스가 이기적인 유전자 이후에 과학의 발전에 무심했다고? 무슨 근거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실로, 굴드의 글은 전체적으로 현대 이론들, 구분들, 도구들tools에 대한 어떤 명백한 인지도 너무나 자주 결여하고 있어서 생물학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는 지난 30년 동안 “땡땡이(cutting class)” 친 사람이라는 인상을 준다. (투비 & 코스미데스, http://cafe.daum.net/Psychoanalyse/Glrk/39)

 

오히려 굴드가 땡땡이를 쳤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투비 & 코스미데스도 특정한 맥락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굴드가 전반적으로 과학의 발전에 대해 무심했다는 식으로 싸잡아서 비판한 것 같지는 않다. 반면 김우재는 도킨스가 종교 비판에만 열을 낼 뿐 아예 과학의 발전에 무관심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http://en.wikipedia.org/wiki/List_of_publications_by_Richard_Dawkins 에서 도킨스의 출간 목록을 볼 수 있다. 어떤 기준으로 보면 많다고 볼 수는 없지만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들이 1976년 이후에도 보인다. 그리고 도킨스 자신은 1982년에 출간한 『확장된 표현형(The Extended Phenotype)』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학술 서적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도킨스에게 과학자로서의 관심은 멈춰 있는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김우재는 진화 심리학을 극도로 싫어하는 것 같다. 나는 김우재가 진화 심리학이나 진화 심리학자나 진화 심리학에 친한 진화 생물학자를 욕하는 것을 몇 번 보았다. 하지만 깊이 있게 비판하는 것을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이 글을 볼 때 김우재가 진화 심리학을 뭔가 영양가 있게 비판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