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오늘 아침이 개강이군요. 어제(일요일)은 묘하게 책이 손에 잡히질 않았어요. 이제 학기 중이 되니 제 아크로 출몰 빈도는 더 낮아질 것 같습니다. 뭐 원래 눈에 잘 안 띄는 컨셉(?)으로 가고 있었으니 상관없으려나요. 그나저나 슬슬 대학원 진학 계획도 좀 고민해 봐야 하겠고, 졸업자격 때문에 한자공부도 틈틈이 해 둬야겠고(일본어를 하다 보니 사실상 별 필요가 없긴 합니다만;;), 무엇보다 토플과 GRE 공부의 필요성이 슬슬 느껴지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것이 적절히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후자에도 조금씩 가중치를 둬 나가야 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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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은 독일의 음악 기획자 그룹(musical project)인 'Lesiëm'의 'Fundamentum'입니다.


이 곡을 고른 것은 제가 딱히 이 곡을 좋아해서도 아니고(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질색입니다), 곡이 무슨 음악사적 가치가 있어서도 아닙니다. 그저 순수히 음향적인 효과와 그것으로부터 사람이 느끼는 '감정'의 관계에 대한 약간의 호기심이랄까, 뭐 그런 것 때문이에요.

일반적으로, 처음 이 곡을 들었을 때는 제법 무게가 잡혀 있고 위엄이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게다가 가사가 무려 라틴어(!)라서, 알아듣지 못하는 어떤 언어에 대한 경외감(물론 라틴어를 들을 수 있는 극소수의 분들은 제외하고)까지 보너스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에 나오는 가사를 살펴보신다면 아마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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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ulus Dominus, Romulus Dominus
로물루스는 영웅이지,로물루스는 영웅이지
Remus Romulus Divinus Duramentum
레무스와 로물루스는 신에게 믿음을 바라고 있다
Remus Romulus Divinus Fratercaedes
레무스와 로물루스는 신에게 용기를 바라고 있다
Sanctus Dominus Exitus Paludamentum
거룩한 영웅들은 팔루다멘툼(중세 갑옷류)을 입었지
Masculus Dominus Simitis Non Fundamentum
마스쿨루스는 영웅이지 시미티스는 용기가 없지
Romulus Dominus Maximus Reconcillio
로물루스는 영웅이지 막시무스는 영웅이 아니지
Romulus Dominus Maximus Non Fundamentum
로물루스는 영웅이지 막시무스는 용기가 없지
Remus Romulus Divinus Duramentum
레무스와 로물루스는 신에게 믿음을 바라고 있지
Remus Romulus Divinus Fratercaedes
레무스와 로물루스는 신에게 용기를 바라고 있지
Sanctus Dominus Exitus Paludamentum
거룩한 영웅들은 팔루다멘툼을 입었지
Masculus Dominus Simitis Non Fundamentum
마스쿨루스는 영웅이지 시미티스는 용기가 없지
Romolus Dominus Maximus Recincillio
로물루스는 영웅이지 막시무스는 영웅이 아니지
Romulus Dominus Maximus Non Fudamentum
로물루스는 영웅이지 막시무스는 용기가 없지
Romulus Dominus
로물루스는 영웅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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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게 뭔 소리입니까? 누가 영웅이고 신이 어쩌고 하는데, 상당히 시대착오적이고 상상력이 빈곤할 뿐더러 그걸 포장하는 문재도 꽝입니다. 적당히 운만 맞춰서 노래처럼 만들어 놓은 정도죠.(이 배경 스토리도 찾아보면 알게 되시겠지만 정말 별 거 없습니다) 갑자기 처음에 느꼈던 감정들이 눈 녹듯 사라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시나요? 저 같은 경우에는 그랬습니다.

저는 이 곡의 사례가 사람들이 어떤 언어에 받는 인상은 그 언어의 형식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는 주장의 좋은 실례라고 생각합니다. 중세기 이후 대부분의 서구 사람들은 라틴어를 실제로 사용하지 않지만 라틴어에 대해 어떤 경외감을 느낍니다. 물론 라틴어로 표현된 학술적 업적에 대한 찬탄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겠습니다만, 대체로 그 경외감은 학술 외적인 것에서 기인했다는 것이 문제죠. 또 하나의 서양 고전어인 고대 그리스어에는 비슷한 이미지가 꽤 옅은 것이 반증이라면 반증이겠습니다.

라틴어는 미사 집전 등의 과정에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가톨릭 교회의 공식 언어였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치밀하게 '언어 외적인 바람넣기 효과'와 '별 내용 없는 실제 언어 형식'이 결합된 환경에 거의 모든 교구민들이 주기적으로 노출되었지요. 이런 상황에서, 시간이 지나면서 후자는 잊혀지더라도 전자만 강하게 기억에 남아 '라틴어는 뭔가 신성한 데가 있다'는 인상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것이 문화 컨텐츠에 편입되어 암묵적인 재생산 구조를 갖추어 오늘날에 이르게 된 거지요. '프랑스어는 세련되며 아름다운 언어' 따위의 기타 많은 인상 역시 비슷하게 설명이 가능할 겁니다.

그렇지만, 예컨대 이런 실험을 생각해 볼 수 있지요. 대략 생후 1년 정도 된 아기를 문화권별로 고루고루 한 2~300명 쯤 차출해서, 프랑스어, 라틴어, 한국어, 러시아어, 힌두어, 스와힐리어 등등을 들려주고 어떤 수단으로든 아기의 좋고 싫음을 읽어내서(예컨대 표정 등을 이용해서) 통계를 내 보는 겁니다. 이런 실험을 충분히 반복한다면, 대부분의 경우에 나타나는 어떤 확실한 위계가 있을까요? 이 경우에 저는 PC함을 굳이 사수하면서 '없을 거다'라고 우기고 싶지는 않습니다. <음성학적으로 음소 간의 안정된 결합이 있어서, 그런 결합을 더 많이 표현하는 언어는 더 듣기 좋을 것이다> 라든가, <3대 기본 자음 중 하나인 'k'와 3대 기본 모음 중 하나인 'a'는 발음하는 데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기 때문에 그런 음성학적 성질을 직관적으로 포착한 아이라면 비교적 듣기 싫어할 수 있고, 그런 음이 많이 표현되는 언어는 더 듣기 싫을 것이다> 정도의 이유(어디까지나 가능한 가설에 불과합니다)로 인해 실제로 언어별 위계가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적어도 그런 언어적 성질을 문화적 아이콘으로까지 격상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정치성의 표현에 대해서는 충분히 비판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경우에는 간접적으로라도 이득을 보는 계층과 상대적 손해를 보는 계층이 불필요하게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p.s.
비슷한 예로 '언어의 우열'이라는 주제가 있는데, 이 주제에 대해서는 언젠가 시간이 나면 따로 포스팅을 한 번 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Sicut erat in principio, et nunc, et semper,
et in saecula saeculorum.